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튜던트 - 배움의 재발견
마이클 S. 로스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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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우기를 멈추고 시험을 보기 시작했을까.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부터 호기심은 점수로 환산되었고, 탐구는 정답 찾기로 축소되었으며, 성장은 등수로 측정되었다. 교실은 지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공간이 아니라, 누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주어진 문제를 푸는지를 겨루는 경기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작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배움이란 무엇이며, 학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대의 현자들은 배움을 삶 그 자체로 여겼다. 그들에게 학생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는 그릇이 아니었다. 스승의 곁을 따라다니며 함께 길을 걸었던 이들은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 시대의 배움에는 교과서도, 시험지도, 성적표도 없었다. 오직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경험과,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고 내면화하려는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육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배움을 제도 안에 가두면서,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역동적이어야 할 지적 성장의 과정을 경직되고 획일적인 절차로 만들어버렸다. 학생은 더 이상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가는 탐구자가 아니라, 정해진 커리큘럼을 소화해내야 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육 제도의 발전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과거 소수의 특권층만 누리던 학습의 기회가 대중에게 열렸고, 체계적인 지식 전달이 가능해졌다. 중세 시대 장인과 도제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하던 기술 전승은,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 근대 이후 공교육의 확산은 사회적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며, 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도화의 이면에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었다. 배움을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단순화하고 정량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해의 과정은 시험 점수라는 하나의 숫자로 압축되었고, 개인의 고유한 성장 궤적은 표준화된 척도 위에서 비교 가능한 데이터로 환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성찰과 변화의 여정이었던 배움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강화된 경쟁 중심의 교육 문화는 이러한 문제를 극대화했다. 능력주의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끊임없이 동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 애쓴다. 협력보다는 경쟁이, 공동체적 성장보다는 개인의 성취가 강조되는 환경에서, 학생들은 타인을 함께 나아갈 동반자가 아닌 이겨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배움의 본질적 즐거움을 앗아가고, 학습을 고통스러운 생존 게임으로 변질시킨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이들조차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데만 급급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엇에 의미를 느끼는지를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그렇게 학생들은 타인이 정한 기준을 좇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역사는 학생이 단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제하려는 권위에 맹렬히 저항했다. 그들이 원한 자유가 언제나 건설적인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전 세계를 휩쓴 학생 운동은 더욱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기존 체제의 위선을 폭로하며,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모색했던 젊은이들은 단순히 강의실에서 지식을 전달받는 존재를 넘어, 사회 변화의 주체로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학생들은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기만 하지 않았다.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협상하며, 자신들만의 의미를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교육 기관과 학생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지만, 바로 그 긴장이야말로 교육이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생들은 어떤가. 과거만큼 극적인 저항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학업 성취 외에 다양한 관심사를 탐색하고, 진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기성세대가 당연시했던 가치들에 질문을 던진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들이 여전히 제도의 틀 안에서 '비정상'이나 '이탈'로 간주되기 쉽다는 점이다. 진정한 교육 혁신은 이런 다양한 배움의 방식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배움을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 한정된 활동으로 보는 협소한 관점이다. 학생이라는 정체성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배움의 연속이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직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는 것 모두가 배움이다. 이러한 평생학습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교육은 전체 배움의 여정에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단계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호기심을 유지하고, 질문하는 습관을 기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용기를 키우는 것. 이것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과도한 학습량, 지나친 경쟁, 획일화된 평가는 학생들의 내적 동기를 말살하고, 배움 자체에 대한 혐오를 키운다. 많은 이들이 학교를 벗어나면 책을 멀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시도를 꺼린다. 십여 년간의 공식 교육이 오히려 평생학습자로서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셈이다. 이보다 더 큰 교육의 실패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육을 꿈꿔야 할까. 먼저 평가와 서열화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생을 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이를 위해서는 획일적인 기준 대신 다양성을 인정하고, 정답을 암기하는 능력보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또한 배움을 개인의 고립된 활동이 아닌 공동체적 과정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료화하고, 다른 관점을 접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히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협력의 가치를 배운다. 경쟁보다 협력을, 비교보다 연대를 강조하는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자신의 배움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배울지, 어떻게 배울지, 왜 배우는지에 대한 결정에 학생이 참여할 때, 배움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교사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의 탐구를 안내하고 지원하는 촉진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교사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온라인 학습, 프로젝트 기반 학습, 지역사회와 연계된 배움 등 다양한 형태의 학습 경험을 인정하고 장려해야 한다. 학교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배움의 장소는 아니다. 세상 전체가 교실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잠재적 스승이 될 수 있다.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다.