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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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한다. 적절한 온도, 충분한 물과 산소, 안전한 환경,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생명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알렉스 라일리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통념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착각인지에 대한 증거다. 생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창의적이며, 끈질기다. 라일리가 소개하는 극한 환경의 생물들은 '살아남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들은 번성하고, 진화하며,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한다. 루마니아의 모빌레 동굴은 이러한 생명력의 극적인 사례다. 500만 년 이상 외부와 단절된 채, 산소가 희박하고 황 성분이 가득한 이 지하 세계에서 수 십 종의 생물이 독자적인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왔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동안, 이 보이지 않는 생물들 은 미생물 군락을 먹으며 조용히 자신들의 시간을 이어왔다.

극한 환경 생물들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들의 적응 전략이 보여주는 창의성이다. 사막 개미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대에 활동함으로써 경쟁자와 포식자를 피한다. 그들은 장소가 아닌 '시간'이라는 생태적 지위를 점유한다. 이는 공간적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생존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알래스카의 송장개구리는 더욱 극단적이다. 겨울 동안 완전히 얼어붙는데, 이때 그들의 신체는 더 이상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다. 각 장기는 서로 단절되고, 기능이 정지하며, 마치 분해된 부품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봄이 오면 이 '부품들'은 다시 조립되고 생명이 돌아온다. 생명의 정의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새들의 호흡 시스템은 또 다른 경이다. 포유류처럼 들이쉬고 내쉬는 방식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만 공기를 순환시키는 그들의 폐는 고산 지대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산소를 추출한다. 정말 생명의 기적을 보는 듯 하다.

체르노빌은 인류가 만든 재앙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조차 생명은 길을 찾았다. 검은 곰팡이는 파괴된 원자로 벽에서 자라고, 프셰발스키말은 출입 금지 구역에서 번식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일부 균류가 방사선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광합성도 화학합성도 아닌, '방사선 합성'이라는 제3의 에너지 획득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우주 탐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NASA 엔지니어들이 곰팡이 포자를 우주선 외벽에 배치하여 방사선 차폐막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생명은 단지 환경에 적응할 뿐 아니라, 가장 적대적인 요소조차 자원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깊은 바다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빛도 없고, 먹이도 없으며, 압력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현대의 탐사는 이것이 완전한 오해였음을 보여주었다. 8,000미터 이상의 심해에서도 달팽이고기는 유유히 헤엄치고, 쥐만 한 크기의 초대형 단각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기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흔적은 이곳에도 닿아 있다. 마리아나 해구에서 채집한 단각류의 위장에서 발견된 푸른 플라스틱 섬유는, 지구상 가장 깊고 먼 곳도 더 이상 인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종에 'Eurythenesplasticus'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라스틱의 시대를 살아가는 생물이라는 의미다.

라일리는 이 책을 코로나19 봉쇄 기간 중 가장 어두운 시기에 구상했다고 밝힌다. 우울증과 씨름했던 과학 작가에게 극한 생물들의 이야기는 호기심만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경 속에서도 생명이 계속된다는 증거이자, 회복력에 대한 믿음의 근거였다. 물론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멸종을 가볍게 여기자는 말은 아니다. 생물다양성의 손실은 실재하는 위기이며, 우리 세대가 책임져야 할 과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생명 자체의 놀라운 회복력도 인정해야 한다. 지구 역사상 다 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그때마다 96%의 종이 사라지는 참혹한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생명은 돌아왔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으며, 더욱 다양해졌다. 완보동물은 거의 절대영도에 가까운 온도에서도, 끓는 물에서도, 우주 공간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바다가 증발하지 않는 한, 이 작은 이끼돼지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 준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생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겸손함과, 생명의 끈질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이다. 극한 환경 생물 연구는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동물들이 환경 스트레스에 적응하는 메커니즘은 인간 질병 치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벌거숭이 두더지 쥐의 암 내성은 피부 단백질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지하 생활을 위한 적응이 예기치 않게 장수와 질병 저항성으로 이어진 사례다. 누가 이런 연결고리를 예상했겠는가? 천체생물학자들은 극한 환경 생물을 연구하며 외계 생명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지구에서 가장 적대적인 환경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나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와 유사하다면, 그곳에도 생명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의 정의를 넓히는 것은 우주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로렌 아이슬리는 생명체의 극한 환경 진출을 '현실에 대한 영원한 불만'이라고 표현했다. 시적이면서도 정확한 관찰이다. 진화는 본질적으로 모험적이며, 생명은 끊임없이 경계를 시험하고 확장한다. 사막 개미가 뜨거운 정오의 시간대를 점유하고, 송장개구리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심해 생물이 어둠과 압력 속에서 번성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본성의 발현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경이감은 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반대로 너무 연약한 것으로 과소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극한 생물들의 이야기는 생명이 우리 상상보다 훨씬 강인하고, 창의적이며, 끈질기다는 것을 일깨운다. 