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은 오늘 끝내는 법 - 마감이 두려운 직장인을 위한
이동귀 외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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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미루는지. "해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거부감이다.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적어도 그 편이 조금은 그럴듯하게 들렸으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냥, 다 하기 싫었다. 이유도 명분도 없이. 그냥 통째로다. 이동귀 교수 연구팀의 이 책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에요"라고. 미루기는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불안과 피로와 낮은 동기가 뒤엉킨 감정의 언어라고.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면서도, 동시에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변해야 한다는 책임도 함께 딸려오니까.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순간, 우리 뇌는 아주 잠깐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안도감을 '승리'처럼 기억한다. 문제는 그 안도가 진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편함을 잠시 옆으로 밀어둔 것뿐인데, 뇌는 그걸 해결이라고 착각한다.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시험 시간 내에 다 못 풀면 어쩌지" 그 공포 하나가 씨앗이 되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헐떡이며 달리고 있다. 시간에 쫓기는 삶. 시간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삶. 항상 마감이 등 뒤에서 숨을 내쉬는 것 같은 그 감각.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돌아보면, 꽤 오래된 상처였다. 뇌가 회피를 승리로 착각하는 사이, 나는 점점 더 '시간의 피해 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미루기의 감정적 뿌리를 크게 세 가지 패턴으로 나눈다. 불안형(잘 해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 커서, 시작 자체를 못한다), 피로형 (몸과 마음이 이미 소진되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저동기형(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서, 손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셋이 다 섞여 있다. 직장에서 의미도 맥락도 없는 일들이 쌓여갈 때, 나는 세 가지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게 왜 필요한 거 지?"라는 의문(저동기), 그래도 잘해야 하는데"라는 강박(불안), "근데 나 지금 너무 지쳤는데"라는 탈진(피로). 이 세 감정이 동시에 충돌하면, 결과는 하나다.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미루다 보면 마감이 코앞에 온다.

책에서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것은,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예측하고 설계하는 감각이 부족해서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씩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시간은 사람마 다,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도 하루하루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날은 하루가 일주일처럼 길게 흐르고, 어떤 날은 눈 깜빡할 새에 저녁이 된다. 그 차이는 결국 마음의 상태, 즉 내가 시간 앞에서 어떤 태도로 서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 마음을 다루는 것이 삶의 기술이 듯, 시간을 다루는 것도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는 것.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우고 있는 중이다.

책에서 제안하는 핵심 실천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아침 출근 직후 단 10분, 오늘 반드시 해야 할 핵심 과제 세 가지를 먼저 정리 하는 것. 메일함부터 열지 않는 것. 큰 덩어리의 일을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어 시작의 문턱을 낮추는 것. 유혹이 닿지 않는 환경을 미리 설계해두는 것이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건드린 건 '완벽'주의가 아닌 '완료'주의라는 개념이었다. 완벽하게 하려다 시작조차 못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혹은 나의 일부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뭔가를 시작하려 하면 "이 정도로 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완료하지 않은 완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제출되지 않은 보고서는 아무리 완벽해 도 쓸모가 없다. 시작되지 않은 프로젝트는 아무리 머릿속에서 정교해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움직임이 없는 완벽은 그냥 생각에 불과하다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 아주 작은 것 하나를 골랐다.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의 딱 세 가지'를 먼저 적는 것. 그게 전부 다. 거창한 계획표도, 철저한 루틴 개편도 아니다. 그냥 오늘, 딱 세 가지. 그것만 끝내도 오늘은 성공이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 미루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건 마음이 보내는 신호였다. 지쳐있다는 신호, 무섭다는 신호, 의미를 잃었다는 신호. 그 신호를 무시하고 채찍만 들이대는 대신, 이제는 "내 미루기 뒤에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 를 먼저 물어보려 한다. 자책보다 이해가 먼저다. 이해가 되어야 변화도 시작된다.

가끔 고개를 들어야 한다.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 잊게 된다. 마감에 쫓기고, 업무에 치이고, 의미도 모른 채 처리하고, 또 처리하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는 질문이 올라온다. 그 질문이 올라오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멈추는 것이 실패가 아니다. 잠깐 멈춰서 고개를 드는 것,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 그 것이 진짜 시간을 '관리'하는 삶이다. 시간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 위에 서는 삶. 오늘부터, 아주 조금씩,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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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늦을 것 같아서 - 최고부부의 가슴 뛰는 세계여행 - 남미, 폴란드, 하와이 편
최양순 지음, 고영수 사진 / 메이킹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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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페루의 붉은 사막, 빙하가 무너지는 굉음,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항구. 그 풍경들이 문장 사이사이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묵직한 무언가가,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그 속도 안에 있었다.