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나이나 직업과 무관하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교육의 미래는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전달하는 기술에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생 학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문화를 만드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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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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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홍차 티백에 매달린 작은 종이 한 조각, 그곳에서 시작된 질문 하나가 한 남자의 삶 전체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괴테가 정말 이 말을 했을까요? 아니,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짜 괴테의 것이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도이치 교수는 평생을 괴테와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서재에는 괴테의 모든 문장이 정리되어 있고, 그의 머릿속에는 괴테의 사유 체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 전체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 출처 불명의 문장이야말로 괴테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사상이 원문 그대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변주되고, 재해석되고, 누군가의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모든 번역은 배신입니다. 독일어로 쓰인 문장이 일본어를 거쳐 한국어가 될 때, 원래의 뉘앙스는 필연적으로 변형됩니다. 하나의 단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번역가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 속에서 원문은 조금씩 변질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배신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언어가 살아 숨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나비가 꽃가루를 옮기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듯, 번역은 언어를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합니다. 괴테의 독일어가 21세기 한국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정확한 번역 때문이 아니라 부정확한 번역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도이치 교수는 요약형, 전승형, 위작형 명언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명언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종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루터의 말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30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는 2001년생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언어의 소유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괴테의 문장은 괴테의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읽고 감동받은 모든 사람의 것일까요? 도이치 교수가 집착했던 것은 진위 여부였지만, 정작 그 문장이 그의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고, 오랫동안 대화하지 못했던 아내와 딸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었습니다. 학문적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빌려 말합니다. 완전히 독창적인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보르헤스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재배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재배열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했고, 그 의미는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역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괴테가 실제로 모든 것을 말한 게 아니라, 괴테의 언어가 무한히 확장되고 변형되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소설을 읽으며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정말 사유하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요? 한 문장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고민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저는 소비했을 뿐,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도이치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나누는 대화는 경이롭습니다. 단 한 문장을 두고 괴테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토론합니다. 파우스트를 인용하고, 색채론을 끌어오고, 니체와 보르헤스를 경유합니다. 하나의 문장이 우주가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매우 조용합니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그저 한 가족이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일상이 펼쳐질 뿐입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문장을 수백 번 되뇌이며, 저는 이것이 번역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혼동은 무질서입니다. 하지만 혼연일체는 조화입니다. 사랑은 서로 다른 것들을 뒤섞어 혼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함 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합니다. 마치 좋은 번역이 원문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이치 교수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세 사람이, 한 문장을 매개로 다시 만났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입니다.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지만, 그 불완전한 번 역 속에서도 사랑은 전달됩니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인용하며 살아갑니다. 명언을 필사하고, SNS에 공유하고, 대화 중에 인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언어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빌려온 옷을 입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괴테도, 보르헤스도, 이 소설의 작가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빌린 언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신의 언어'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제 서재를 둘러봤습니다. 수백 권의 책들, 수천 개의 문장들. 이 중에서 정말 제 안에서 재탄생한 언어는 몇 개나 될까요? 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 제 삶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괴테의 문장을 자신의 방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은, 비록 원문과 다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원문보다 더 진실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출처도, 진위 여부도 아닙니다. 그 언어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태어 나는가, 그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번역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사랑은 모 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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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와인을 읽다, 보다, 걷다 - QR 영상으로 떠나는 포도밭 여행
이종영 외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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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주말 휴일에 와인 한잔 하면서 와인 영화의 걸작인 사이드웨이를 다시보았다. 좋아하는 와인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다시한번 가장 좋아하는 대화를 들어보았다.

