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구성을 보면 일종의 동심원 구조를 띤다. 가장 바깥에는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와 개요가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떼루아와 끌리마라는 철학적 토대가 자리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AOC라는 법적·제도적 틀이 나타나고, 마침내 중심에는 개별 마을들과 그들의 와인이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실용적인 정보들 - 시음법, 보관법, 페어링 - 이 배치된다. 이런 구조는 독자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한다. 하나는 지도다. 부르고뉴라는 광대한 지역의 전체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꼬뜨 드 뉘와 꼬뜨 드 본의 차이, 샤블리가 왜 따로 떨어져 있는지, 마꼬네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 개별 나무들만 보다가 숲을 발견하는 순간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다른 하나는 나침반이다. 막막함 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원칙들. 떼루아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AOC 등급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이런 근본적 이해가 있을 때, 수백 개의 와인 이름들이 무작위 나열이 아니라 의미 있는 체계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 훌륭한 점은, 모든 것을 다 채워 넣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여백이 있다. 독자가 스스로 채워 나가야 할 공간들. 예컨대 한식과 부르고뉴 와인의 페어링을 다룬 부분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가능성을 열어둔다. 각자의 경험으로 확장하고, 자신만의 조합을 발견하라고 초대한다. 완결된 백과사전이 아니라, 여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책이다.
"와인 여정의 종착역은 부르고뉴"라는 말이 있다. 이 책도 그 표현을 인용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말이 역설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부르고뉴는 종착역인 동시에 출발선이다. 그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와인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이해와 경험을 갖췄다는 의미다. 더 이상 단순한 과일 향이나 떫은맛에만 주목하지 않고, 산도와 미네랄, 구조와 여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단계. 그러나 동시에 부르고뉴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진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마을 안에서도 밭에 따라, 생산자에 따라, 빈티지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들. 평생을 바쳐도 다 알 수 없는 깊이다. 책은 그 무한한 깊이 앞에서 겸손해지면서도, 동시에 탐험에 대한 열망을 품게 만든다. 모든 마을을 다 가볼 수는 없겠지만, 한 병의 와인을 마실 때 그 뒤에 있는 땅과 사람, 역사와 기후를 생각하게 된다. 글라스 안의 액체가 더 이상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어떤 장소와 시간의 압축된 기록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