은퇴스쿨 - 은퇴 후 더 행복해지는 사람들의 비밀
최영일 지음 / 다른상상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달력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무심코 넘기던 날짜들이 어느 순간부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숫자들이 날짜가 아니라, 내 직장생활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은퇴. 그 단어가 갑자기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래도록 은퇴를 '나중 일'로 미뤄두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보고서, 이번 달 마감해야 할 프로젝트, 다음 주 잡힌 회의들. 늘 눈앞의 일들이 먼저였다. 은퇴 준비는 언제나 '조금 더 나중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치 언젠가는 꼭 읽겠다며 책상 한쪽에 쌓아두는 책처럼, 나의 은퇴 설계는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은 그 먼지 쌓인 책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은퇴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찾아온 감정은 설렘이 아니었다. 그것은 묵직하고 낯선 불안이었다. 은퇴 후 아침에 눈 을 뜨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전 아홉 시, 한때 내가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던 그 시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불안은 정직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조직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그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일은, 직장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을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은퇴 이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생각보다 오래 머뭇거렸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이 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막연한 공포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불안을 마주하고, 그것을 준비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비로소 무언가가 바뀐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조금 늦었지 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다.

은퇴 준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돈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모아야 하는가, 연금은 충분한가, 퇴직금은 어떻게 굴려야 하는가. 숫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물론 재정적 준비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은퇴 후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은퇴 이후에도 20년, 30년의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긴 시간을 버텨낼 돈의 흐름을 설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마음가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 간 이런 생각을 했다. 돈 걱정이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은퇴 후의 삶이 행복해지는가? 주변을 돌아보면, 넉넉한 자산을 가지고도 은퇴 후 무기력과 공허감 속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면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 아도 하루하루를 활기차고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그것이 결국 '하루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돈은 생존의 조건이지만,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지만, 돈 만으로는 살아갈 이유를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하루를 채워줄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재정 계획보다 더 깊고 어려운 숙제로 나에게 다가왔다.

은퇴 후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덮친다는 것이 있다. 바로 고독이다. 매일 부대끼던 동료들, 당연하게 채워 지던 인간관계의 밀도,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얻던 소속감.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깊은 외로움의 구렁 속으로 빠져든다고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혼자를 잘 견디는 사람인가? 사실 나는 그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입버룻처럼 말해왔다.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고 싶다고.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정말로 주어진다면, 나는 과연 그 고요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까. 아니면 그 고요함이 외로움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나를 압도해버리지는 않을까. 고독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그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을 채우는 시간으로 쓸 줄 아는가의 여부다.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걷고, 생각하고, 오래 미뤄두었던 무언가를 천천히 배워가는 시간. 그 시간을 온 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은퇴 후의 고독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충분 히 그런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훈련해 나갈 수는 있다. 고독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즐기는 사람으로.

라틴어 격언 중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현재를 쾌락적으로 소비하라는 의미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진지하게 살아라'는 촉구다. 미래를 막연히 기다리거나, 과거를 붙들고 아쉬워하는 대신,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이다. 은퇴 준비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해야지, 좀 더 나중에 시작하면 되겠지. 그렇게 미루다 보면 어느새 '나중'은 없어진다. 준비 없이 맞이한 은퇴가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간 수많은 선배들이 몸으로 증명해주었다.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어도 좋다. 처음부터 모든 답을 알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걸음씩, 내 인생 의 후반전을 내가 직접 설계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믿는다. 책은 은퇴를 준비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학자의 반야심경 해설 - 엔지니어 수행승의 35년 통찰
현오 지음 / 메이킹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과 종교를 서로 다른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체계로 이해한다. 하나는 측정하고 설계하며 증명하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고 비우며 내려놓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연 세상을 설계하는 지식과 마음을 비우는 지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현오 스님의 여정을 따라 반야심경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 물음이 결코 관념의 유희가 아님을 느꼈다.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도면과 선방의 화두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는 경계선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경계선조차 우리가 스스로 그어놓은 허상일 수 있다.

