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다 : 하 - 합리적 의사 결정을 위한 베이즈적 사고 인생은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다
류쉐펑 지음, 유연지 옮김, 김지혜 감수 / 미디어숲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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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인생을 주사위 던지기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 오래 고민하다가도, 결국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건 운이야"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면접 결과를 기다리며 "어차피 운이잖아"라고 중얼거리고, 친구의 사업이 망했을 때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거야"라고 위로했다. 잘 되면 운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운이 나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편했다. 잘못된 판단에 대해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베이즈 정리를 중심으로 우리의 판단과 사고방식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그 편안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생은 주사위 던지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그 주사위의 눈을 완전히 무작위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어떤 눈이 나올 가능성을 더 잘 이해하고, 그에 맞게 준비하고, 판단을 갱신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랫동안 '확률이 높다'는 말을 '거의 확실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왔다. 병원에서 "이 검사의 정확도는 99%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안도하거나 혹은 공포에 휩싸였다. 양성 판정이 나왔다면 '나는 병에 걸린 것'이라고 거의 단정 지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은 그게 얼마나 성급한 결론인지였다. 검사의 정확도가 99%라는 말은, 그 질병의 유병률이나 내가 그 질병에 걸릴 사전 확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숫자다. 만약 그 질병에 걸릴 사람이 10만 명 중 1명꼴이라면,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환자일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낮을 수 있다. 이것이 나를 가장 먼저 흔들어 놓은 지점이었다. 우리는 숫자에 속는다. 더 정확히는, 숫자의 맥락을 보지 않고 숫자 그 자체 만을 받아들이는 습관에 속는다. 뉴스 헤드라인이 말하는 "00 섭취시 암 발병률 2배"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기저 확률 이 0.001%인 암의 발병률이 2배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는 0.002%가 된다는 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2배'라는 숫자에 놀라 그 식품을 끊어버린다. 이것이 착각이다. 그리고 이 착각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직관의 기계다. 빠르게 판단하고, 명확한 인과관계를 찾아내고, 권위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다. 사바나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건 포식자일 수도 있어'라고 즉각 반응하는 능력은 생존에 유리했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그 직관은 종종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친구가 한 번 경험한 일을 마치 보편적인 법칙처럼 받아들이고, 전문가의 한마디에 수십 년의 습관을 바꾸고, 충격적인 뉴스 하나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직관이라는 훌륭한 도구의 오작동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혼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 과거에 한 번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가 하는 모든 말을 거짓으로 단정한다. 어떤 음식이 특정 연구에서 '해롭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로, 그 음식을 완전히 배제한다. 어떤 직종의 평균 연봉이 낮다는 통계를 보고, 그 직종을 선택한 특정 개인의 미래를 단정한다. 이 모든 판단은 맥락을 무시하고 숫자만을 본 결과다. 맥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전 확률이다.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세 상에 존재하는 배경 정보다. 그 맥락을 무시하면, 우리는 손에 쥔 증거 하나만으로 세상 전체를 판단하게 된다. 인터넷 시 대는 이 위험을 극대화했다. 충격적인 주장일수록, 클릭을 유발하는 헤드라인일수록, 공유가 많이 될수록 더 많이 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반복해서 접하면서 사전 확률 자체를 왜곡당한다. 드문 사건이 마치 흔한 것처럼 느껴지고, 극단적인 의견이 마치 다수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우리의 판단 기준점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책이 제시하는 사고방식은 분명 더 합리적이고 더 정확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면, 나는 지금까지 편하게 의존해 왔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첫 인상에 대한 확신, 직관이라는 이름의 편견, 전문가에 대한 맹목적 신뢰, 그리고 "어차피 운이야"라는 달콤한 면죄부 등.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불편함이 오히려 소중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불편함은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관에만 의존할 때, 삶은 정말로 주사위 던지기처럼 느껴진다. 무작위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베이즈적 사고를 시작하면, 삶은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어도, 더 나은 판단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과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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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역사 -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니키 헤이즈 지음, 최호영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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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녀 왔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타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사유의 근간이 되었으며, 훗날 심리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는 씨앗이 되었다. 심리학(Psychology)은 그리스어 'psyche(영혼)'와 'logos(학문)'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영혼 혹은 정신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의 심리학은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분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여정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았다. 수천 년에 걸친 철학적 성찰, 근대 과학의 태동,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상흔, 그리고 기술 혁명이 복잡하게 얽히며 지금의 심리학을 형성해 왔다.


