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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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목원 가드너 황금비님의 첵 <숲으로 출근합니다>를 읽고 나서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정확히는, 덮었지만 자꾸 다시 펼치게 됐다. 특종을 쫓던 기자가 잡초를 뽑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 단순한 서사가, 읽는 내내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이 책이 다시 꺼내 들었다.

나무의사 다이어리라는 형식이 흥미롭다. 다이어리는 본래 시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책의 시간은 마감 시계나 회의 일정이 아니라, 목련이 꽃눈을 맺는 계절, 삼색참죽나무 새순이 세 번 색을 바꾸는 두 달, 무궁화가 매일 아침 새 꽃을 피우고 그날 저녁 지는 주기로 흐른다. 인간이 정한 달력이 아닌, 식물이 정한 달력 위에서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삶. 그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가장 낯설고 가장 매혹적인 감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은 저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억 6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온 목련은 공룡이 어슬렁거리던 백악기에 이미 꽃을 피웠다. 우리가 이른 봄 길가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는 그 탐스러운 꽃망울 안에, 인류의 역사 전체보다 훨씬 긴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봄날의 목련 한 그루는 이전과 같은 나무가 아니게 된다.

황금비가 나무의사로서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식물의 이름이나 학명, 개화 시기가 아니다. 그는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들에서 삶의 방식을 읽어낸다. 목련꽃이 북쪽을 향해 피는 이유는 겨우내 햇빛을 받은 꽃눈의 남쪽 부분이 더 단단하게 자라 꽃이 열리는 순간 그 무게에 밀리기 때문이다. 단지 성장의 차이가 빚어낸 방향이다. 그런데 그 방향이 흔들림 없이 북쪽을 가리킨다. 의도 없이 완성된 나침반. 삼색참죽나무의 새순이 처음엔 짙은 분홍, 다음엔 베이지, 마지막엔 초록으로 변하는 것은 자외선으로부터 여린 잎을 보호하기 위해 안토시아닌이 방패막이 되어주다가 엽록소가 충분히 만들어진 후에야 물러나는 과정이다.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워진다.

기생식물인 야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뿌리도 없고 잎도 없이, 억새의 뿌리에 기대어 8월 말 단 한 철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야고. 저자는 이 식물을 두고 수목원 생태계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말한다. 수목병리학 교과서는 기생식물을 방제의 대상으로 분류하지만, 수목원의 가드너들은 억새잎을 걷어 야고를 탐방객에게 보여준다. 잡초와 야생화를 가르는 것은 식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라는 오래된 말이 여기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1인분을 못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으면서, 저자는 야고를 통해 다양함이 곧 건강함이라는 수목원의 철학을 조용히 꺼내 놓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화려한 식물도감적 지식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삶을 식물의 언어로 번역하는 방식이다. 노루오줌을 심으며 저자는 식물이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찾아주는 일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쓴다. 그늘지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노루오줌을 양지에 심으면 타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토양에 억지로 뿌리를 내리려 했던 서울에서의 10년을 그는 조용히 돌아본다. 빠른 것이 미덕인 도시에서 느린 것들을 견뎌내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마을버스가 서는 태안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0.7배속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직업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이제 매 시간 발행되는 뉴스의 속도가 아니라, 겨울 내내 꽃눈을 부풀려가는 목련의 속도로 시간을 감각한다. 늦가을 수목원을 산책하며 통통해지는 꽃눈을 바라보고 내년 봄의 개화를 기대하는 그 감각은, 내일의 주가나 다음 달의 성과와는 전혀 다른 시간관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위해 지금의 겨울을 기꺼이 견디는 것. 그것이 나무의사의 달력이다.

나무의사라는 직업 자체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나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문가. 그런데 이 책에서 나무의사는 나무를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읽어내는 사람에 가깝다. 벚나무가 병해충에 약한 것은 벚나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토심이 얕고 배수가 나쁜 도심 환경에 억지로 이식된 결과다. 잘못된 가지치기, 줄기를 감는 현수막 끈, 콘크리트 위의 좁은 토양. 나무가 아프면 먼저 환경을 봐야 한다. 이 원칙은 식물학을 넘어서 어딘가 낯익은 윤리처럼 들린다.