마일즈 : 피노누아는 재배가 힘든 품종이잖아요. 아무 환경에서나 못 자라서 끊임없이 보살펴줘야 하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 지역에서만 잘 자라죠. 인내심 없는 재배가 불가능하고 시간과 공을 들여서 돌봐줘야만 포도알이 굵어져요. 그렇게 잘 영글면 그 맛과 오묘한 향이 태고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죠. 또 다른 품종과는 다르게 소박함도 느껴지고... 당신은요? 왜 와인을 좋아해요?

마야 : 전 와인의 삶을 찬미해요. 한 생명체가 포도밭에서 익어가는 모습 비가 내리고 따사한 햇살... 와인이 만들어지고 숙성되는 오랜 세월 동안 죽어간 사람들... 또 와인은 변화무쌍하죠. 따는 시기에 따라 그 맛이 제각각이잖아요. 생명력을 가졌기에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죠. 제 맛을 함껏 뽐내곤 삶을 마감하죠. 최고의 맛을 선사한 후에!

영화 사이드웨이

나는 피노누아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와인을 안지가 경력이 얼마되지않아 카쇼를 제일 좋아한다. 피노누아는 아직 내가 초보자이기에 그 풍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와인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언제 만들어진 빈티지가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빈티지보다는 떼루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포도밭의 위치, 경사도, 밭의 물의 양, 햇빛 그리고 모든 바람의 영향 등 모두를 종합해서 떼루아라 한다. 인간이 인간성을 만들어가는데 주변환경 영향과 같은 모양새다. 우리의 삶은 포도주와 같다고 한다. 문뜩 그동안 공부했던 와인관련 다양한 정보를 정리해 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ㅎㅎ 와인에서 시와 낭만 그리고 인생을 발견한 <부르고뉴 와인을 읽다, 보다, 걷다>을 읽었다. 순수 자연 발효 알콜을 섭취한 휴일 오후에....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은밀한 합의가 있다. 초보자는 칠레나 호주의 과일 향 가득한 와인으로 시작하고, 조금 익숙해지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프랑스 보르도의 웅장함에 감탄하다가, 결국엔 부르고뉴라는 미로 앞에 서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미로는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책은 바로 그 미로 앞에 선 이들을 위한 안내서다. 하지만 여느 가이드북처럼 친절하게 손을 잡아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자에게 직접 걸어보라고, 스스로 보고 느껴보라고 권한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읽다, 보다, 걷다.' 수동적 학습이 아니라 능동적 체험을 요구하는 동사들의 나열. 이 세 개의 동사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이 책이 취하는 독특한 접근법의 본질을 드러낸다. 부르고뉴는 와인 세계의 에베레스트라 불린다. 복잡한 끌리마 체계, 미세한 떼루아의 차이, 얽히고설킨 소유권 구조, 그리고 수백 개에 달하는 마을 이름들. 일반적인 와인 입문서들이 부르고뉴를 다루면서도 유명한 몇몇 그랑 크뤼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샤블리부터 마꼬네까지, 유명한 본과 뫼르소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꼬뜨 샬로네즈의 작은 마을들까지 빠짐없이 다룬다.


책의 저자들은 흥미롭게도 와인 전문가가 아니다. 그들의 본업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토록 방대한 작업을 해낸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 지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전문가의 글은 때로 지나치게 기술적이거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진다. 업계 내부자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동시에 초심자가 느끼는 막연함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반면 깊이 공부한 애호가의 시선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걸어온 혼란의 여정을 기억하고, 어떤 설명이 도움이 되고 어떤 정보가 불필요한지 안다.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저자들의 고백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실은 이 책의 강점을 정확히 짚어낸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학습자였던 시절의 기억이 묻어나는 문장들을 발견하게 된다. 복잡한 AOC 체계를 설명할 때의 차근차근한 접근, 떼루아와 끌리마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례로 풀어내는 방식, 그리고 각 장 사이에 배치된 '미니토픽'들. 포도 줄기를 포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오가닉과 비오디나믹의 차이, 부르고뉴 상속법이 와인 산업에 미치는 영향 같은 주제들은 교과서적 지식을 넘어선, 현장의 살아있는 이야기들이다.