심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출범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감각과 인식, 그리고 성격의 기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플라톤은 이성과 욕망, 기개 사이의 갈등으로 영혼을 설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인간 본성을 탐구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은 이후 로마 시대로 이어졌으며, 특히 갈레노스(Galen)의 기질론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성격을 설명하는 틀로 기능했다. 갈레노스는 담즙, 흑담즙, 혈액, 점액이라는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이 인간의 기질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이 오래된 이론의 흔적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발견된다. 20세기 영국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Hans Eysenck)가 개발한 성격 검사는 내향성-외향성, 안정성-불안정성이라는 두 축으로 성격을 분류하는데, 이 네 가지 조합이 갈레노스의 네 기질과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또한 심리 검사의 기원을 추적하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체계적인 시험 제도를 운영했는데, 이는 현대적 의미의 심리 평가와 연결되는 역사적 뿌리로 평가된다. 이처럼 심리학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학문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지적 전통 위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산물이다.


심리학이 철학의 영역에서 독립하여 하나의 과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1879년, 독일의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는 라이프치히에 세계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설립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연구소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학자들이 찾아와 배움을 나눴으며, 심리학이 진정한 국제적 학문으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분트는 내성법(introspection), 즉 자기 자신의 정신 과정을 통제된 조건에서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 의식을 연구하고자 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심리학을 발전시키며 실용주의적 전통을 이어 나갔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심리학은 급격한 방향 전환을 겪었다. 존 브로더스 왓슨(John B. Watson)은 내면의 경험보다 관찰 가능한 행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동주의를 선언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학습된 연결 관계를 강조한 그의 이론은 이후 반세기 이상 심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의 조건 반사 실험은 행동주의의 과학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 했으며, B.F. 스키너(B.F. Skinner)는 조작적 조건형성을 통해 보상과 처벌이 행동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규명했다. 하지만 행동주의는 인간의 내면, 즉 언어, 사고, 감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놈 촘스키(Noam Chomsky)가 스키너의 언어 이론을 비판한 이후, 심리학은 인지 혁명을 통해 인간의 정신 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심리학의 발전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세기의 역사적 격변은 심리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새롭게 정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규모로 목격된 전투 신경증, 이른바 '포탄 충격(shell shock)'은 심리적 외상이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군 의료계와 심리학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는 성격 검사와 적성 평가의 필요성을 촉진하며 심리 측정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의 충격은 더욱 깊은 심리학적 질문을 제기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인간적 명령에 복종하게 되는가?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는 동조 실험을 통해 집단 압력이 개인의 판단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었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은 더욱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참가자들은 권위 있는 실험자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위험한 수준의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실험은 인간이 권위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냈으며, 동시에 연구 윤리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했다. 한편 스트레스와 신체 건강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심리학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은 1915년에 처음 체계적으로 기술되었으며, 1955년 헝가리 출신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Hans Selye)는 이 반응이 단순한 위기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경제적 스트레스와 같은 일상적 부담에서도 발생함을 보였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면역 체계를 약화시키고 신체를 서서히 소진시킨다는 그의 연구는 오늘날 심신 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나아가 인류학 연구는 전통 사회의 치유자들이 질병의 원인을 최근의 사회적 경험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음을 밝혀냈는데, 이는 현대의 심리사회적 건강 모델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의 역사는 하나의 '대통일 이론'을 향한 집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왓슨의 행동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은 각각 인간 심리의 보편적 법칙을 규명하려는 야심찬 시도였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이러한 단일 설명 체계의 유혹에서 벗어나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성숙해 왔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도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이론으로도 그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신경과학과 뇌 영상 기술의 발전은 심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열어 주었다. 신경전달물질의 작용과 뇌 구조의 개인차가 심리 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컴퓨터의 발명과 정보 처리 모델은 기억과 사고를 이해하는 새로운 은유를 제공했다. 긍정 심리학의 부상은 질병과 결함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인간의 강점과 웰빙을 탐구하는 관점의 전환을 이끌었다. 반면 1980년대에 유행했던 파국 이론처럼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멸한 흐름도 있었다. 이러한 부침 속에서도 심리학은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반복하며 진화해 왔다.