동백나무 장에서 저자는 천리포수목원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30년에 걸쳐 태안 곳곳에 동백나무를 심어온 이야기를 전한다. 수목원에서 키운 삽수를 무료로 나누고, 재배 기술을 공유하고, 그 나무들이 지금은 마을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18만 평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수목원의 역사가 지역의 일상 속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다음 세대의 숲이 된다는 것. 나무의사의 다이어리가 단지 식물 기록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조용하다.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목련이 북쪽을 향하는 이유를, 야고가 억새 아래 숨어 사는 방식을, 금목서 향이 만 리까지 퍼진다는 말의 뜻을 천천히 들려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이 어떤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지금의 환경이 자신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곳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의사의 다이어리는 결국 처방전이 아니라 관찰 일지다. 식물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것들이 기특해 보이는 순간이 온다고 저자는 쓴다. 여린 새순이 자외선을 막기 위해 붉게 물드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금을 버티고 있다. 그 버팀을 기특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숲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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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인간의 태도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동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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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원전 6세기, 에게해 연안의 작은 도시 밀레토스에서 한 젊은 철학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었다. 탈레스는 세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통찰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달랐다. 그는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스승이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세상의 근원은 물이 아니라 무한하고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아페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 균형을 잡고 있다고도 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이 왜 대단한 일인지 쉽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지적 풍토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고대 세계 어디서나, 제자는 스승의 말을 받들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프세 딕시트(Ipse dixit)', 즉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는 관용구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지적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상징했다. 공자의 가르침도, 붓다의 말씀도, 조로아스터의 계시도 모두 계승되고 심화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의심받지는 않았다. 지식은 쌓이되 흔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전승되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혁명적이었다. 그는 스승을 버리지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 탈레스의 지적 유산을 충분히 흡수한 뒤, 그것을 발판 삼아 더 멀리 나아갔다. 이 단순해 보이는 태도 속에 과학적 사유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

흔히 과학을 지식의 체계로 이해한다. 물리 법칙, 화학 공식, 생물학적 분류 같은 것들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 그리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과학적 인간을 규정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생명은 바다에서 탄생했으며, 지구의 환경이 변해감에 따라 생물들이 육지로 올라와 적응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어떤 생물이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다. 이는 다윈이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한 진화론의 핵심 직관을 기원전 6세기에 이미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생각은 체계적인 증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신화와 종교에 기대지 않고, 자연 현상 자체로부터 자연을 설명하려 했다. 이것이 과학적 태도의 핵심이다. 또한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상상을 했다. 우주의 다른 곳에도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우리의 세계는 그 무수한 세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통찰, 이것이 이후 인류가 원자를 발견하고, 전자기장을 정립하고, 암흑물질을 탐색하는 방식과 정확히 동일한 방법론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가정할 수 있다는 사유의 도약이야말로 과학을 신화로부터 분리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과학하는 인간은 모른다고 말할 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름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모름을 인식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수정한다. 진리는 단번에 도달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수평선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열어놓은 길은 바로 이 점진적 근사의 과정이었다.


과학은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스승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여서만이 아니었다. 밀레토스의 아고라, 즉 시민들이 모여 자유롭게 논쟁하고 서로의 의견을 비판하던 공공의 공간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민주주의적 토론의 문화가 지적 탐구의 방식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동등한 시민들이 권위에 기대지 않고 이성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고 논박하는 관행, 이것이 과학적 비판 정신의 사회적 토대였다. 이 연결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같은 인식론적 전제 위에 서 있다. 어떤 권위도 그 자체로 진리일 수 없으며, 주장은 근거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누구나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이 말했다고, 신이 계시했다고, 스승이 가르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은 증거와 논리에 의해 검증된다. 이 원리가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로, 지식의 영역에서는 과학으로 꽃을 피웠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이 연결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과학이 위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판을 억압하고 의심을 죄악시하며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는 과학적 진보와 공존하기 어렵다. 반대로 열린 토론과 건강한 비판 문화가 살아있는 곳에서 지식은 성장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행동이 단지 한 철학자의 개인적 용기가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산물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과학적 태도가 개인의 덕목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학하는 인간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기만 한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인가? 그렇지 않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를 비판했지만,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스승의 업적을 충분히 이해하고 흡수했기에 그 한계를 볼 수 있었다. 비판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상대를 알아야 더 잘 비판할 수 있고, 더 잘 비판해야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것이 맹목적 거부와 과학적 비판의 차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 태도는 힘을 발휘한다. 타인의 주장을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나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다. 두 태도 모두 이성의 포기다. 과학적 인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서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틀린 것이 있다면 용기 있게 말하되, 상대의 인격과 노력을 존중한다. 심지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균형이 나타난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아침의 바다 앞에서 경이를 느낄 수 있다. 나무에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에 물을 주고 대화를 걸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세계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수록, 그 복잡함과 정교함 앞에서 경외감은 오히려 커진다.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약 2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에 살고 있다. 양자역학, 유전공학, 인공지능, 우주론. 그러나 이 모든 성취의 근저에는 그가 처음 실천한 단순한 태도가 있다. 선인의 지식을 충분히 배우고, 그 한계를 냉정하게 파악하며, 더 나은 설명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적 태도는 단지 과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가려내야 하는 일반 시민에게도, 기후 위기나 팬데믹 같은 집단적 문제 앞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공동체에게도, 이 태도는 생존의 조건이다. 권위에 기대지도, 음모론에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증거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 틀렸다는 것을 알면 수정하는 것. 그리고 불확실성 앞에서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냥 스승이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가 2600년의 과학적 전통을 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이론이나 천재적 직관이 없어도, 매일의 작은 지적 용기들이 쌓여 세계는 조금씩 더 잘 이해된다. 오늘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 권위 있는 주장 앞에서도 '왜?'라고 묻는 것, 그것이 아낙시만드로스가 밀레토스의 아고라에서 시작한 일의 오늘날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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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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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릴 때 그네를 타면서 무서움과 짜릿함이 공존하는 그 감각을 기억하는가. 발끝이 하늘을 향할 때의 해방감, 그리고 다시 땅 쪽으로 내려오며 배 속이 간지러워지던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이 좋아서 계속 발을 굴렀다. 올라가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다.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바로 그 그네의 움직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오르고 내리고, 나아가고 돌아오는 그 진자 운동. 그것이 곧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려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거부하기 시작했다. 오직 위만을 향하고 싶어 했다. 성공, 행복, 건강, 쾌락. 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네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네의 본성에 반한다.