책의 가장 혁신적인 시도는 QR코드를 통한 영상 제공이다. 국내 와인 전문서로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단순한 '최초'라는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와인은 결국 땅의 산물이다. 특히 부르고뉴처럼 떼루아를 강조하는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정교한 언어로 토양의 성질을 설명하고, 언덕의 경사를 묘사해도, 실제로 그 풍경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저자들이 직접 촬영한 포도밭의 영상은 책의 내용을 단순히 보조하는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를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통로다. 끌로 드 부조의 돌담을 보고, 샹볼 뮈지니의 완만한 경사를 확인하고, 샤블리의 석회암 토양이 햇빛에 빛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이것은 학습이 아니라 여행이다. 물리적으로 부르고뉴에 가지 않아도, 책을 읽으며 그곳을 걷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책 제목의 세 동사 중 '보다'와 '걷다'를 실현시키는 장치다. QR코드라는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적 경험, 즉 땅을 밟고 바람을 느끼는 감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더 근원적인 체험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책의 구성을 보면 일종의 동심원 구조를 띤다. 가장 바깥에는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와 개요가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떼루아와 끌리마라는 철학적 토대가 자리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AOC라는 법적·제도적 틀이 나타나고, 마침내 중심에는 개별 마을들과 그들의 와인이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실용적인 정보들 - 시음법, 보관법, 페어링 - 이 배치된다. 이런 구조는 독자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한다. 하나는 지도다. 부르고뉴라는 광대한 지역의 전체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꼬뜨 드 뉘와 꼬뜨 드 본의 차이, 샤블리가 왜 따로 떨어져 있는지, 마꼬네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 개별 나무들만 보다가 숲을 발견하는 순간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다른 하나는 나침반이다. 막막함 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원칙들. 떼루아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AOC 등급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이런 근본적 이해가 있을 때, 수백 개의 와인 이름들이 무작위 나열이 아니라 의미 있는 체계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 훌륭한 점은, 모든 것을 다 채워 넣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여백이 있다. 독자가 스스로 채워 나가야 할 공간들. 예컨대 한식과 부르고뉴 와인의 페어링을 다룬 부분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가능성을 열어둔다. 각자의 경험으로 확장하고, 자신만의 조합을 발견하라고 초대한다. 완결된 백과사전이 아니라, 여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책이다.

"와인 여정의 종착역은 부르고뉴"라는 말이 있다. 이 책도 그 표현을 인용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말이 역설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부르고뉴는 종착역인 동시에 출발선이다. 그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와인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이해와 경험을 갖췄다는 의미다. 더 이상 단순한 과일 향이나 떫은맛에만 주목하지 않고, 산도와 미네랄, 구조와 여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단계. 그러나 동시에 부르고뉴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진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마을 안에서도 밭에 따라, 생산자에 따라, 빈티지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들. 평생을 바쳐도 다 알 수 없는 깊이다. 책은 그 무한한 깊이 앞에서 겸손해지면서도, 동시에 탐험에 대한 열망을 품게 만든다. 모든 마을을 다 가볼 수는 없겠지만, 한 병의 와인을 마실 때 그 뒤에 있는 땅과 사람, 역사와 기후를 생각하게 된다. 글라스 안의 액체가 더 이상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어떤 장소와 시간의 압축된 기록처럼 느껴진다.


'부르고뉴 와인을 읽다, 보다, 걷다'는 교본이 아니라 동반자에 가깝다. 시험을 위한 암기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이해를 추구한다. 저자들이 와인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결핍이 아니라 자산이다. 그들은 독자와 같은 위치에서 출발해, 조금 먼저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권위적이지 않고, 과시적이지 않다. 한국어로 된 와인 책들 중에 부르고뉴만을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룬 사례가 드문 이유는 명확하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방대하며,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것도 QR코드라는 새로운 시도까지 더해서.