심리학의 역사는 인류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끈질기고 열정적인 노력의 기록이다. 고대 철학자들의 사색에서 출발하여 근대 과학의 실험실을 거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물음에 답하며, 디지털 시대의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은 항상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며 변모해 왔다. 심리학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일한 진리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복잡하고 다면적인 만큼, 그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 역시 여러 목소리와 관점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심리학은 역사를 통해 배워 왔다. 오늘날 심리학은 교육, 의료, 조직, 법률, 스포츠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심리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나침반이 된다. 인간 정신의 깊이는 아직 다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 탐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피넛퍼터 테스트는 흥미로웠던 미션이다. 알츠하이머를 조기에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피넛버터 테스트’다. 후각 기능 저하가 인지 기능 저하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 냄새를 맡고 구별하는 능력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특히 왼쪽 콧구멍에서 냄새를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 알츠하이머와 관련성이 있다는 보고가 있어, 피넛버터뿐 아니라 커피, 김치, 과일향 같은 다양한 냄새를 통해 후각 변화를 확인하는 방식이 소개되곤 한다. 물론 이 테스트만으로 알츠하이머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후각 변화가 뇌 건강의 신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가 직접 피넛버터, 커피향, 김치 냄새, 과일향을 맡아본 결과 네 가지 향 모두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피넛버터의 고소한 향, 커피의 깊은 향, 김치의 발효 향, 과일의 상큼한 향이 각각 명확하게 인지되었고, 좌우 콧구멍 사이의 차이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각 기능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테스트를 통해 나의 현재 상태를 간단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은 알츠하이머는 아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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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민수 요리 역사 특강 - 읽기만 해도 배부른
최고민수(박민수) 지음 / 온더페이지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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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가면 항상 따뜻한 국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사골을 고아 국물을 냈고, 그 냄새가 골목 어귀까지 번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국밥 한 그릇에 수천 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소를 키우고, 뼈를 고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그 행위 하나하나가 문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음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다. 전쟁이 음식을 바꾸고, 음식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종교가 식탁을 규정하고, 식탁이 종교를 먹여 살리기도 했다. 와인 한 잔에는 디오니소스 신화가 녹아 있고, 빵 한 조각에는 파라오의 치세와 혁명의 함성이 배어 있다. 음식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곧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최고민수 박민수님은 책을 통해 흥미로운 음식과 역사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어 단숨이 읽을 수 있었다. ^.^

와인을 처음 제대로 마신 건 20대 중반이었다. 선배가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일단 돌려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와인이 잔벽을 타고 흘러내렸고, 선배는 그걸 '와인의 눈물'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그게 그저 낭만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다. 알코올이 물보다 빨리 증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랑고니 효과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 조지아 코카서스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씨와 항아리, 와인 제조 도구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다. 성경 속 노아도 방주에서 내려와 포도를 심고 와인을 빚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와인이 음료를 넘어 문명의 산물로 자리 잡게 된 건 로마 덕분이었다.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마시기 어려웠고, 로마 병사들은 와인을 물 대신 마셨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와인을 멀리 운반하기보다 아예 현지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프랑스, 독일의 포도밭은 그렇게 생겨났다. 와인이 종교와 만나면서 그 운명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와인을 나눈 이후, 와인은 가톨릭 미사의 필수품이 되었다. 수도원은 와인을 생산하고 양조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4세기,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강제로 이주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 교황과 사제단이 70년간 프랑스 땅에 머물면서 미사에 쓸 와인을 프랑스에서 조달하게 되었고, 아비뇽 인근 론 지역은 비로소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발돋움했다. 와인 한 병의 탄생 뒤에 이토록 복잡한 역사가 숨어 있을 줄이야.