한 행성에서 생명이 시작되면 완전히 제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절망적 낙관주의인지, 아니면 현실적 희망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 분명한 것은 생명이 우리보다 훨씬 오래 존재해 왔고,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서 우리는 겸손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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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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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인류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 라스코 동굴의 들소, 알타미라 동굴의 사냥 장면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증언하는 기록이었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 그림은 역사를 기록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왕의 초상화는 권력의 정당성을 증명했고, 전쟁화는 승리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했으며, 풍속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후세에 전했다. <시간을 읽는 그림>은 이러한 시각 자료가 지닌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다. 책이 특별한 이유는 미술관에 걸린 명화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 속 삽화, 신문의 풍자만화, 선전 포스터, 심지어 상품 광고까지, 당대 사람들의 눈과 손을 거쳐 만들어진 모든 시각 자료를 역사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루브르 박물관의 걸작이 왕과 귀족의 시선을 담았다면, 거리의 포스터와 팸플릿은 민중의 목소리를 담았다. 둘 다 역사를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이다. 역사 교과서는 연도와 사건을 나열하지만, 그림은 그 사건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여덟 점의 그림을 보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군중의 흥분, 단두대 앞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표정, 혁명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가 생생하게 전해진 다. 텍스트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감정과 분위기가 그림 속에 응축되어 있다.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제시한다. 하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관점'과 땅 가까이에서 세밀하게 관찰하는 '곤충의 관점'이다. 새의 시선으로 보면 왕조의 흥망성쇠, 전쟁의 승패, 혁명의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처럼 역사의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그 강물은 무수한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곤충의 시선으로 한 방울 한 방 울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중세 장원을 다룬 장에서 이 두 시선의 조화가 빛을 발한다. 봉건제도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설명하면서도, 농노 보도의 하루 일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새벽에 일어나 영주의 땅을 갈고, 해질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저녁을 먹고, 일요일이면 교회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보통 사람들의 삶이 생생하다.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속 3월 달력 그림은 쟁기를 끄는 소, 씨앗을 뿌리는 농부, 포도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담았다. 이 한 장의 그림에서 우리는 봉건 사회의 구조뿐 아니라 그 속에서 땀 흘리며 살았던 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정기시를 묘사한 16세기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중세 상업의 발전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천막을 치고 향신료를 파는 상인, 애완용 원숭이를 구경하는 아이들, 류트를 연주하는 음유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시사와 미시사가 한 화폭 안에서 만난다. 역사란 거대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선택과 경험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그림은 웅변한다.


그림은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 왕의 초상화는 실제보다 더 위엄 있게, 전쟁화는 패배를 승리처럼 그린다. 바빌론에 대한 서양의 인식이 그러했다. 성경의 영향으로 바빌론은 오랫동안 '악의 도시'로 기억되었다. 요한계시록의 삽화들은 바빌론을 일곱 머리 괴물 위에 탄 창녀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바빌론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네부카드네자르2세 시대의 공중정원은 고대 건축술의 정점이었고, 지구라트는 천문학의 산실이었다. 피터르브뤼겔의<바벨 탑>은 흥미로운 경우다.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을 경고하는 교훈이지만, 브뤼겔의 그림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를 연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신화와 역사, 상상과 고증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한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표면의 이미지뿐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 시대적 편견, 문화적 맥락까지 읽어내는 작업이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해적 이야기도 그렇다. 영국에서는 '바다의 개들'이라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약탈자였다. 같은 사건 을 그린 영국과 스페인의 그림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에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 없듯, 그림도 화가의 시선, 후원자의 의도, 시대의 이념을 반영한다.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는 아름답지만은 않다. 책이 담은 그림들 중 상당수는 인간의 고통을 증언한다. 흑사병 시대의 ' 채찍질 고행단 '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집단적 공포와 광기가 느껴진다. 전염병이 신의 징벌이라 믿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참회했다. 피로 얼룩진 등, 절규하는 표정, 황홀경에 빠진 군중의 모습이 섬뜩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행렬은 오히려 전염병을 더 확산시켰다. 선의와 무지가 결합하여 비극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그림들은 더욱 처참하다. 감자 역병으로 백만 명이 굶어 죽고 백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앙상하게 마른 아이들, 텅 빈 마을, '관 배'라 불린 이민선의 비좁은 선실이 그림에 담겼다. 자연재해였지만 영국 정부의 무관심과 경제적 착취가 재난을 증폭시켰다. 그림은 숫자로는 담을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은 희망도 기록한다. 코르셋을 벗고 자전거를 타는 '뉴 우먼'의 모습은 여성 해방의 시작을 알린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을 숨 막히게 조였던 코르셋은 의복만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물리적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적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조롱하는 풍자만화도 있었지만, 당당하게 페달을 밟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광고 포스터도 있었다. 같은 시대, 상반된 시선이 공존했고, 결국 변화의 흐름이 승리했다.