와인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해요. 와인은 생명체거든요. 와인이 계속 변화한다는 게 정말 좋아요. 오늘 열어서 마신 와인을 만일 다른 날에 따서 마셨더라면 맛이 다를 거잖아요. 그건 와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계속해서 진화하고 다양한 모습을 더해 가다가, 당신의 1961년 산 슈발 블랑처럼 정점에 이르게 돼요. 그 후로는 피할 수 없는 내리막 길을 따라 서서히 시들어가죠

영화 사이드웨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사이드웨이즈(sideways)> 중에서 여주인공 마야의 대사이다. ’슈발 블랑(Cheval Blanc)’이라...보르도의 지롱드강 우안에 있어 1855년의 ‘그랑 크뤼 클라세’에서 1등급 와인에 들지는 못했지만 당당히 그들 1등급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는 와인이다. 실제로 현대 보르도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꼽으라면 1등급 와인 5개에다가 4개를 덧붙여 모두 9개를 꼽는데 ‘슈발 블랑’ 역시 그중 하나다. 슈발 블랑....‘하얀 말’이라는 뜻인데...거의 레드 와인만 생산하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생테밀리옹의 샤또에서 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화이트 와인 느낌이 나는 레드 와인이라고 한다. 부르고뉴의 피노누아에 가까운 와인이다. 강건하고 파워풀하고, 시간을 견디는 보르도 와인이면서 동시에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서정적인 우아함도 지닌 게 슈발 블랑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인은 즐거움을 위해 존재한다" 와인이 우리 삶에 즐거움을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식사에 맛을 더하고, 대화를 원활하게 하며, 인생의 작은 순간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이야기 해 주는 와인의 종류와 와인에 담긴 역사와 의미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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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작해도 늦지 않은 주식 공부
곽유정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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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켰다. 습관처럼. 어제 장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계좌는 온통 파란색이었다. 마이너스 8%, 마이너스 12%, 심지어 마이너스 15%까지. 손가락이 떨렸다. '다 팔아버릴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주식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반년. 처음엔 신났다. 월급의 일부를 넣어서 조금씩 수익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유튜브에서 본 종목, 커뮤니티에서 추천받은 테마주, 지인이 좋다던 기업. 그렇게 하나둘 모은 내 포트폴리오는 어느새 열 개가 넘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시장이 무너지니까, 나는 내가 산 종목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회사가 뭐 하는 곳이지?' '왜 샀더라?' '지금 팔아야 하나, 버텨야 하나?'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더 두려워한다. 나는 그 순간을 통해서야 알았다. 내게 필요한 건 '대박 종목 추천'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부'였다는 것을 말이다.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HTS'라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오늘 시작해도 늦지 않은 주식 공부>. 사놓고 제대로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시작할 때는 귀찮았다. 그냥 누가 좋다는 종목만 따라 사면 되지, 굳이 이런 걸 읽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꺼내 들고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놀랐다. 이 책은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으며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식으로 건너뛰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기본적인 것부터, 가령 '주식이란 무엇인가'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마치 주식 좀 하는 동네 선배가 옆에 앉아서 설명해주는 느낌이었다. "야, 너 HTS 켜는 거 알아? 거기 보면 이런 화면 뜨잖아. 여기 이게 호가창이라는 건데..."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서 남한테 차마 못 물어보는 것들, 다들 아는 것 같아서 혼자만 모르는 것 같아 주눅 들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주식 뉴스를 보면 항상 답답했다. 아나운서가 뭐라고 말하는지 단어는 들리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거다. "이 종목은 PER이 낮고 PBR도 매력적입니다", "ROE가 개선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모르는 그 느낌. 마치 외국어 단어를 대충 알아듣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그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PER은 주가수익비율이라는데, 쉽게 말하면 지금 이 주식이 비싼지 싼지를 가늠하는 척도란다. 낮으면 저평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높으면 시장이 이 회사의 미래를 좋게 보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 물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PBR은 또 다르다. 회사의 자산가치 대비 주가를 나타내는 지표인데, 만약 PBR이 1보다 낮다면 회사를 청산했을 때 남는 돈보다 주가가 낮다는 의미란다. 그러니까 '장부상으로는 이 정도 가치인데, 시장에서는 더 싸게 팔리고 있네?' 하는 상황인 거다. ROE는 자기자본이익률. 회사가 내 돈(자본)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익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높을수록 효율적이고, 장사를 잘한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알아가니까 뉴스가 다르게 들렸다.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가던 단어들이 이제는 뭔가 의미를 갖고 다가왔다. '아, 이 종목은 저평가되어 있구나', '이 회사는 수익성이 좋네' 같은 판단을 내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솔직히 재무제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숫자가 빼곡한 표를 보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업이익, 당기순이익, 자산총계, 부채비율... 대체 이걸 왜 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하지만 책에서는 말한다. 재무제표는 회사의 성적표라고. 우리가 학창시절에 성적표를 받아보면 '아, 내가 이 과목은 잘하고 저 과목은 못하는구나'를 알 수 있듯이, 재무제표를 보면 이 회사가 돈을 잘 벌고 있는지, 빚은 없는지, 앞으로도 성장할 여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재무제표를 보는 다섯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매출과 영업이익의 추세'를 보라는 것이었다.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고, 영업이익도 함께 증가한다면 이 회사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다. 반대로 매출은 늘어나는데 이익은 줄어든다면, 뭔가 비용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 부채비율도 중요하다고 했다. 회사가 빌린 돈이 너무 많으면, 이자 부담 때문에 어려워질 수 있다. 특히 금리가 오르는 시기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부채비율이 낮고 현금흐름이 좋은 회사가 안전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종목들의 재무제표를 하나하나 찾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떤 종목은 매출은 늘고 있는데 이익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또 어떤 종목은 부채비율이 200%가 넘었다. '이걸 왜 샀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눈 감고 투자하고 있었구나.