반야심경의 핵심어인 '공‘은 오랫동안 오해받아왔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 그래서 결국 허무하다는 것. 이러한 해석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반야심경이 실제로 말하려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구절은 단순히 "모든 것은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물질적 현상이 공이라는 것은, 그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수많은 관계와 조건들의 총합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의 논리가 곧 공의 다른 이름이다. 공학자의 시선으로 이것을 바라보면 흥미롭다. 하나의 구조물이 완성되기까지, 그것은 수천 개의 부품과 수백 명의 사람과 수십 년의 시간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 구조물 자체에 독립적이고 고유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이 잠시 그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공은 부재가 아니라, 관 계의 충만함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반야심경이 오온, 육근, 육경, 십팔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범주 앞에 무를 붙이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것은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독자적이고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집착을 끊으라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초대다.

반야심경을 읽으면서 나를 가장 깊이 건드린 것은 철학적 논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었다. 보살이 마음에 걸림이 없어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대목은 수행의 경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불안과 집착 의 구조를 정확히 짚어낸다. 우리는 왜 두려운가. 잃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것, 놓치면 안 될 것,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그 '얻어야 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허상임을 이야기한다. 무소득, 즉 얻을 것이 본래 없다는 통찰은 체념이 아니라 해방이다. 현오 스님이 공사 현장의 소음 속에서도, 동료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 앞에서도 수행을 이어갔다는 것은, 이 통잘이 실제로 살아 숨 쉬는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좌선 방석 위에서만 가능한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의 먼지와 소음과 인간관계의 마찰 속에서 다듬어지는 지혜. 바로 그것이 반야심 경이 말하는 '관조반야'와 '실상반야'의 세계다. 우리 대부분은 고요한 순간에는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진짜 수행은 일이 꼬이고, 사람이 상처를 주고, 계획이 무너질 때 시작된다. 그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집착 없는 행이며, 말로 설명하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인 한다.

우리는 지금 지식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유전공학은 생명의 설계도를 수정하며, 물리학은 우주의 기원을 탐색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불안과 고통의 총량도 함께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많이 가질수록, 두려움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본다. 이 지점에서 반야심경의 문제의식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경전이 제시하는 해법은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지식이 세상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지혜는 그 구조를 바라보는 마음의 방식을 바로잡는다. 지식은 문제를 푸는 도구이고, 지혜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그리고 문제가 풀린 뒤에 무엇이 남는지를 보는 눈이다. 현오 스님이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면서도 화두를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음을 삶으로 증명한다. 오히려 공의 통찰은 더 좋은 공학자가 되게 했을 수 있다. 어떤 구조물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 겸손하게 설계하고, 내가 만드는 것이 수많은 관계의 산물임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협력했을 것이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함께 건너가자는 의지의 선언이다. 이것은 나 홀로의 깨달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손 내밀기다. 지혜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현실의 부딪힘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끌어안으면서 완성되어 간다.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더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 진정한 관계가 들어오고,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진정한 용기가 생겨난다. 35년의 수행과 32년의 공학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들었다는 고백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서로 다른 길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물음을 향해 수렴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깨달음은 먼 산정에 있지 않다. 매 순간 깨어 있는 일상 속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관계 속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을 대하는 태도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늦가을 햇살이 기울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빛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그냥 바라보았다. 소노아야코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은 임무다." 처음엔 그 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 이 지날수록, 그 말은 오히려 따뜻한 무게로 가슴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온 쪽이었다. 누군가 곁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면 괜스레 화제를 돌렸고, 유언이나 장례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불길한 주문이라도 듣는 것처럼 귀를 닫았다. 죽음은 언제나 나와는 아직 먼 이야기, 미래의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날 낯선 사건처럼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 내게 소노아야코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걸어왔다.