책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르네상스는 정말 ' 빛의 시대 ' 였을까? 화려한 예술의 뒤편에는 메디치 가문의 부패와 보르자 가문의 음모가 있었다. 교황 알렉산데르6세는 성직을 매매하고 자식들에게 권력을 세습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은 이러한 어둠의 후원으로 탄생했다. 빛과 어둠, 예술과 타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었다. 산업혁명은 진보였을까, 재앙이었을까? 터너의<전함 테메레르>는 증기선에 예인되어 가는 범선의 쓸쓸한 모습을 담았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변화의 순간을 포착한다. 산업화는 부와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노동자의 극심한 빈곤, 아동 노동, 환경 파괴를 낳았다. 19세기 런던 빈민가를 그린 귀스타브 도의 판화는 '진보'의 이면을 폭로한다. 저자는 자신만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하기를 권한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한다. 렘브란트의 <니콜라스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과학의 승리로 볼 수도 있고, 사형수의 신체를 도구화한 폭력으로 볼 수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지적 열정을 읽을 수도 있고, 계급 간 권력 관계를 읽을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질문하는 행위 자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함이다. 책이 소개하는 수많은 그림들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만의 의미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환경을 극복한 인간의 창의성을, 흑사병 시대의 광기는 집단 공포의 위험성을, 채찍질 고행단은 맹목적 신앙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이 모든 것이 현재의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맥도날드로 상징되는 대중 사회의 획일화, 자동화, 소외는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아니, 더 심화되었다. SNS 시대에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하루에도 수천 장의 사진을 찍고 공유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들이 훗날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화'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정보의 홍수로 사라질까? 저자가 늦가을 창가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바란 것처럼, 수백 년, 수천 년 전 역사 속 인물들과 생각을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삶의 자취를 따라가는 경험을 하여 좋았다. 중세 농노 보도의 하루, 공중정원을 거닐던 아미티스의 향수, 코르셋을 벗어던진 뉴 우먼의 해방감, 흑사병 앞에 선 사람들의 공포. 이 모든 감정이 그림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전달되었다. 그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역사는 그 다리를 건너 현재로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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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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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잃는 일이고, 과거의 순간들을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일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일부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경험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남겨진 사람은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무거운 질문들을 떠안게 된다.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어느 순간 더 세심하게 바라봤어야 했을까.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미련이 남는다. 조수경님의 <말라가의 밤>은 바로 이 질문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도 절벽 끝에 선 한 남자의 이야기다. 형우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살 사별자들의 초상이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가지 못하고, 숨을 쉬지만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시간을 견디지만 시간 속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화물 트럭을 몰며 도로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목적지는 있지만 목적은 없는 삶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형우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의 결을 정확하게 더듬으며, 상실 이후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무너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 동생이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가족이 함께했던 공간을 지나칠 때마다 형우의 일상은 멈춰버린다. 사별의 경험이 지닌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죽음은 단 한 번 일어나지만, 그로 인한 상실은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핵심적인 공간인 '말라가'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장소다. 그곳에서 형우는 자신의 여러 시간대를 만난다.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의 자신과 마주하는 설정.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다시 읽는 과정이며, 현재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여정이다. 아홉 살의 형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특히 마음을 흔든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충만했던 시절, 아빠는 없었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였던 그 시간. 우리는 종종 행복했던 과거를 아름답게만 기억하려 하지만, 형우가 발견하는 것은 그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던 균열들이다. 엄마의 피로, 동생의 불안, 그리고 자신의 무지. 행복은 완전했던 적이 없었고, 불행의 씨앗은 오래전부터 뿌려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기억 속에서 형우는 동생 은우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순간을 목격한다. 그때 형우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분기점이었을지 모른다. 대화가 이어졌다면, 의심이 공유되었다면, 형제 사이의 신뢰가 유지되었다면. 하지만 삶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는 변경할 수 없다. 형우가 말라가에서 경험하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기회가 아니라,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회다. 스물아홉 살의 형우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아다. 대기업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바쁘게 살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엄마의 우울, 동생의 번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는 신규 사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 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거나, 혹은 자신의 성공으로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리다이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 같다.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행위는 자살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다. 프리다이빙은 한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이다. 