성공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흔히 착각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그 착각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슈미트의 말처럼, 성공은 우리를 부주의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오만함이 우리를 약하게 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그네의 운동 법칙이고, 삶의 문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려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 자리에 못을 박으려는 사람, 그리고 결국 그 못이 빠지면서 추락하는 사람. 그 충격은 스스로 내려온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다.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직한 용기다. "삶은 원래 그러하다"는 말은 냉소가 아니라, 현실을 눈 뜨고 마주하겠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의미에서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금욕적 쾌락주의'는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들린다. 즐기되 절제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슈미트가 말하는 금욕은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연습이다. 그리스어 '아스케시스(askesis)'는 본래 훈련, 연습을 뜻한다.커피 한 잔. 매일 다섯 잔씩 들이켜는 사람과, 사흘을 참은 뒤 천천히 음미하며 한 잔을 마시는 사람. 누가 더 깊은 기쁨을 얻을까. 당연히 후자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더 선명하게 느끼기 위해 잠시 물러서는 것. 그것이 금욕적 쾌락주의의 핵심이다.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사지 않는 경험은, 내 손 안에 이미 쥐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충분하다'는 감각, 라틴어로 'sufficere'.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주어야 하는 최소한이 아니라, 내가 세상으로부터 발견해내는 풍요다. 그 풍요를 발견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연습으로 길러진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뉴스, 알림, 피드, 메시지. FOMO, 즉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을 지배한다. 빠르게, 더 많이, 동시에. 하지만 슈미트는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하루에 수십 개의 숏폼 영상을 보고 나면 무언가를 본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반면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면, 그 장면들이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는다.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모였기 때문이다. 그는 'JOMO', 즉 '놓치는 것의 기쁨'을 제안한다. 선택하지 않는 자유, 비워두는 용기. 하나에 깊이 잠겨드는 것. 그것이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쁨은 양이 아니라 밀도에서 온다.

슈미트는 의미와 에너지가 함께 순환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느낄 때 에너지가 솟고, 에너지가 있을 때 의미가 보인다. 이 순환은 연결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처럼, 서로 다른 두 극이 연결될 때 비로소 전류가 흐른다. 연결이 끊어지면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하나의 극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쁨만 있어서도, 슬픔만 있어서도 안 된다. 오르는 것과 내려오는 것 사이, 그 왕복 운동 속에서야 비로소 삶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므로 의미 없음을 느낄 때의 처방은 거창한 성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잠깐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거나, 숲을 걷거나,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 그 작은 연결들이 에너지를 되살리고, 에너지가 돌아오면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슈미트가 아내, 딸과 함께 공원을 걷다 그네를 발견했을 때, 세 사람 모두 달려가 그네에 올랐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네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발을 굴러 흔들리는 그 15분은, 철학자에게 삶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거창한 자기계발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잠깐 일상 밖으로 그네를 타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운동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뜻대로 되는 부분이 극히 적다. 계획은 무너지고, 예상은 빗나가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밀려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진다. 그러니 오늘, 근처 공원의 그네 앞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올라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삶의 기술을 다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네를 타는 것은 어린 시절로의 도피가 아니다. 삶의 진동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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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의 심리학 - 투자 실패와 상실을 회복하는 마음의 기술
김형준 지음 / 드림셀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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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렇듯, 두려움이 시작이었다. 정확히는 '나만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주식 앱을 깔고, 코인 시세를 들여다보고, 삼삼오오 투자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손해라는 감각이 몸속에서 자라났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FOMO(Fear Of Missing Out)', 즉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부른다. 합리적 판단보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이다.