위스키와 브랜디 이야기는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끈다.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한 연금술과 증류 기술이 십자군 전쟁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본래 금을 만들려던 시도가 술을 만드는 기술로 변모했다. 인류의 위대한 실패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금을 얻지 못하는 대신, 저울과 플라스크와 증류기를 얻었다. 그리고 스카치 위스키를, 코냑을, 보드카를 얻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위스키를 빚기 시작한 건 포도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때문이었다. 와인 대신 보리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합병 이후 전통 증류주에 높은 세금을 매기자, 스코틀랜드 양조업자들은 북부 고지대의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이탄으로 맥아를 건조하면서 독특한 스모키 향이 스며들었고, 셰리 오크통 안에서 몇 년을 숨어 지낸 밀주는 어느새 황금빛 호박색 위스키로 변신해 있었다. 탄압이 명주를 만든 셈이다. 왕실 귀족들마저 이 밀주에 손을 댔고, 결국 영국 정부는 세금을 대폭 낮추며 합법적인 양조장을 허용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맛있는 형태로 남은 경우다. 브랜디의 탄생도 비슷한 우연들의 산물이었다. 프랑스 코냑 지방은 석회질 토양에서 자란 신맛 강한 포도로는 와인 경쟁력이 없었다. 종교전쟁으로 포도밭이 황폐해지자, 네덜란드 상인들이 와인을 증류하자고 권했다. 실패한 땅에서 세계 최고의 술이 탄생했다. 브랜디라는 이름 자체도 네덜란드어 '브란데베인', 즉 '태운 와인'에서 왔다. 불에 태워 증류한다는 의미였다.

음식의 역사를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감각이 있다. 허기다. 물리적인 허기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허기. 이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이 요리는 왜 이 모양일까, 이 맛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을까. 한 잔의 와인을 마시면서 기원전 코카서스의 포도밭을 떠올리고, 바게트를 한 입 베어 물면서 프랑스 혁명 전야의 굶주린 파리 시민들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음식을 역사로 읽는 방식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장 자크 루소의 글에서 비롯된 오해였고, 그 오해가 한 여인의 목숨을 단두대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피해는 언제나 현실이었다. 음식의 이야기는 그렇게 권력과 정치와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품는다. 요리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인 방식이다. 불을 사용하고, 발효를 이용하고, 증류를 고안하고, 숙성을 기다린다. 그 모든 과정이 문명이다. 우리가 오늘 무엇을 먹는가는, 수천 년 전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의 결과다. 식탁 위의 모든 것은 기억이다.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일이 이토록 맛있을 줄은, 음식의 역사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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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the novel
스즈키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신카이 마코토 원작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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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5센티미터라고 한다. 그 느리고도 아득한 속도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대학 시절,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처음 신카이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던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숙사 방의 형광등을 끄고, 이어폰을 꽂고, 63분짜리 그 짧은 세계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던 무언가를 손끝으 로 스쳤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 감각. 그것이 바로 '초속 5센티미터'가 내게 처음 남긴 흔적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길어졌고, 사랑도 왔다가 떠났고, 나는 어느새 타카키처럼 매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실사 영화 '초속 5센티미터'를 보러 극장에 들어섰다. 원작이 실사화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어린 시절 소중하게 쥐고 있던 물건을 누군가가 다시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기대보다 불안이 앞서 는 일이다. 과연 그 섬세한 결, 그 빛의 질감, 그 침묵의 밀도를 인간의 몸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조용히 인정해야 했다. 이 영화는 원작을 따라가지 않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달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실사 영화 역시 원작 애니메이션과 같은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무게 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나는 소설판을 집어 들었다. 각본가 스즈키 아야코가 직접 쓴 소설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몽환적 문체보다는 훨씬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한다. 도쿄의 붐비는 출퇴근길, 눈 덮인 이와후네의 작은 역, 로켓이 솟아오르는 하늘. 그 풍경들은 애니메이션처럼 과포화된 색채로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풍경들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소설 속 타카키는 회사에서 '무풍'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뜻. 처음에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책장을 넘기며 나는 점점 다른 감각을 느꼈다. 무풍이란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쁨도, 슬픔도, 바람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닿지 않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30대의 타카키가 도달한 현재였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몇 번 이나 책을 덮었다. 타카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풍'이 되어간 다. 첫사랑의 온도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도, 현실은 끊임없이 다른 속도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러다 어 느 날 문득 돌아보면, 간절하게 붙잡으려 했던 그 감정이 이미 기억의 안쪽 깊숙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작 애니메이션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타카키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과거에 묶인 채 나아가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답답 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으면서, 나는 그 시선이 얼마나 어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타카키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조금 이해된다. 어떤 감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놓아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약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만큼 진했던 것이다. 아카리는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소설 속 아카리는타카키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일상'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추억의 박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힘의 일부가 된다. 타카키에게는 멈춰 있는 것이 아카리에게는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억을 품고도 두 사람이 이렇게나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리고도 아름다운 부분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나누지만, 그것이 남기는 무게는 각자의 몫이다.