숨을 참는 것은 영원히 숨을 멈추기 위함이 아니라, 더 깊이 자신을 경험하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기 위함이다. 형우가 만나는 다른 자살 사별자들과의 교 류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다. 각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안다. 그 무게를, 그 어둠을, 그 끝없는 자책을. 그들이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지켜보며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장면은, 치유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라 연대의 과정이다. 치유는 망각이 아니다. 슬픔을 지우는 것도,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슬픔 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회복 호흡이다. 몸이 우리를 살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프리다이빙 강사의 말처럼, 우리의 마음도 결국 치유되도록 만들어져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 과정이 혼자서는 너무 어렵고, 때로는 함께 숨 을 참아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형우의 죄책감은 정당한가? 그가 더 잘했어야 했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은근히 드러낸다. 우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한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통계는 개인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형우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의 부재, 사 회적 지원의 부족 속에서 버텨왔다. 엄마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지쳐갔고,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나눌 곳이 없었으며, 형우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들 각자가 더 노력했어야 할까? 아니면 이 들을 둘러싼 사회가 더 많은 안전망을 제공했어야 할까? 형우가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는 완벽한 아들도, 완벽한 형도 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지만, 결국 그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책은 슬픔을 다루지만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소설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너머의 가능성을 본다. 자살 사별자라는 특수한 경험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상실의 보편성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선택, 타이밍과 관계의 산물인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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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김효동 지음 / 아이스타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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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우리는 모두 바쁘다. SNS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자기계발서는 더 나은 내가 되라고 속삭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받는다. "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주 말문이 막힌다. 김효동 작가의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를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너무 열심히 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몽마르트르 언덕에 오르며, 50년이 넘게 품어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아련함을 포착한다. 기쁨 속에 스며든 서글픔.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닿을 수 있는 목표라는 것의 무게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언젠가 이루어질 행복을 위해 오늘을 유예하고, 미래의 성취를 위해 현재를 견딘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삶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이라는 종착역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작은 힘인 경우가 많다. 모두가 참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위로가 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이 때로는 큰 연대감을 준다. 해운대 독서살롱을 운영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버팀을 발견한다. 모임을 준비하는 시간, 책장을 정리하고 책상을 닦는 그 고요한 순간이 오히려 더 소중하다는 고백. 결과보다 과정에서, 화려함보다 일상에서 찾는 평온.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행복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도망칠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끝까지 버티는 사람을 칭송한다. 포기는 나약함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는 묻는다. 정말 그런가? 때로는 손을 놓는 것이 더 큰 용기가 아닐까? 책을 읽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회사 상사를 이기기 위해서"라고 답한 젊은 회원의 이야기는 씁쓸하다. 책마저도 경쟁의 도구가 되어버린 현실. 하지만 동시에 그 솔직함이 우리 시대의 민낯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기계발조차 전쟁터로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전업 작가를 고민하며 내린 결론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사람의 조언은 '참고용'일 뿐, 정답은 자신의 선택 속에 있다는 것. 성공한 사람의 말도, 실패한 사람의 경고도 모두 그들의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내게 맞는 하루는 어떤 모습인지 스 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은 가장 날것의 솔직함을 보여준다. 따뜻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퉁명스러울 때, 느끼는 자기혐오. 어머니의 희생을 뒤늦게 알았을 때 밀려오는 죄책감이다. "괜찮다"고만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자신을 탓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관계의 모순을 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거리를 만들어가는 아이러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용기처럼 느껴진다. 완벽한 관계, 완벽한 효도, 완벽한 사랑은 없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채로 서로를 사랑하며,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성숙일지도 모른다. 책은 조용히, 오래 남는다. 마치 겨울밤 내린 눈처럼 소리 없이 쌓여 결국 세상을 덮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매일 최대한 늦게 출근하고 가장 빠르게 퇴근한다고 고백한다. 출근길은 여전히 무겁고, 일하는 시간도 마냥 즐겁지는 않다. 그럼에도 퇴근 즈음이면 "이만하면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고 생각한다. 위로다. 우리는 매일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성취보다, 묵묵한 지속이 때로는 더 큰 용기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제목은 역설이다. 우리는 불행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버티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작가가 독서살롱을 운영하는 이유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닐까.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그 불완전함을 견디고 이해하며, 때로는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노력. 그것이 글쓰기이고, 그것이 살아가기다.