칠순을 넘긴 부부가 다시 짐을 쌌다는 사실. 그것은 용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흔히 '이미 충분히 살았다'는 문장을 꺼내 들기 시작한다. 충분히 봤고, 충분히 겪었고, 충분히 가봤다고. 그 문장은 안도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포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 부부는 그 문장을 거절했다. 더 늦기 전에, 라는 역설적인 긴박감으로 다가온다.

여행이 철학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얼마나 먼 곳을 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자신을 마주했느냐와 관련된다. 와카치나의 오아시스 앞에서 저자는 눈물을 고인다. 누군가는 그 눈물을 감동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의 화해라고 읽었다. 10년 전의 내가 이곳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고, 지금의 내가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 그 조용한 성실함이 오아시스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들은 일상 바깥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일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기에 시달리면서도 바예스타 섬의 보트에 오른 것, 남편이 잠든 사이 혼자 망고를 먹으며 10년 전을 떠올린 것,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뛰고 웃고 구른 것들. 그 장면들은 관광지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질감 그 자체였다.

나스카의 지상화는 하늘에서만 보인다. 땅 위에 서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거대한 그림인지조차 알 수 없다. 사람의 생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한가운데를 걷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어느 정도 나이의 고도에 올라서야 비로소 전체 윤곽이 드러나는 그런 것. 칠순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그 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떤 고요함이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기차역에서 가족이 펼쳐 든 플래카드 앞에서 저자는 운다. '100국은 처음이지?'라는 장난스러운 문구와 함께. 그 눈물이 단지 100이라는 숫자 때문이 아님을 나는 안다. 그것은 한 세대가 걸어온 길의 무게이고, 손녀 손주의 손을 잡고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어떤 유산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도 여행은 계속된다. 기억 속에서, 사진 속에서, 그리고 함께 걸었던 사람의 몸짓 속에서 계속된다.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하나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더 늦기 전에'라고 느끼는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오래 미뤄둔 화해, 쑥스러워 꺼내지 못한 말, 가보고 싶었던 골목, 다시 읽고 싶었던 책 한 권. 삶은 어느 순간 갑자기 '충분히 늦어버린' 쪽으로 돌아선다. 그 전에 움직이는 것, 그것이 이 부부가 두꺼운 캐리어를 끌며 인천공항을 나선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지금도 전진 중이라고 했다. 후퇴하지 않는 빙하.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붙들고 있었다. 어떤 삶도 그럴 수 있다. 나이가 쌓일수록 움츠러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 책은 그런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도 같은 것이었다.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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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지 않는 법 -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해방의 심리 기술
대니얼 치디악 지음, 고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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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십 개의 자극에 노출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한마디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불안의 씨앗이 되며, SNS 속 타인의 삶이 자신의 초라함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이 끊임없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내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반복되어 굳어진 습관화된 반응 패턴이다. 습관이 학습되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희망을 의미한다. 학습된 것은 다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지력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가 내면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데 있다.


인구의 약 20%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섬세하게 세상을 감지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 변화를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예술과 자연 앞에서 깊이 감동받으며, 작은 배려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안다. 이 예민함은 분명 아름다운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에는 어두운 이면이 따른다. 타인의 기분이 자신의 감정으로 스며들고, 지나간 대화 속 뉘앙스 하나가 며칠을 두고 반추되며, 작은 오해가 거대한 거절감으로 변환된 다.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세상을 '항상 경계해야 하는 곳'으로 학습하게 된다. 감정적 레이더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삶, 그것이 만성적 소진과 과잉 분석의 근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예민한 자체를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감각을 닫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짜 과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은 인간 연결의 토대다. 다만 그것이 의무가 아 닌 선택이 될 때, 비로소 공감은 소진이 아닌 성장의 원천이 된다.

불안한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면 해결책이 나올 거야.' 그러나 이것은 뇌가 만들어낸 정교한 함정이다. 과잉사고는 통제감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더 깊은 불안의 수렁으로 이끈다. 인간의 뇌는 진화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부정적 경험은 긍정적 경험보다 훨씬 강하게 기억에 새겨지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자동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낸다.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관계의 균열로, 상사의 짧은 대답이 해고의 예고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패턴이 반복될수록 뇌의 신경 회로는 더욱 깊이 파여, 걱정은 점점 더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다.