교향곡에는 보통 네 개의 악장이 있다. 1악장은 활기차고 웅장하게 시작되고, 2악장은 느리고 서정적인 감정을 담는다. 3악장은 유쾌하거나 춤추는 듯한 리듬으로 이어지다가, 4악장에서 모든 것이 수렴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소노 아야코는 인생을 이 교향곡의 구조에 빗댔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성숙하고, 그리고 죽는다. 1악장에서 4악장까지. 이 비유가 내 마음을 흔든 것은, 그것이 수사만의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노는 4악장을 '비극의 클라이맥스'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앞선 세 악장이 있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악장, 인생이라는 작품을 마무리 짓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악장 없이는 교향곡이 완성되지 않듯, 죽음 없이는 인생도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멈추었다. 그 동안 나는 삶을 연장하는 것에만 골몰했지, 삶을 완성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더 오래'를 꿈꿨을 뿐, '더 잘'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끝을 알아야만 비로소 전체를 그릴 수 있는데, 나는 그 끝에 눈을 감은 채 앞만 보며 달려왔던 것이다.

소노 아야코는 가톨릭 신자다. 그녀의 죽음관에는 신앙이 깊이 깔려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이 종교적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은 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 임무' 로서 껴안는 자세였다. 책 속의 한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운명을 인정하지 않으면, 죽음은 괴롭다." 얼마나 담담한 말인가. 그리고 얼 마나 깊은 말인가. 우리는 대부분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왜 나인가'를 묻는다. 왜 이렇게 일찍, 왜 이런 방식으로, 왜 하필 지 금. 그 물음은 때로 절규가 되고, 원망이 되고, 분노가 된다. 소노는 말한다. 그 물음을 내려놓는 것, 주어진 것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죽음을 평온하게 맞이하는 유일한 길이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체념처럼 들렸다. 그러나 다시 읽으며 깨달았다. 운명을 인정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용감한 선택이다. 저항할 수 없는 것에 저항 하며 소진되는 대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묻는 것. 죽음 앞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인정함 으로써 삶을 더욱 온전히 살겠다는 결단이다.

소노 아야코는 노년의 쇠퇴를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몸이 불편해지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가진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는 과정이 오히려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역설처럼 들렸지만,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붙들고 산다. 재산, 명예, 관계, 젊음, 건강.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불안해하고, 더 꼭 쥐려 한다. 그런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4악장에서 그것들은 하나씩 손에서 빠져나간 다. 소노는 그것을 상실이 아닌 해방으로 본다. 나는 내 방 한 켠에 오랫동안 쌓아둔 물건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쓸 것 같아 서, 버리기 아까워서, 추억이 담겨 있어서, 그렇게 쌓인 것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붙들고 있는 과거이고, 내가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무게를 하나씩 가볍게 내려놓는 연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진정으로 남는 것은 재산도, 업적도, 이름도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이 말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노가 그 말을 꺼내는 맥락은 달랐다. 그것은 죽음을 실제로 대면한 사람이, 삶의 벼랑 끝에서 뒤돌아보며 발견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동반 자살 시도를 어린 시절에 목격했고, 아프리카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죽음을 직접 목도했다. 그 경험들이 녹아든 말이었기에, 그 무게가 달랐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연구가 있다. 더 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더 많이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나누지 못한 것. 소노의 말은 그 연구를 문학의 언어로 다시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바쁜가. 나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처음으로 내 죽음을 조금 다르게 떠올려보았다.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색을 갖게 되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어쩌면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할까 봐가 아닐까. 후회를 안고 마지막 악장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진짜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책을 덮는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살아 있는 동안 전하지 못한 말을 조금이라 도 더 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4악장이 오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연습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 - 돈과 욕망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심리실험
나이토 요시히토 지음, 니나킴 그림, 한은미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코스피가 6000을 넘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흥분도 아니고, 안도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닌 느낌이었다. 어떤 기이한 갈증 같은 것. 숫자는 커졌지만, 내 삶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느낌. 내 지갑 속 돈과 저 멀리 전광판에 찍힌 숫자 사이의 거리가, 오히려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역설이다. 이번에  나이토 요시히토의 심리학 실험들을 읽으면서, 그 갈증의 정체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인간은 이성으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제 행동을 지배하는 건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놀랍도록 비합리적이며, 놀랍도록 정직하다. 무시하라고 하면 더 집착하고, 사랑에 빠지면 우울함이 줄어들고, 불황이 깊어지면 다른 유형의 미(美)를 갈망한다. 이 모든 실험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그 욕망이 곧 경제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피 6000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내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주식시장이 새로운 고점을 향해 달릴 때마다, 사람들은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올라타야 한다는 두려움과, 이미 늦었다는 체념. 이 두 감정은 종종 구별이 어렵다. 그런데 나이토의 책에 등장하는 한 실험은 이 상황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특정 정보를 무시하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오히려 그 정보에 두 배나 강하게 반응했다는 결과. 이른바 '청개구리 심리'다.  코스피 6000 시대의 투자 심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금은 위험하다', '거품이다', '조정이 올 것이다'라는 경고가 쏟아질수록, 그 경고를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사람들의 매수 욕구는 오히려 더 커진다. 이성은 '조심하라'고 속삭이지만, 욕망은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욕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문제는 이 욕망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욕망 없이는 행동도 없다. 위험을 감수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도 동굴 속에 앉아 안전을 계산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코스피가 1000이던 시절에, 6000을 꿈꾸며 투자를 감행한 사람들의 욕망이 없었다면 — 지금 이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욕망은 시장을 만들고, 시장은 욕망을 증폭한다.  그러나 증폭된 욕망은 때로 자신의 원래 크기를 잊어버린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숫자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 욕망의 삽질은 방향을 잃는다.