책을 읽고 난다고 삶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출근은 무겁고, 관계는 어렵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한가지는 달라진다. 오늘 하루를 견뎌낸 나 자신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창한 행복을 쫓느라 놓쳤 던 작은 평온들. 성공을 향해 달리느라 지나쳤던 일상의 온기들. 그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찾던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불행한 게 아니라,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깊이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만난다. 불완전하지만 충분히 괜찮은, 힘들지만 그래도 버티고 있는, 행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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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투자자를 위한 미국 주식 불패 공식 - 현직 해외 주식 전문 PB 연수르의 실전 투자 생중계
김연수(연수르)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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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투자에 관한 책들은 넘쳐난다. 그중 상당수는 복잡한 차트 분석, 난해한 재무제표 해석, 혹은 '남들이 모르는 보석'을 찾아내는 비법을 다룬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대한민국 투자자를 위한 미국 주식 불패 공식>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정반대다. 투자는 어려워야 성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쉬워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적 주장의 핵심은 확률에 있다. 투자자의 목표가 돈을 버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수익을 낼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수천 개의 중소형주 중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아내는 것보다,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대형 성장주의 지속적인 상승 추세에 올라타는 것이 쉽고 따라서 '확률이 높은' 투자다. 실제로 나스닥100 지수와 러셀2000 지수의 장기 성과 비교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초대형주로 구성된 나스닥100이 중소형주 중심의 러셀2000을 압도적으로 앞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는 규모가 큰 기업이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하고, 더 높은 수익률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미국 주식 투자가 쉬운 투자가 될 수 있는 구조적 이유다. 많은 투자자들이 '남들이 모르는 것'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GPU 시장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헤게모니가 AI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이익 성장으로 이어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투자의 성공은 정보의 희소성이 아니라 해석의 깊이에서 온다.


가치 투자와 성장 투자의 차이는 저평가주와 고평가주의 선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축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가치 투자는 ' 현재 저평가된 것 ' 에, 성장 투자는 ' 미래에 정당화될 고평가 '에 베팅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성장주 투자의 핵심은 바로 이 ' 정당화 ' 메커니즘이다. 주가가 먼저 오르고, 기업은 그 상승을 실적으로 뒷받침한다. 투자자들의 기대가 주가를 끌어올리면, 기업은 그 기대에 부응하는 이익을 실제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 비싸 보이지만 더 비싸지는 '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한국 시장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년 수많은 테마주가 급등하지만, 대부분은 기대만 남긴 채 실적 부진으로 추락한다. 투자자들의 기대를 실제 이익 성장으로 전환하는 기업이 드물다. 반면 미국 시장에서는 S&P500 기업의 70% 이상이 매 분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한다. 기대를 현실로 바꾸 는 능력, 이것이 미국 기업들의 진짜 경쟁력이다. 성장주 투자에서 밸류에이션은 전통적 의미를 잃는다. PER이 50배 100배든, 트렌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익 성장률이 밸류에이션 확장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번 올라탄 트렌드에서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매도했다면, 같은 기준으로는 다시 살 기회를 얻지 못한다.


미국 주식 투자가 쉬운 이유는 정보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시장의 구조 자체가 투자자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압도적인 유동성이다. 유동성은 곧 주가 상승의 용이성을 의미한다. 같은 호재라도 유동성이 풍부한 시장에서는 주가가 더 쉽게, 더 높이 오른다. 코로나19 시기의 경이적인 주가 상승이 기업 펀더멘털보다는 유동성에 기인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유동성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둘째, 가격의 대표성이다. 미국 시장에서는 주가가 정말로 기업의 가치를 반영한다. 정보가 신속하게 가격에 반영되고, 인위적인 왜곡이 적다. 이는 기술적 분석이 실제로 작동하는 시장, 추세가 존재하는 시장을 만든다. 투자자는 차트와 흐름을 믿고 투자할 수 있다. 셋째, 진정한 주주자본주의다. 미국 기업들은 정말로 주주를 위해 일한다. CFO는 주가 관리를 핵심 업무로 인식하고,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해 적극적으로 주주 가치를 환원한다. 한국 기업들이 쌓아두기'에 급급할 때, 미국 기업들은 번 돈을 주주에게 돌려준다. 넷째, 산업이 기업을 만드는 생태계다. 미국에서는 정부와 시장이 함께 미래 산업을 육성한다. AI, 우주항공, 자율주행 등 거대 트렌드가 만들어지면, 그 산업 전체가 성장하면서 관련 기업들을 함께 끌어올린다. 개별 기업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장이다.

