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쥬메, 셰프의 자격
심성철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경험을 쌓고, 충분히 자신감이 생겼을 때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 그게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실패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믿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동안 '준비'라고 부르던 것이 사실은 '두려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성철셰프는 스물여섯 살에 뉴욕으로 떠났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통장 잔고도 넉넉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경기도로 대학을 가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만류를 들어야 했던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는 선택을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모함 속에 있던 것은 객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산보다 먼저 움직인 심장이었다. 조건이 갖춰져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출발했기 때문에 길이 생긴 것이다. 책은 그 역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멈칫했다. 멈칫하게 만든 것은 화려한 성공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모님께 생활비만큼은 손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큼 가난한 시간을 버텼다는 대목. 스스로도 그걸 '패기'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며, 차라리 '마지막 오기'에 가까웠다고 고백하는 부분. 그 솔직함이 마음을 찔렀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고난을 '결국 이겨냈기 때문에 의미있는 고난'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그것은 결말을 알고 견딘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도 버텨야 하는지, 내일도 버틸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하루를 넘긴 것이다. 뉴욕 어딘가에서,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꿈을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건네는 "조금 만 더 힘내라"는 말이 그래서 더 깊이 닿는다. 그 말은 고난을 극복한 사람의 여유가 아니라, 그 고난의 한가운데를 통과한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체온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생각한 장면은, 뜻밖에도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면접 자리에서 셰프가 묻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어떤 요리를 하고 싶습니까?" 기술을 묻는 것이 아니다. 수상 경력이나 근무 이력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질문이다. 요리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직업의 자리에 놓고 던진다면 어떨까.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까.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거나, 남들이 인정하는 이력서를 갖고 싶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가르칠 수 없다는 말, 주방은 실수를 허용하지만 게으름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 이것은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왜 하고 싶은지를 자기 언어로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셰프는 요리와 먹는 사람 사이에서 일종의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책은 말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되듯, 요리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데 그 대화는 언제나 오해와 불일치를 품고 있다. 만드는 사람의 의도가 먹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고, 먹는 사람의 기대를 만드는 사람이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요리, 좋은 대화는 계속된다. 그것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요리 가 음식만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요리는 태도이고, 철학이고, 관계의 방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요리에 담긴 마음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진다는 것. 급하게 만들었는지, 정성껏 기다렸는지, 보는 사 람을 생각했는지, 그 모든 것이 한 접시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그게 요리의 힘이라면, 그 힘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일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프렌치 요리의 정점에서 다시 한식으로 돌아오는 선택도 그랬다.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자신다운 길을 택한 것. 어머니의 손맛과 어린 시절의 기억, 몸에 새겨진 감각.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강력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 것은 퇴보가 아니라 귀환이다. 남들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용기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가장 자신다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잘하는 것과 나다운 것이 늘 일치하길 바라지만, 그 둘이 어긋나는 순간이 오면 대부분은 잘하는 것을 선택한다. 남들의 눈에 더 그럴듯해 보이 는 쪽을. 하지만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그게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냐고.

책의 마지막을 덮고 나서 한동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화려한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쳤다면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결과보다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미쉐린 스타를 받는 순간보다, 그 별을 향해 나아가던 밤 12시의 메뉴 미팅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주방 한 귀퉁이에서 노트에 빼곡히 채워 넣었던 기록들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결국 남는 건 화려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 셰프의 자격은 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다는 것. 나는 이 문장이 비단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든, 어떤 꿈이든, 결국 그것을 만들어온 시간이 그 사람을 증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