사실 준비가 돼서 시작하는 투자자는 드물다. 대개는 밀려서 들어간다. SNS에서 수익 인증 글을 보고, 동료가 얼마를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조급함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그렇게 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 기대가 아닌 불안이 동기였기 때문이다. 불안은 좋은 판단의 적이다. 더구나 지금은 시장의 변동성이 유례없이 크다. 미국과 이란의 긴장, 유가 상승, 인플레이션 우려가 뒤엉킨 이 시점에 코스피는 사흘 만에 20% 가까이 출렁였다. 종합주가지수 6,000을 논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이제 손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상승장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하락의 공포가 시장을 덮은 것이다. 처음 투자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이 진폭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감각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같은 금액이라도 잃을 때의 고통을 벌 때의 기쁨보다 두 배 이상 크게 느낀다는 것을 밝혀냈다. '손실 회피 편향'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락장에서 투자자들은 냉정한 분석 대신 공포로 매도 버튼을 누르는 이른바 '패닉 셀링'을 저지른다. 반대로 반등장에서는 저점에 닻을 내린 채 너무 싸다는 확신으로 무리하게 뛰어드는 '닻 내림 효과'가 작동한다. 그런데 손실이 진짜 아픈 이유는 숫자 때문만이 아니다. 돈을 잃었다는 사실은 곧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왜 그 타이밍에 팔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손실은 자책의 재료가 되고, 자책은 수치심으로, 수치심은 또 다른 충동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원금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집착이 더 큰 손실을 부르는 악순환. 투자 실패는 그렇게 한 사람의 내면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임상심리전문가이자 자살예방 교육 전문가인 김형준은 책 '손실의 심리학'에서 자신의 투자 실패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역시 출근길에 한강을 지나며 극단적인 생각이 스쳤다고 고백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을 다뤄온 전문가조차 손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이 이 주제의 핵심이다. 투자 손실은 의지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심리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흔히 손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조언은 '냉정하게 분석하라', '감정을 배제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에 가깝다. 감정은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손실 이후의 분노, 수치심, 죄책감, 우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첫 번째 단계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감정의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여기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투자 실패를 숨긴다. 성공담은 SNS를 가득 채우지만 실패의 이야기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벌었다면 누군가는 잃었다. 시장은 그렇게 작동한다. 자신의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꺼내놓는 것, 그것이 수치심의 껍데기를 벗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감정은 혼자 품고 있을 때 가장 커진다. 찰리 멍거는 투자에 필요한 것은 지능이 아니라 기질이라고 했다. 시장이 널뛰는 순간, 뇌에서 쏟아지는 도파민과 코르티솔의 신호를 견뎌내는 단단한 기질. 그 기질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내가 지금 공포 때문에 파는 건지, 합리적 판단으로 파는 건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구분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돈을 잃는 것은 사건이다. 그러나 마음을 잃는 것은 삶의 붕괴다. 투자 실패 이후 찾아오는 가장 큰 위기는 손실 자체가 아니라, 그 손실이 삶 전체의 실패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수익률 화면에 시선이 고정된 채,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시세를 확인하고, 오랜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감각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야말로 더 큰 손실이다.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용이 없다. 돈의 가치는 그것으로 무엇을 교환하느냐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좋아하는 일, 의미 있는 경험. 이것들이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투자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이것들이라면, 그 손실은 계좌의 숫자보다 훨씬 크다. 우선순위가 전도된 삶, 그것이 진짜 손실의 얼굴이다. 투자에서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포트폴리오 분산이나 손절 기준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리스크 관리는 잃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투자하는 것, 그리고 투자 결과가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되지 않도록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식 계좌의 수익률이 내 삶의 성적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투자 실패 이후의 회복은 원금 회복이 아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 손실의 늪에서 빠져나와 나를 아끼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는 것,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작은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진짜 회복이다. 역설적이게도, 투자는 그렇게 일상을 되찾은 이후에 다시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완벽한 삶이란 없다. 완벽한 투자는 더더욱 없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 과거의 실패를 반복해서 곱씹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그것이 불행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실수와 실패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것. 지금의 나, 이 순간의 삶에 다시 집중하는 것. 그 태도가 결국 투자에서도, 삶에서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


