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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의 반야심경 해설 - 엔지니어 수행승의 35년 통찰
현오 지음 / 메이킹북스 / 2026년 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과 종교를 서로 다른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체계로 이해한다. 하나는 측정하고 설계하며 증명하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고 비우며 내려놓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연 세상을 설계하는 지식과 마음을 비우는 지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현오 스님의 여정을 따라 반야심경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 물음이 결코 관념의 유희가 아님을 느꼈다.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도면과 선방의 화두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는 경계선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경계선조차 우리가 스스로 그어놓은 허상일 수 있다.반야심경의 핵심어인 '공‘은 오랫동안 오해받아왔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 그래서 결국 허무하다는 것. 이러한 해석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반야심경이 실제로 말하려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구절은 단순히 "모든 것은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물질적 현상이 공이라는 것은, 그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수많은 관계와 조건들의 총합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의 논리가 곧 공의 다른 이름이다. 공학자의 시선으로 이것을 바라보면 흥미롭다. 하나의 구조물이 완성되기까지, 그것은 수천 개의 부품과 수백 명의 사람과 수십 년의 시간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 구조물 자체에 독립적이고 고유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이 잠시 그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공은 부재가 아니라, 관 계의 충만함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반야심경이 오온, 육근, 육경, 십팔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범주 앞에 무를 붙이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것은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독자적이고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집착을 끊으라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초대다.반야심경을 읽으면서 나를 가장 깊이 건드린 것은 철학적 논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었다. 보살이 마음에 걸림이 없어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대목은 수행의 경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불안과 집착 의 구조를 정확히 짚어낸다. 우리는 왜 두려운가. 잃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것, 놓치면 안 될 것,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그 '얻어야 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허상임을 이야기한다. 무소득, 즉 얻을 것이 본래 없다는 통찰은 체념이 아니라 해방이다. 현오 스님이 공사 현장의 소음 속에서도, 동료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 앞에서도 수행을 이어갔다는 것은, 이 통잘이 실제로 살아 숨 쉬는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좌선 방석 위에서만 가능한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의 먼지와 소음과 인간관계의 마찰 속에서 다듬어지는 지혜. 바로 그것이 반야심 경이 말하는 '관조반야'와 '실상반야'의 세계다. 우리 대부분은 고요한 순간에는 어느 정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진짜 수행은 일이 꼬이고, 사람이 상처를 주고, 계획이 무너질 때 시작된다. 그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집착 없는 행이며, 말로 설명하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인 한다.우리는 지금 지식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유전공학은 생명의 설계도를 수정하며, 물리학은 우주의 기원을 탐색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불안과 고통의 총량도 함께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많이 가질수록, 두려움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본다. 이 지점에서 반야심경의 문제의식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경전이 제시하는 해법은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지식이 세상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지혜는 그 구조를 바라보는 마음의 방식을 바로잡는다. 지식은 문제를 푸는 도구이고, 지혜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그리고 문제가 풀린 뒤에 무엇이 남는지를 보는 눈이다. 현오 스님이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면서도 화두를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음을 삶으로 증명한다. 오히려 공의 통찰은 더 좋은 공학자가 되게 했을 수 있다. 어떤 구조물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 겸손하게 설계하고, 내가 만드는 것이 수많은 관계의 산물임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협력했을 것이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함께 건너가자는 의지의 선언이다. 이것은 나 홀로의 깨달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손 내밀기다. 지혜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현실의 부딪힘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끌어안으면서 완성되어 간다.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더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 진정한 관계가 들어오고,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진정한 용기가 생겨난다. 35년의 수행과 32년의 공학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들었다는 고백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서로 다른 길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물음을 향해 수렴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깨달음은 먼 산정에 있지 않다. 매 순간 깨어 있는 일상 속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관계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