나아가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반응을 왜곡한다. 어린 시절 반복된 거절의 경험, 예측 불가능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불신은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렌즈로 해석하게 만든다. 현재의 반응이 지나치게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현재의 사건 때문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유사한 순간들에 동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곧 현실은 아니다. 뇌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공포와 불안에 기반한 해석일 뿐,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이 인식, 즉 *내 생각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자유의 첫 번째 문을 여는 열쇠다.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는 감정을 억압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 엉뚱한 순간에 더 큰 폭발로 돌아온다. 진정한 자유는 감정의 관찰자가 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실천은 감정을 정확하게 명명하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와 "나는 지금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는 언어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뇌의 작동 방식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신이 감정 그 자체가 되는 것이고, 후자는 감정을 바라보는 관찰자로 서는 것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뇌의 이성적 영역인 전전두엽 피질을 활성화시켜, 감정의 격렬함을 실질적으로 완화시킨다. 두 번째는 현재 신체 감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 어깨의 긴장감, 호흡의 얕음. 이 신체 신호들에 집중하면, 마음은 머릿속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실제 경험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내적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기술이다. 불안이 찾아올 때, 그것과 싸우는 대신 감사로 맞이하는 것이다. 저항하면 강해지고, 받아들이면 힘을 잃는다. 고마워, 이 느낌이 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걸 알아"라고 말하는 순간, 불안은 더 이상 싸워야 할 적이 아닌, 이해해야 할 신호로 전환된다. 이 방법은 억지 긍정이 아니라, 내면 시스템 전체에 개입하는 정교한 심리적 전환이다.


우리가 작은 일에 크게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통제감의 상실이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은 뇌에게 위협 신호를 보내고, 스트레스 반응을 촉발시킨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단순히 나쁜 일이 일어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스트레스의 진짜 원인이다. 통제의 초점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기는 것이다. 교통 체증은 바꿀 수 없다. 타인의 태도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감정적 반응을 선택하며,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의 영역이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소모가 현저히 줄어든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거절을 신체적 고통과 동일한 경로로 처리한다.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곧 생존의 위기였던 진화적 역사가 현재에도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절당했을 때 그 감정을 만회하려는 강박에 빠진다. 상황을 이기거나, 상대의 인정을 받거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충동이 일어난다. 이 충동은 일시적인 도파민 분비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더 깊은 공허함만 남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타인의 선택은 당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미해결된 상처와 무의식적 패턴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이 사실 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그러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외부의 평가로부터 독립된 내적 가치감을 쌓아갈 수 있다.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가 상처받을까봐, 실망할까봐, 화를 낼까봐 자신의 필요를 끊임없이 뒤로 미룬다. 이것은 친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다. 타인의 감정 앞에서 자신을 지우는 습관은 오래 지속될수록 더 큰 대가를 치른다. 경계 없는 관계에서는 언제나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더 빨리 소진된다. 상대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고, 자신은 점점 더 지쳐가면서 원망이 쌓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경계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 관계는 내면의 분노와 피로 위에 서게 된다. 경계를 세우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방향의 제시다.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경계에 분노하지 않는다. 경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 충분히 납득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의 한계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유다. 경계를 세울 때 경험하는 죄책감은 대개 조건화된 반응이다. "네 필요는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아온 사람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도록 학습되어 있다. 이 죄책감은 도덕적 나침반이 아니라, 오래된 프로그래밍의 잔재다. 느끼되, 그것에 이끌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는 극적인 사건 없이 조용히 끝난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 깨달음은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돌이킬 수 없이 선명하다. 가장 떠나기 어려운 관계는 나쁜 기억이 가득한 관계가 아니다. 그 사람의 가능성에 투자한 관계다. 실제의 그가 아니라, 그가 될 수 있었을 모습, 노력만 한다면 가능했을 버전에 묶여있는 것이다. 연구는 분명히 말한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의 기대가 아닌, 오직 내면의 동기에서만 일어난다. 아무리 사랑하고 기다려도, 그 사람의 변화를 대신 만들 수는 없다. 떠나는 것 은 배신이 아니다. 모든 관계에는 그 관계가 완성되는 시간이 있다.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이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관계를 내려놓을 수 있다. 과거의 아름 다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그 관계가 자신을 살아있게 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다. 놓아주는 과정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른다. 관계의 상실뿐 아니라, 자신이 믿어온 가능성의 상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슬픔은 온전히 겪어야 한다. 서둘러 극복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오래 붙들게 된다. 슬픔을 통과해야만, 그 너머에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휘둘리지 않는 삶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삶이 아니다. 거절에 무감각해지거나, 타인을 신경 쓰지 않게 되거나, 상처받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더 충만하게 느끼면서도,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능력이다. 주도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생각과 자신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바꿀 수 없는 것 대신 바꿀 수 있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선택들이 쌓여 신경 회로를 바꾸고, 습관을 바꾸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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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괜찮은 두통은 없다
조경하.차윤경 지음 / 군자출판사(교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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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쉽게 뱉는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날, 상사에게 야단을 맞은 날, 아이들이 유독 말을 듣지 않는 날, 그 말은 때로 진짜 고통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의 넋두리처럼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만큼 두통은 우리 삶에 깊숙이,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나는 오랫동안 두통을 '참으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서랍 속 진통제 한 알이면 해결되는 사소한 불편함. 누구나 다 겪는 것이니 굳이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통으로 하루를 망친 날이면 “오늘은 좀 피곤했나 보다"며 스스로를 달랬고, 다음 날 말끔하게 사라진 통증에 안도하며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그 '사소한 불편함'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그리고 매달 빠짐없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여전히 진통제 한 알로 그 신호를 잠재웠 다.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두통 하나를 두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이야기해야 할까.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그 과장처럼 보였던 제목이 사실은 가장 정직한 경고였다 는 것을 깨달았다. 두통을 ' 괜찮다 '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몸이 보내는 절박한 신호를 외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면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우리를 10년짜리 만성 환자로 만들어 버린다.