나이토의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실험 중 하나는 기억의 조작에 관한 것이었다. 단 5분짜리 영상을 보고 난 직후에도, 무려 77퍼센트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없었던 장면을 '기억했다'. 유도 질문 하나로 인간의 뇌는 존재하지 않은 사실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것을 재테크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 투자 경험을 객관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내가 옳았다'고 기억하는 판단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운이 좋았거나 타이밍이 맞았거나 혹은 손실을 기억에서 지운 결과다. 인간의 뇌는 성공을 능력으로, 실패를 외부 요인으로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나이토의 또 다른 실험이 밝혀낸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코스피 6000 시대가 열리면서, SNS에는 자신의 투자 성공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자신의 투자 여정은 얼마나 정확한가? 반대로, 지금 시장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폭락의 기억을, 실제보다 더 강렬하고 선명하게 소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욕망은 기억 위에 세워지는데, 그 기억 자체가 이미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라면, 우리의 판단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불확실한 기억 위에 쌓은 욕망의 성(城). 그것이 현대인의 투자 심리가 지어진 토대일지 모른다.


나이토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실험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성의 외모가 달라진다는 연구. 불황기에는 좀 더 성숙하고 현실감 있는 상(像)을 갈망하고, 호황기에는 화려하고 이상화된 상을 추구한다는 것.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조차, 경제 상황이라는 외부 조건에 따라 유연하게 재정의된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더 깊은 진실은 이것이다. 욕망은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맥락 속에, 사회 속에, 시대 속에 존재한다. 코스피 6000이라는 숫자가 만들어낸 호황의 분위기는, 사람들의 욕망을 특정 방향으로 틀어쥔다.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많이. 이른바 '빠른 부의 실현'에 대한 욕망이 팽창하는 시대다.  그러나 나이토의 다른 실험( 행복에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 이 조용히 반박한다. 자산이 불어나는 속도와,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속도는 같은 곡선을 그리지 않는다. 코스피가 2000에서 6000으로 세 배가 됐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이 세 배가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 인간의 욕망이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채워지는 순간, 새로운 욕망의 단계로 진화한다.  6000을 넘어선 사람들은 이미 7000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고, 동시에 개인을 소진시키는 구조이기도 하다.