소설 속 한 장면이 오래 남는다. 타카키와 스미다의 관계에서, 아카리가스미다의 투명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장면. 아카리는 그 마음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리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이야기가 첫사랑의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 앞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실사 영화를 연출한 오쿠야마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가 '마이크로가 매크로가 되는 이야기'라고. 누군가의 솜털을 바라보다 보면 우주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라고. 처음에 그 말을 읽었을 때는 다소 거창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말이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이 이야기는 타카키와아카리, 딱 두 사람의 아주 사소하고 개인 적인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감정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가닿는다. 놓쳐버린 것 들,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흘러가 버린 시간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다.

벚꽃잎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그 속도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잃어가는 속도이기도 하고,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이기도 하다. 너무 느려서 눈치채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이미 땅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것들.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한동안 그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 시절의 나, 이어폰을 꽂고 형광등을 끄고 혼자 울던 그 밤. 그리고 지금의 나, 극장을 나서며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저녁을 떠올려 본다.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흐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을 통과하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그것이 때로는 어긋남이 되고, 때로는 그리움이 되고, 때로는 구원이 된다. 초속 5센티미터. 그 느린 속도로, 이 이야기는 또 한번 내 안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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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파워 - 부와 권력을 결정짓는 토지의 힘
마이클 앨버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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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토지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이행하면서 인간 은 처음으로 땅을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토지는 생존 수단을 넘어 권력과 지배의 핵심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앨버터스(Michael Albertus)는 누가 땅을 소유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질 분을 통해 논제를 시작한다. 저자는 방대한 현장 연구와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두 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토지 재편의 역 사를 추적하며, 그것이 인종 불평등, 젠더 차별, 경제적 빈곤, 환경 파괴라는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위대한 재편(The Great Reshufile)'이다. 그는 지난 약 200년을 인구 증가, 국가 형성, 사회 적 갈등이 뒤엉키면서 전 세계 토지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격변의 시대로 규정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토지 재분배, 소련 과 중국의 집단화, 라틴아메리카의 동지 개혁,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토지가 끊임없이 새로운 손으로 넘 어가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누가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성격, 지배 엘리트의 이해관계, 그리고 피지배층의 저항이 복잡하게 얽히며 토지 소유권의 지형이 변화해왔다. 볼셰비키 혁명은 귀족 계급의 대토지를 해체하고 농민에게 재분배했으며, 이는 사회 질서 전체를 뒤집는 혁명적 행위였다. 같은 논리로, 20세기 중반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정권들은 때로는 대지주와 결탁하여 토지 개혁을 억압했고, 때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제한적인 재분배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 재편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흑인 농민들에게 수천만 에이커의 토지를 돌려주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며, 호주 에서는 원주민(First Nations) 공동체가 자신들의 조상 땅에 대한 권리를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즉, 위대한 재편은 끝나지 않았으 며, 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미래 사회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다. 저자의 주장 중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인종 불평등, 젠더 차별, 경제적 빈곤의 상당 부분이 과거 토지 수탈과 재편의 역사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현대 사회의 네 가지 재앙(Four Horsemen of modern social maladies)'으로 규정하며, 각각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입증한다.