두통이 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진통제를 꺼내 들 것이다. 실제로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을 만큼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그것. 처음엔 한 알이면 됐다. 그다음엔 두 알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이 먼저 약통으로 향했다. 책이 가장 집요하게, 그리고 가장 애정 어리게 경고하는 것은 약물과 용두통. 두통을 없애기 위해 먹은 약이 오히려 더 큰 두 통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이다. 뇌는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반복적인 진통제 자극에 점차 적응하면서 약 기운 이 사라지는 순간 더욱 거세게 통증으로 반응한다.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 물이 오히려 더 큰 불을 키우는 꼴이 다. 한동안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방식이 고스란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통증이 오면 참고, 참다 못하면 약을 먹고, 약이 듣는 동안만 안도하고, 또 통증이 찾아오면 다시 약을 찾는 사이클. 나는 두 통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두통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주도권은 처음부터 내 손에 없었다. 물 론 진통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임시 방편에 영구적인 역할을 맡긴 데 있다. 열이 날 때 해열제를 먹는 것은 맞는 처치지만, 왜 열이 나는지를 끝내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해열제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두통도 마찬가지다. 통증의 스위치를 찾지 않은 채 결과만 계속 억누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두통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지는 이유다.

책이 내게 크게 다가온 부분은 두통의 '종류'를 설명하는 챕터였다. 솔직히 두통에도 이렇게 많은 얼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편두통, 긴장형 두통, 군발두통, 후두신경통, 약물과용두통. 이름도 낯선 이 진단들은 수십 년을 두통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드디어 자신의 고통에 불일 수 있게 된 이름이기도 하다. "배가 아파요"라고 말하는 아이가 사실은 편두통을 앓고 있을 수 있다는 대목은 특히 인상 깊었다. 어른조차 자신의 두통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두통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두통을 배탈이나 꾀병으로 오해했던 수많은 부모들이 이 페이지에서 얼마나 많은 자책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을지 상상이 간다. 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혼자 짊어져 왔던 고통에 공식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일이다. "나는 아픈 게 맞았어. 이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었어." 그 인 정 하나가 때로는 치료의 절반이 된다. 책을 읽으며 비로소 내 두통의 패턴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날씨가 흐린 날, 수면이 부족한 날, 끼니를 거른 날, 머리가 아파오는 타이밍에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을 '그냥 내 체질'이라 여겼는데, 사실은 내 몸이 일관되게 보내온 신호였다. 두통 일기를 쓰라는 권유가 처음엔 번거롭게 느껴졌지만, 내 통증의 유발 요인을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만성 통증과의 싸움에서도 통하는 진리다.