나이토의 심리 실험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욕망을 억압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라. 그래야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활용할 수 있다.  도박 중독자가 도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박 상태 자체'에 집착한다는 실험은, 무언가를 원한다고 생각할 때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것을 요청한다. 주식을 원하는가, 아니면 수익을 원하는가? 수익을 원하는가, 아니면 그 수익이 가져다줄 자유를 원하는가? 자유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유로운 상태에서 누릴 관계와 시간을 원하는가? 욕망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결국 그 핵심에는 언제나 인간적인 무언가가 남는다. 코스피 6000 시대를 현명하게 산다는 것은, 남보다 빨리 정보를 얻는 것도, 더 정교한 알고리즘을 쓰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다. 내가 지금 두려움으로 행동하는가, 탐욕으로 행동하는가? 이 선택은 어느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 욕망은 지금 내 진짜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인간의 심리를 역으로 활용하면, 적어도 중요한 결정 앞에서 '나는 지금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지게 된다. 불편하지만 정직한 그 질문이, 실험실 밖 현실에서는 '부의 삽질'을 '부의 성취'로 바꾸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일 것이다.


코스피 6000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욕망의 지형도다. 수십 년에 걸쳐 수천만 명의 욕망이 사고팔고 두려워하고 희망하고 절망하고 다시 믿어온 결과가, 저 하나의 숫자 안에 압축되어 있다. 그 숫자 앞에 서서, 나는 내 욕망의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한다.  나이토 요시히토의 62가지 실험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욕망을 통해 행동하고, 행동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간다. 아침형 인간이 시험에서 유리하다는 실험도, 어려운 목표를 가진 사람이 더 큰 성취감을 느낀다는 연구도, 감사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 건강해진다는 결과도, 모두 욕망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설정한 사람이 더 풍요롭게 산다는 것을 가리킨다.  코스피가 어디까지 가든, 결국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나다. 정확하게는, 내가 내 욕망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얼마나 잘 다루는가. 욕망을 부정하면 청개구리 심리처럼 더 강하게 되돌아온다. 욕망을 맹목적으로 따르면 기억이 조작되듯 현실도 왜곡된다. 그러나 욕망을 직시하고,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할 때, 그 욕망의 삽질은 비로소 땅을 제대로 파기 시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전의 대가 - 안전이 빼앗아 간 당신의 진짜 가능성에 대하여
체이스 자비스 지음, 최지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주입받는다. 좋은 학교에 가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남들이 인정하는 삶의 궤도 위에 올라타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무언가 비어 있다는 느낌.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가 하는 물음. 그 공허함의 정체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우리가 선택한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선택은 겉으로는 지혜처럼 보인다. 리스크를 계산하고, 손해를 최소화하고, 실패 가능성을 줄 이는 행동은 분명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 뒤편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끝내 시도하지 않은 것들, 가슴 어딘가에서 잠들어 버린 욕망들. 안전을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는 동시에, 진짜 삶의 가능성 역시 조금씩 줄여 나간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천천히,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데 있다. 커다란 포기는 한 번에 오지 않는다. 그 것은 수백 번의 작은 선택들 속에 숨어 있다. 더 흥미로운 제안 대신 더 안정적인 계약을 선택하는 순간,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분위기 에 맞는 말을 꺼내는 순간, 낯선 길 앞에서 익숙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쌓이면 어느 날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두려움은 본래 우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움츠리게 하며, 무모한 행동을 막아주는 본능이다. 수만 년 전, 초원에서 맹수를 마주했을 때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위협은 맹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고, 실패에 대한 상상이며, 집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진화는 아직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의 뇌는 낯선 도전 앞에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도망쳐라, 숨어라, 안전한 곳으로 가라. 더 교묘한 것은 이 두려움이 종종 남들의 목소리를 빌려 온다는 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친구가 선망하는 직업을 부러워하고, 부모가 원하는 삶을 내 꿈인 양 추구하고, 소셜 미디어 속 타인의 성공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는다. 두려움은 이렇게 조용히 삶의 설계자 자리를 차지한다.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려움이 설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겉과 속의 분리다. 이력서는 화려하고, SNS에는 번듯한 사진이 올라오고, 주변 사람들은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문득 찾아 오는 그 감각.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가?' 그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우리에게 계산을 가르쳐 주지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종종 이성이 아니다. 직관은 오랫동안 비과학적이고 감정적인 것 으로 폄하되어 왔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며 쌓아온 수많은 경험과 지식이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빠르게 처리된 결과물이다. 이성이 한 번에 몇 가지 변수를 다루는 동안, 직관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대한 정보들을 순식간에 종합해낸다. 