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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홍차 티백에 매달린 작은 종이 한 조각, 그곳에서 시작된 질문 하나가 한 남자의 삶 전체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괴테가 정말 이 말을 했을까요? 아니,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짜 괴테의 것이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도이치 교수는 평생을 괴테와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서재에는 괴테의 모든 문장이 정리되어 있고, 그의 머릿속에는 괴테의 사유 체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 전체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 출처 불명의 문장이야말로 괴테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사상이 원문 그대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변주되고, 재해석되고, 누군가의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모든 번역은 배신입니다. 독일어로 쓰인 문장이 일본어를 거쳐 한국어가 될 때, 원래의 뉘앙스는 필연적으로 변형됩니다. 하나의 단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번역가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 속에서 원문은 조금씩 변질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배신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언어가 살아 숨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나비가 꽃가루를 옮기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듯, 번역은 언어를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합니다. 괴테의 독일어가 21세기 한국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정확한 번역 때문이 아니라 부정확한 번역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도이치 교수는 요약형, 전승형, 위작형 명언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명언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종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루터의 말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30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는 2001년생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언어의 소유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괴테의 문장은 괴테의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읽고 감동받은 모든 사람의 것일까요? 도이치 교수가 집착했던 것은 진위 여부였지만, 정작 그 문장이 그의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고, 오랫동안 대화하지 못했던 아내와 딸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었습니다. 학문적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빌려 말합니다. 완전히 독창적인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보르헤스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재배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재배열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했고, 그 의미는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역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괴테가 실제로 모든 것을 말한 게 아니라, 괴테의 언어가 무한히 확장되고 변형되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소설을 읽으며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정말 사유하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요? 한 문장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고민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저는 소비했을 뿐,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도이치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나누는 대화는 경이롭습니다. 단 한 문장을 두고 괴테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토론합니다. 파우스트를 인용하고, 색채론을 끌어오고, 니체와 보르헤스를 경유합니다. 하나의 문장이 우주가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매우 조용합니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그저 한 가족이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일상이 펼쳐질 뿐입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문장을 수백 번 되뇌이며, 저는 이것이 번역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혼동은 무질서입니다. 하지만 혼연일체는 조화입니다. 사랑은 서로 다른 것들을 뒤섞어 혼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함 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합니다. 마치 좋은 번역이 원문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이치 교수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세 사람이, 한 문장을 매개로 다시 만났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입니다.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지만, 그 불완전한 번 역 속에서도 사랑은 전달됩니다."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인용하며 살아갑니다. 명언을 필사하고, SNS에 공유하고, 대화 중에 인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언어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빌려온 옷을 입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괴테도, 보르헤스도, 이 소설의 작가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빌린 언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신의 언어'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제 서재를 둘러봤습니다. 수백 권의 책들, 수천 개의 문장들. 이 중에서 정말 제 안에서 재탄생한 언어는 몇 개나 될까요? 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 제 삶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괴테의 문장을 자신의 방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은, 비록 원문과 다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원문보다 더 진실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출처도, 진위 여부도 아닙니다. 그 언어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태어 나는가, 그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번역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사랑은 모 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