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잃는 일이고, 과거의 순간들을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일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일부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경험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남겨진 사람은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무거운 질문들을 떠안게 된다.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어느 순간 더 세심하게 바라봤어야 했을까.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미련이 남는다. 조수경님의 <말라가의 밤>은 바로 이 질문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도 절벽 끝에 선 한 남자의 이야기다. 형우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살 사별자들의 초상이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가지 못하고, 숨을 쉬지만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시간을 견디지만 시간 속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화물 트럭을 몰며 도로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목적지는 있지만 목적은 없는 삶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형우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의 결을 정확하게 더듬으며, 상실 이후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무너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 동생이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가족이 함께했던 공간을 지나칠 때마다 형우의 일상은 멈춰버린다. 사별의 경험이 지닌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죽음은 단 한 번 일어나지만, 그로 인한 상실은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핵심적인 공간인 '말라가'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장소다. 그곳에서 형우는 자신의 여러 시간대를 만난다.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의 자신과 마주하는 설정.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다시 읽는 과정이며, 현재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여정이다. 아홉 살의 형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특히 마음을 흔든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충만했던 시절, 아빠는 없었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였던 그 시간. 우리는 종종 행복했던 과거를 아름답게만 기억하려 하지만, 형우가 발견하는 것은 그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던 균열들이다. 엄마의 피로, 동생의 불안, 그리고 자신의 무지. 행복은 완전했던 적이 없었고, 불행의 씨앗은 오래전부터 뿌려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기억 속에서 형우는 동생 은우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순간을 목격한다. 그때 형우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분기점이었을지 모른다. 대화가 이어졌다면, 의심이 공유되었다면, 형제 사이의 신뢰가 유지되었다면. 하지만 삶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는 변경할 수 없다. 형우가 말라가에서 경험하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기회가 아니라,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회다. 스물아홉 살의 형우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아다. 대기업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바쁘게 살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엄마의 우울, 동생의 번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는 신규 사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 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거나, 혹은 자신의 성공으로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리다이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 같다.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행위는 자살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다. 프리다이빙은 한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이다. 숨을 참는 것은 영원히 숨을 멈추기 위함이 아니라, 더 깊이 자신을 경험하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기 위함이다. 형우가 만나는 다른 자살 사별자들과의 교 류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다. 각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안다. 그 무게를, 그 어둠을, 그 끝없는 자책을. 그들이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지켜보며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장면은, 치유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라 연대의 과정이다. 치유는 망각이 아니다. 슬픔을 지우는 것도,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슬픔 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회복 호흡이다. 몸이 우리를 살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프리다이빙 강사의 말처럼, 우리의 마음도 결국 치유되도록 만들어져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 과정이 혼자서는 너무 어렵고, 때로는 함께 숨 을 참아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형우의 죄책감은 정당한가? 그가 더 잘했어야 했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은근히 드러낸다. 우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한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통계는 개인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형우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의 부재, 사 회적 지원의 부족 속에서 버텨왔다. 엄마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지쳐갔고,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나눌 곳이 없었으며, 형우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들 각자가 더 노력했어야 할까? 아니면 이 들을 둘러싼 사회가 더 많은 안전망을 제공했어야 할까? 형우가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는 완벽한 아들도, 완벽한 형도 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지만, 결국 그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책은 슬픔을 다루지만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소설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너머의 가능성을 본다. 자살 사별자라는 특수한 경험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상실의 보편성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선택, 타이밍과 관계의 산물인지를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