책은 핵심은 향후 3년을 주도할 6대 키워드 분석이다. 에이전틱AI, 임베디드 AI, TV 광고의 진화, 자율주행, AI 광고, 클라우드 게이밍. 이것들은 테마라기 보다는 , 실제로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는 메가 트렌드다. 특히 AI 광고 영역에서의 통찰은 예리하다. 구글, 메타, 아마존이 AI 시대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된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하던 일을 더 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AI는 타기팅 효율을 높이고, 광고 단가를 올리고, 결국 이익률을 개선시킨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 필요도, 고객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저 기존 비즈니스가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된다. 이것이 산업 분석의 핵심이다. 어떤 트렌드가 어떤 기업에게 '자연스러운' 수혜를 주는가?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트렌드와 정렬되어 있는 기업을 찾는 것. 테슬라와 엔비디아의 피지컬 Al 경쟁,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우드 전쟁, 엔비디아와 브로드컴의 반도체 대결 등 빅테크 간 경쟁 구도 분석은 기업 비교가 아니라, 산업의 미래 방향성을 가늠하는 나침반이다.


성장주 투자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언제 사고 언제 파느냐'는 타이밍이다. 연수르는 이를 위해 '트렌드-실적-주가'의 흐름 을 읽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주가 상승의 가장 좋은 모멘텀은 이익 성장이다. 하지만 그 이익 성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트렌드에서 온다. 세상이 변하고, 산업이 변하고, 그 변화 속에서 기업이 성장한다. 따라서 투자자는 재무제표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성장주 주가 폭발의 '두 가지 지점'이다. 첫 번째는 시작이 트렌드를 인지하는 순간, 두 번째는 실적이 그 트렌드를 확인해주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두 번째 지점에서야 뛰어들지만, 진짜 수익은 첫 번째 지점에 들어간 사람들이 가져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첫 번째 지점을 포착할 수 있을까? 바로 산업과 트 렌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시장이 아직 저평가하고 있는 변화를 먼저 인지하는 것이다. 컨센서스와의 밀당도 중요하다. 시장의 기대치(컨센서스)를 상회하는 실적이 반복되면 주가는 지속 상승한다. 반대로 컨센서스를 하회하는 순간 급락한다. 따라서 투자자는 컨센서스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IR 자료, 애널리스트 리포트, 경영진 가이던스를 종합해 시장의 기대 수준을 파악하고, 그것이 보수적인지 공격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필수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의 투자 복기 루틴이다. 매일, 매주, 매년 자신의 투자를 돌아보고, 무엇이 맞았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기록한다. 성공한 투자에서는 운과 실력을 구분하고, 실패한 투자에서는 교훈을 추출한다. 이런 복기가 중요한 이유는, 투자는 한 번의 대박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한 번 성공하는 것은 누 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하려면, 내가 왜 성공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저자의 투자 철학은 겸손에 기반한다. 시장은 항상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주가가 오르면 그것을 인정하고, 내리면 그 이유를 찾는다. 자신의 분석이 틀렸을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새로운 정보 에 유연하게 대응한다. 이것이 바로 '효율적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저자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어려운 투자를 추구하지 말고, 쉬운 투자를 선택하라. 남들이 모르는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모두가 아는 것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라. 개별 기업의 특수성에 매몰되지 말고, 산업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라. 미국 시장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유동성, 투명성, 주주 친화성, 산업 생태계. 투자자는 이 시스 템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물론 '올라타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트렌드를 읽는 눈, 데이터를 해석하는 능력, 타이밍을 포착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학습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며, 체계화할 수 있는 기술이다. 투자의 성공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꾸준한 실행에서 온다. 연수르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방향이다. 미국이라는 시장, 성장 이라는 철학, 산업이라는 관점, 데이터라는 도구, 그리고 겸손이라는 자세. 이 다섯 가지가 모여 '불패 공식'을 만든다. 결국 투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게임이 아니라, 확률을 높이는 게임이다. 가장 높은 확률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끝까지 걷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제시하는,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투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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