차트를 볼 때 나는 늘 촛대만 봤다. 빨간 봉, 파란 봉. 오르면 좋고, 내리면 나쁘고.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책은 말한다. 봉차트의 모양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바로 거래량이라고. 거래량은 에너지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사고팔 때 거래량이 터진다. 만약 주가가 오르는데 거래량도 함께 증가한다면, 이건 진짜 상승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식 좋다'고 생각하며 사들이고 있다는 뜻이니까. 반대로 주가는 오르는데 거래량이 시들하다면? 이건 위험 신호다. 힘없는 상승이라는 거다. 곧 힘이 빠져서 다시 내려올 가능성이 있다. 하락할 때도 마찬가지다. 거래량이 터지면서 급락한다면 공포 매물이 쏟아지는 것이고, 거래량 없이 조용히 내려간다면 관심이 식어가는 중이라는 신호다. 이런 걸 알고 나니까, 차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그냥 빨간색, 파란색 막대기로만 보였는데, 이제는 '아, 여기서 사람들이 몰렸구나', '여기서 다들 포기하고 팔았구나' 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다.


책에서 가장 와닿았던 문장이 있다. "초보자일수록 고수익을 쫓기보다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 벌까?'만 생각했지, '얼마 잃을 수 있나?'는 생각 안 했다. 누군가 "이 종목 대박 난다"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샀다. 왜 오를지, 이 회사가 뭘 하는지, 재무상태가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남들이 번다는데 나도 벌고 싶다'는 조급함뿐이었다. 책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투자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내가 왜 이 주식을 사는지, 어느 가격에서 사고 어느 가격에서 팔 것인지, 손실은 어디까지 감수할 것인지. 이런 기준이 없으면 감정에 휘둘리게 되고, 결국 잃는다고. 그래서 나는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적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종목들을 하나씩 점검하며, 각 종목에 대한 투자 이유를 정리했다. '왜 샀나?', '어떤 가치가 있나?', '얼마까지 오를 것 같나?', '손절 기준은?' 적다 보니 놀라웠다. 절반 정도는 제대로 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분위기에 떠밀려 샀거나, 누군가의 말만 믿고 샀거나. 이런 종목들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대신 제대로 공부하고, 확신이 생기는 종목만 남기기로 했다.