그러나 현대의 삶은 직관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십 개의 알림과 뉴스와 타인의 의견에 노출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반응하고, 판단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신호는 점점 희미해진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 설명할 수 없는 끌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묘한 불편함 같은 것들이 소음 속에 묻혀 버린다. 직관을 되찾는 일은 거창한 수련이 아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외부의 자극을 끊고 자신에게 묻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이 선택 앞에서 내 몸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가?' 직관은 몸을 통해 먼저 말한다. 어떤 선택 앞에서 가슴이 가볍고 에너지가 생긴다면, 그것이 진짜 당신의 방향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머리로는 완벽한 선택임에도 어딘가 무겁고 답답한 느낌이 든다면,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직관은 무조건적인 충동과 다르다. 진짜 직관은 두려움과 구별된다. 두려움은 회피하게 만들지만, 직관은 나아가게 만든다. 두려움은 수축시키지만, 진짜 끌림은 비록 떨릴지라도 당신을 앞으로 이끈다. 그 차이를 느끼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자신만의 삶을 되찾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안전한 선택을 고집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실패에 대한 공포다. 실패는 단순히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앞에서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진다. 소셜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계는 언제나 성공의 하이라이트 릴이다. 아무도 자신의 좌절과 실수와 밤새 눈물 흘린 이야기를 올리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나만 빼고 잘 해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실패를 예외적인 수치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뒤에는 예외 없이 수많은 실패가 있다. 그들이 성공한 이유는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방향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정보다. 이 방법 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이 방향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혹은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피드백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감정적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실패는 아프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 이다. 진짜 필요한 자세는,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당신의 가능성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실패는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증거다.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실패도 하지 않지만, 성장도 하지 않는다.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삶은 한 번도 진짜로 살지 않은 삶일 수 있다. 안전한 길에서는 크게 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크게 배우지도 않는다. 지금 두려워하는 그 실패가, 훗날 돌아봤을 때 가장 소중한 전환점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훨씬 많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많은 선택지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선택지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표류한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아무 것도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것이다. 제약은 창의성의 적이 아니라 창의성의 어머니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쉽게 마비되지만, 명확한 한계 안에서는 오히려 더 날카롭고 독창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예산이 넉넉했다면 절대 떠올리지 못했을 아이디어가 예산이 빠듯할 때 탄생하고,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방법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의미 있는 제약을 설계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겠다는 선택.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진짜 원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전략적 집중이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다. 무한한 선택지를 쫓다가 유한한 삶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때로는 스스로 가능성의 범위를 좁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안전한 선택을 계속할 때 우리는 위험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수십 년 동안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가슴속에 있던 꿈이 서서히 시들어 가는 것은 아프지 않은가? 한 번뿐인 삶을 남들이 설계한 대본대로 살다가 마 지막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해봤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것은, 도전하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이 아닌가? 리스크를 제로로 만들 수 있는 삶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리스크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선택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안주는 정체가 아니라 퇴보이고, 편안함은 성장의 연료가 아니라 성장의 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어떤 외부적 실패보다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지금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자리가, 사실은 가장 작은 버전의 자신에게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두려움이 현명함인 척 위장하고, 포기가 신중함인 척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 발 내딛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