책의 저자들은 의사이기 전에, 수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책 곳곳에서 그 경험의 무게가 느껴진다. 임상 데이터나 의학 논문의 인용에 그치지 않고, 진료실 문을 두드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실제 환자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두통을 앓았다는 분들의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MRI에서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고, 결국 '스트레스성'이라는 모호한 진단 하나를 껴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들. 아무도 내 고통을 제대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그 외로움이, 어쩌면 두통 그 자체보다 더 사람을 지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 메시지가 더욱 깊게 남는다." 세상에 괜찮은 두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받아온 사람들이 치료를 통해 실제로 변화를 경험했다는 임상의 기록이자, 포기하지 말라는 진심 어린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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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쥬메, 셰프의 자격
심성철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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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경험을 쌓고, 충분히 자신감이 생겼을 때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 그게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실패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믿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동안 '준비'라고 부르던 것이 사실은 '두려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성철셰프는 스물여섯 살에 뉴욕으로 떠났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통장 잔고도 넉넉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경기도로 대학을 가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만류를 들어야 했던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는 선택을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모함 속에 있던 것은 객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산보다 먼저 움직인 심장이었다. 조건이 갖춰져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출발했기 때문에 길이 생긴 것이다. 책은 그 역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멈칫했다. 멈칫하게 만든 것은 화려한 성공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모님께 생활비만큼은 손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큼 가난한 시간을 버텼다는 대목. 스스로도 그걸 '패기'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며, 차라리 '마지막 오기'에 가까웠다고 고백하는 부분. 그 솔직함이 마음을 찔렀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고난을 '결국 이겨냈기 때문에 의미있는 고난'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그것은 결말을 알고 견딘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도 버텨야 하는지, 내일도 버틸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하루를 넘긴 것이다. 뉴욕 어딘가에서,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꿈을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건네는 "조금 만 더 힘내라"는 말이 그래서 더 깊이 닿는다. 그 말은 고난을 극복한 사람의 여유가 아니라, 그 고난의 한가운데를 통과한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체온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생각한 장면은, 뜻밖에도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면접 자리에서 셰프가 묻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어떤 요리를 하고 싶습니까?" 기술을 묻는 것이 아니다. 수상 경력이나 근무 이력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질문이다. 요리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직업의 자리에 놓고 던진다면 어떨까.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까.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거나, 남들이 인정하는 이력서를 갖고 싶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가르칠 수 없다는 말, 주방은 실수를 허용하지만 게으름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 이것은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왜 하고 싶은지를 자기 언어로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셰프는 요리와 먹는 사람 사이에서 일종의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책은 말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되듯, 요리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데 그 대화는 언제나 오해와 불일치를 품고 있다. 만드는 사람의 의도가 먹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고, 먹는 사람의 기대를 만드는 사람이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요리, 좋은 대화는 계속된다. 그것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요리 가 음식만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요리는 태도이고, 철학이고, 관계의 방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요리에 담긴 마음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진다는 것. 급하게 만들었는지, 정성껏 기다렸는지, 보는 사 람을 생각했는지, 그 모든 것이 한 접시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그게 요리의 힘이라면, 그 힘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일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프렌치 요리의 정점에서 다시 한식으로 돌아오는 선택도 그랬다.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자신다운 길을 택한 것. 어머니의 손맛과 어린 시절의 기억, 몸에 새겨진 감각.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강력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 것은 퇴보가 아니라 귀환이다. 남들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용기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가장 자신다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잘하는 것과 나다운 것이 늘 일치하길 바라지만, 그 둘이 어긋나는 순간이 오면 대부분은 잘하는 것을 선택한다. 남들의 눈에 더 그럴듯해 보이 는 쪽을. 하지만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그게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냐고.

책의 마지막을 덮고 나서 한동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화려한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쳤다면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결과보다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미쉐린 스타를 받는 순간보다, 그 별을 향해 나아가던 밤 12시의 메뉴 미팅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주방 한 귀퉁이에서 노트에 빼곡히 채워 넣었던 기록들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결국 남는 건 화려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 셰프의 자격은 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다는 것. 나는 이 문장이 비단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든, 어떤 꿈이든, 결국 그것을 만들어온 시간이 그 사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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