시장이 무너질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거나, 아니면 이 기회에 제대로 배우거나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오늘 같은 날, 창을 끄고 책을 펼친 건 어쩌면 올해 내가 한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폭락장에서 패닉셀을 하는 대신, 침착하게 내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공부했다. 책의 저자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속으로 1위를 했다고 한다. 대단한 실력자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화려한 수익률 자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했다. "기본기를 지키라", "원칙을 세워라", "공부하라". 당연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시장은 늘 오르락내리락한다. 역사를 보면 결국은 우상향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떠났다. 왜일까? 버티지 못해서다. 왜 버티지 못했을까? 확신이 없어서다. 왜 확신이 없었을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침에 느꼈던 그 공포와 조급함이 사라졌다. 나는 내일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남의 말만 믿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공부하고 판단해서. 재무제표를 보고, 차트를 분석하고, 뉴스를 해석하면서. 물론 여전히 어렵다.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갑자기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잡았다. 내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주식 투자는 마라톤이라고 한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빨리 결과를 내려고 하면 지친다. 천천히, 꾸준히, 원칙을 지키며 나아가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다. 오늘 저녁, 나는 HTS를 켰다. 여전히 파란색 숫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하나하나 종목을 점검했다. 이 회사의 재무제표는 어떤지, 업종 전망은 어떤지, 지금 가격은 적정한지. 그리고 깨달았다. 시장이 무너질 때 진짜 투자자와 투기꾼이 구분된다는 것을. 투기꾼은 도망치지만, 투자자는 기회를 찾는다. 나는 투자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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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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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의학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냈다. 백신은 천연두를 지구상에서 퇴치했고, 항생제는 한때 치명적이었던 감염을 일상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첨단 영상 기술과 유전자 검사는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정밀하게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30년 경력의 신경과 전문의 수잔 오설리번(Suzanne O'Sullivan)은 그녀의 신작 <진단의 시대(The Age of Diagnosis)>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혹시 너무 많이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학적 라벨을 붙이는 것이 항상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자폐증, ADHD, 암, 라임병, 롱코비드 등 다양한 질환의 진단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 앞에서, 오설리번은 우리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비관론과 의학이 더욱 정교해졌다는 낙관론 사이에서 제3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는 더 아픈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 많은 것을 질병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설리번은 현대 의학의 문제를 "과잉의 삼위일체"로 개념화한다. 첫째, 과잉진단(overdiagnosis)은 치료가 꼭 필요하지 않은 의학적 문제를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부 암 조기 검진 프로그램은 실제로 암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이상 징후를 발견하여,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70세 이상 여성의 유방암 과잉진단율이 3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는 불필요한 유방절제술, 방사선 치료, 화학요법을 의미한다. 둘째, 과잉의료화(overmedicalisation)는 비의학적 행동이나 특성을 의사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상적인 개인차, 일상적인 슬픔과 불안, 삶의 불완전함이 점점 더 의학적 장애로 규정되고 있다. 오설리번은 자신의 진료실을 찾는 20~30대 젊은이들이 이미 수많은 진단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투렛증후군, 난독증, 자폐증, ADHD, 우울증, 불안장애 등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진단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셋째, 이 두 현상의 근저에는 과잉탐지(overdetection)가 자리한다. 우리는 질병의 신호를 점점 더 잘 식별해내고 있지만,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조기에, 그리고 그 지표들이 실제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시점에 발견한다. 선별검사 프로그램, 영상 스캔, 유전자 검사 등 기술의 발전은 문제로 진행되지 않을 이상 징후들까지 탐지해낸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잠재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에 매혹되어, 탐지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진다.


오설리번이 주목하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행동 장애의 진단 증가다. ADHD는 1968년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 처음 등장했을 때, 어린 아이들의 산만함과 안절부절못함을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DSM 개정을 거치면서, ADHD는 이제 모든 연령대에 적용될 수 있고, 광범위한 증상과 심각도를 포괄하는 진단명이 되었다. 2018년 기준 미국 아동의 거의 10%가 ADHD 진단을 받았는데, 이는 20년 전 6% 미만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자폐증의 경우는 더욱 인상적이다. 2022년 미국 아동 31명 중 1명이 자폐 진단을 받았는데, 이는 2000년 150명 중 1명에서 급증한 것이다. 이러한 증가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자폐증의 실제 범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회의적이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폐증을 확진할 수 있는 혈액 검사나 스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설리번이 지적하듯, "진단은 전적으로 정상적인 행동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오설리번은 "진단 확대(diagnosis creep)"라는 개념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이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선이 천천히 이동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때 건강하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질병 집단으로 편입되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오설리번이 ADHD와 자폐증이 실제 질환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과잉진단의 가능성이다.