시장이 출렁이는 지금, 느끼는 불안과 공포와 후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뇌가 손실 앞에서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탓하지 마라. 다만 그 감정에 온전히 지배당하지도 마라.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오늘 저녁 식탁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삶은 여전히 상장 유지 중이며,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돈을 잃는 것은 사건이다. 마음을 잃는 것은 파국이다. 그러나 파국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삶에 다시 투자할 용기가 남아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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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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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사실은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번역해가는 일이라는 것을. 남편은 영국 사람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쪽도 아니면서 동시에 두 쪽 모두다. 아직 한국말과 영어를 뒤섞어 옹알거리는 첫째 아리아를 보고 있으면, 이 아이의 몸 안에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감수성이, 두 개의 세계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온다. 육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철학적인 일이다. '밥을 몇 시에 먹이느냐'가 아니라, '이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이냐'는 질문 앞에서 저자와 남편은 종종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간극을 번역하는 일이, 육아의 절반쯤 된다는 것도.

아이가 과자를 더 달라고 울면 저자는 빠르게 해결하려 한다. '안 돼'라는 말을 반듯하게 세우고, 그래도 울면 목소리에 단호함을 담는다. 결론을 향해 최단 거리로 달려가는 것, 그것이 저자가 알고 있는 방식이었다. 남편은 달랐다. 아이의 눈높이로 앉아 다정하게 과자를 두 개 건네며 말한다. '이거 먹고 조금 있다가 또 줄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저게 될 리가 없는데. 그런데 된다. 아이는 잠시 투정을 부리다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어느새 과자를 더 달라는 생각 자체를 잊어버린다. 나중에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어.' 그 말이 아이에게 한 말인지, 저자에게 한 말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살아온 저자에게 '기다림'은 미덕이기보다 불안에 가까웠다. 빠를수록 좋고, 남보다 앞서야 안심이 되는 사회에서, 기다리는 것은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속도를 배우고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아이는 자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는 배운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 느린 속도가, 아이에게는 더 깊은 언어로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이 머리에 붉은 혈관종이 생겼을 때, 저자는 그것을 '흠'으로 보았다.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게 생겼을까, 속으로 자책했고, 밖에 나갈 때면 모자를 씌웠다. 카페에서 낯선 사람들이 아이를 보다가 혈관종을 발견하고 '다쳤어요?'라고 묻는 말들이 쌓일수록, 마음 한쪽이 점점 작아졌다. 영국에 갔을 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버스에서도, 공원에서도, 식당에서도, 사람들은 아이에게 웃어주었지만, 아이의 머리에 있는 붉은 자국에 대해서는 눈길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깨달았다. 타인의 몸을 평가하지 않는 것, 다름을 지적하지 않는 것, 그것은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그냥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남편도 그런 사람이다. 결혼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외모에 대해 평가하거나 지적한 적이 없다. 출산 후 달라진 몸의 선, 배 위에 남은 수술 흔적,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저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처음에는 그 다정함이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진심인가, 싶었다. 그러나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오랫동안 내 몸에 들이밀었던 빡빡한 기준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누군가의 다름을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은 가정일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를, 아이들은 말 없이 배운다. 평가하지 않는 눈, 그것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언어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종종 말한다. '완벽하면 재미없어.' 처음엔 그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 오래 생각하고 나서야, 그것이 위로가 아니라 철학임을 알았다. 우리는 아이를 완벽하게 키우려 한다. 제때 먹이고, 제때 재우고, 실수 없이 훈육하고, 상처 없이 자라게 하려 한다. 그러나 아이는 완벽한 환경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부모와 함께 자란다. 엄마가 화를 내는 날도 있고, 아빠가 놓치는 것도 있고, 서로 다른 방식 때문에 두 사람이 조용히 갈등하는 날도 있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실수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아빠가 화내지 않고 기다리는 것,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방향을 찾아가는 것, 이런 장면들이 아이의 안에 쌓여, 언젠가 아이 자신의 언어가 될 것이다. 생일 카드에 남편이 썼다. '논란 더 많이 만드세요.' 그 문장이 왜 그렇게 뭉클했는지, 처음엔 설명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것은 눈치 보지 말고,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나답게 살라는 말이었다. 완벽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아이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남과 달라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네가 더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고.

아이들이 잠든 밤, 어두운 거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불빛이 켜지는 기분이 든다. 불완전하고, 어설프고, 매일 조금씩 실패하면서도, 이 가족과 함께 이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풍요롭다는 것을, 두 세계 사이에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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