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아과 칼리엔테 카우이야(Agua Caliente Band of Cahuilla Indians) 부 족 사례는 미국 원주민이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토지를 박탈당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852년 연방 정부와 체결한 불평등 조 약, 이후 남태평양 철도에 부여된 토지 통행권, 체커보드 방식으로 축소된 보호구역까지, 이 과정은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수탈이었다. 그 결과는 통계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2018년 기준 아메리카 원주민의 빈곤율은 25%로, 백인의 10%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으며, 대 학 학위 보유율도 24% 대 47%로 크게 뒤진다. 당뇨, 심장병, 약물 관련 사망률도 현저히 높고, 토지 수탈에서 비롯된 역사적 트라우 마로 인한 정신 건강 문제도 심각하다. 이는 현재의 인종 불평등이 개인의 역량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토지 수탈이 대물림한 결과임을 시사한다.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공동체가 처음부터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를 빼앗겼 다면 평등한 출발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불평등의 맥락에서 캐나다의 1872년 자치령 토지법(Dominion Lands Act)은 극단적인 사례다. 이 법은 60년 동안 1억 에이 커 이상의 토지를 남성에게만 불하했으며, 여성은 사실상 완전히 배제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재산 상속권조차 없었기에, 남편이 사망 하거나 가족을 떠나면 경제적으로 극도의 취약한 상황에 놓였다. 이 법이 1930년 폐지된 이후에도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되어, 법이 시 행되던 시기에 캐나다 대초원 지역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1990년대에 60~70대가 되었을 때 캐나다 여성 중 가장 높은 빈곤율을 기록 했다. 과거의 제도적 차별이 반세기 이상 지나서도 개인의 삶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제도적 불평등이 얼마나 깊고 오랜 뿌리 를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토지 재편은 환경에도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중국의 집단화와 탈집단화 과정은 대규모 산림 파괴, 초지 황폐화, 토양 침식, 지하수 오염을 초래했으며, 이를 복구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1960년대 부터 군사 정권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개방해 정착을 허용했으며, 그 결과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생태계 중 하나가 빠른 속도로 파 괴되고 있다. 토지를 경제적 자산으로만 바라보고 단기적 이익을 위해 무분별하게 개발할 때, 그 비용은 환경 재앙이라는 형태로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는 것을 이 사례들은 잘 보여준다.

저자는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공적인 토지 개혁 사례를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페루의 재산권 개혁, 콜롬비아와 볼 리비아의 여성 토지 소유권 확대, 칠레의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통한 대규모 자연 보호 구역 조성(2014~2018년 사이 보호 면적을 4%에서 36%로 확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호주의 원주민 토지 반환 정책 등은 모두 토지가 불평등을 심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재산권의 중요성이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혹은 지역 공동체든 간에 자신이 일구는 토지에 대한 명확한 권리를 갖는 것이 장기적인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1980년대 탈집 단화가 좋은 예다. 완전한 사유재산권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농가에 장기 임차 형태의 사용권을 부여한 것만으로도 농업 생산성이 크 게 향상되었다. 권리가 불명확한 상태는 투자를 억제하고 방어적 행동을 유발하며, 그것이 빈곤의 함정을 고착시킨다는 논지는 설득 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가 제시하는 성공 사례들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3400만 에이커의 토지를 흑인 농민들에게 반환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토지를 돌려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경제적 역량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금융 접근성, 기술 교육, 시장 인프라 등 다양한 지원이 뒷받침되어야만 토지 재분배가 실질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Land Power는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의 기반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 인지, 그리고 과거의 부당함이 현재에도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토지는 부동산이나 경제적 자산만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고, 역사이며, 공동체의 뿌리다.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잃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과 존엄성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낙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사회는 과거에도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왔으며, 토지 재분배를 통해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 희망이 순진한 이상주의에 그치지 않으려면, 토지 문제를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교육, 금융, 법제도, 사회 인프라 등 다양한 정책 도구와 연계하여 접근해야 할 것이다. 또한 토지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의지와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도 필요하다. Land Power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과거의 토지 결정이 현재를 규정하듯, 오늘 우리가 토지에 대해 내리는 결정이 미래 세대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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