오설리번은 가명 포피(Poppy)라는 자폐 청소년의 사례를 통해 진단이 가진 복잡한 의미를 보여준다. 포피는 자신이 "자폐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폐인"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자폐증은 그녀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녀 존재 방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진단은 포피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과거라면 포피는 반에서 "좀 이상한" 아이였을 것이고, 그 특이함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이제 라벨은 그녀가 비전형적인 존재임을 처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중등도 또는 경증 자폐 진단을 받은 아동의 경우, 진단이 유익할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한 해를 끼친다는 새로운 증거도 나타나고 있다. 자존감 저하, 자폐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일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도를 꺼리게 되는 현상 등이다. 성인의 경우, 진단 자체로 인한 이득이나 해에 대한 증거는 희박하다. 이는 진단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진단은 동시에 해방적이면서도 제한적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이해와 사회적 인정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낙인과 자기 제한적 신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오설리번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연민과 배려, 그리고 품위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나쁜 과학을 반박하는 글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을 피하는 중요한 접근법이다.


라임병과 롱코비드, 이 두 질환은 악명 높을 정도로 광범위한 증상을 가지고 있으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라임병의 원인은 잘 알려져 있다. 사슴 진드기가 전파하는 세균 감염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불신부터 제한적인 생물학적 증거에 기반한 거대한 과잉진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부적절한 처우를 경험한다. 오진율은 무려 85%로 추정되는데, 이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들과, 환자들의 모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절박함을 이용하는 극소수 회사들 때문이다. 롱코비드 역시 어떤 하나의 장기나 해부학적 시스템에 국한되지 않는 효과를 가진다. 오설리번이 지적하듯, 롱코비드는 독특하게도 대중이 주도한 진단이며, 종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과학적 정의와 체계적 연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롱코비드 환자로서 그녀는 그것이 매우 실재한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동시에 대중 주도 진단이 가져온 방법론적 문제들을 지적한다. 이러한 질환들이 탐구하기 극도로 어려운 영역인 이유는 명확하다. 증상은 실재하고 환자들의 고통은 진짜이지만, 진단의 경계는 모호하고, 생물학적 표지자는 불확실하며, 문화적·사회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오설리번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더 아픈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질병으로 귀속시키고 있다." 진단은 도구이며,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 사용되어야 한다. 차이에 대한 관용과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이 우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잉진단의 가장 큰 지표는 질병 탐지율은 훨씬 높아졌지만 장기적인 건강에는 실질적인 개선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책임을 인정하지만, 삶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진단을 요구하는 환자들과 환자의 부모들의 역할도 강조한다. "끊임없는 건강, 성공, 순탄한 삶을 향한 전환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실망으로 이어진다. 의학적 설명은 우리가 그 실망을 관리하는 데 사용하는 반창고가 되었다." 현대 사회의 깊은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우리는 점점 더 완벽함을 기대하고,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은 줄어들었으며, 모든 어려움에 대한 의학적 해결책을 찾는다. 정상적인 경험, 불완전함, 슬픔, 불안이 점점 더 의학적 장애의 인가를 받고 있다.


<진단의 시대>는 현대 의학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딜레마 중 하나를 이야기 한다. 의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질병을 식별하고 치료하며, 사람들이 애초에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겉보기에 단순한 목표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극도로 복잡하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학적 증거 기반, 계속 변화하는 진단 기준, 그리고 정상과 병리를 나누는 자의적인 선들. 저자는 과잉진단의 문제만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도 환자들의 경험을 무효화하지 않고, 의학적 진보를 부정하지 않으며, 보수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한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며,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임상 경험, 과학적 엄밀함, 그리고 깊은 인간애에서 비롯된다할 것이다. 오설리번은 의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이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녀의 메시지는 진단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단을 더 신중하고 사려 깊게 사용하자는 것이다. 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을 견디는 능력, 모든 차이를 병리로 전환하지 않는 지혜, 그리고 의학적 라벨 없이도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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