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AI, 실전으로 뛰어든 3년의 기록 - 공공기관 팀장이 전하는 AI 정책·기획·활용의 시간
심형섭 지음 / 프리렉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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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순간은 회의 중 누군가 "AI로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묻는 때다. 그 질문 뒤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기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진정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은 전문가니까 답을 알겠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문제는 나 역시 그 답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ChatGPT로 메일 한 번 써본 경험만으로 AI 전문가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 사람들의 모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솔직히 나도 처음 ChatGPT를 써봤을 때, 이것이면 웬만한 업무는 다 해결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깨달았다. AI는 내가 질문을 정교하게 다을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교함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그 분야를 얼마나 잘 아느냐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이런 반쪽짜리 이해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본 화려한 AI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그 회사의 데이터 인프라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어떤 조직 문화가 뒷받침되었는지는 3분짜리 영상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을 건너뛰려 한다. 마치 다이어트 전후 사진만 보고 중간의 고된 운동과 식단 조절은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말한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비유가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우리 조직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AI 전략을 수립하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그러면 실무진은 다른 회사 사례를 찾아보고, 비슷한 것을 따라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조직의 고유한 문제나 강점과는 무관한, 그저 '남들도 하니까' 하는 AI 도입이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평가 기준의 부재다. "이 AI 시스템이 제대로 작 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제대로'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정확도? 속도? 사용자 만족도? 비용 절감? 이 모든 것?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도입 후에도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AI 도입했다"는 실적만 남을 뿐이다.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정책도 수립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혼란이다. 중앙의 큰 그림과 현장의 구체적 실행 사이에 다리가 없다. 마치 지도는 있는데 길이 없는 것 같다.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내고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다.

AI 관련 업체들과 미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극명한 격차다. 어떤 업체는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업체는 PPT만 화려할 뿐, 실제 구현 능력은 의심스럽다. 더 심각한 것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기존 SI 업계의 DNA"는 정말 뼈아픈 지적이다. 혁신보다는 안정성, 도전보다는 관례. 이런 마인드로 는 진정한 AI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공공부문과 대기업은 여전히 이런 업체들을 선호한다. 왜?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일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크다. 실패했을 때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검증된(사실은 안주하는) 대형 업체를 선택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조직에서 "실험했다가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성공 사례만 공유되고, 실패는 숨겨진다. 그러니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진정한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의 개인 활용 사례였다. 3년간의 일기, 1,095개의 감사 일기, 4,000개가 넘는 옵시디언 노트. 이 방대한 기록이 있었기에 AI를 통한 심층 분석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기록되지 않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에 서 "'분석되지 않는 기록은 단순한 추억일 뿐"으로 철학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가? 업무 보고서 나 회의록은 쓰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 즉, 내 생각의 흐름, 의사결정의 배경, 실패의 교훈 등은 기록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하지만 저자의 사례를 보니 후회스럽다. 만약 내가 지난 10년간의 업무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면, AI는 내게 얼마나 귀중한 통찰을 줄 수 있었을까? 문제는 기록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도 2017년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AI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훨씬 전부터. 그는 AI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AI 분석의 자산이 되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AI는 도구일 뿐, 진짜 가치는 내가 쌓아온 데이터에서 나온다.

책 제목은 "어쩌다 AI"지만, 사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AI를 도구로만 쓸 것인가, 아니면 내 삶과 일을 확장하는 파트너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인가, 능동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나는 오늘부터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도 괜찮다. 옵시디언이든, 노션이든, 심지어 메모장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그 리고 내 분야의 고유한 맥락과 AI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려 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조차 기록하고 배우면 된다. AI 시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이다. 불완전한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AI와 함께 성장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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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의 다시 만난 음악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 2
조윤범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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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클래식 음악을 '모른다'고 생각했던게 아니라 '외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렵다는 말 뒤에 숨어,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처럼, 클래식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영화관 스크린 너머 슬픔이 밀려올 때, 카페 한구석에서 커피 향과 섞여 흐를 때, 지친 하루의 끝에서 나를 토닥이던 그 멜 로디들.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클래식과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왜 클래식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소나타 형식이 무엇인지 시험지처럼 묻는 순간,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음악은 원래 시험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장이 뛰 던 리듬이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의 언어였으며,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면 어떨까. 클래식을 '공부'하려 하지 말고, 그저 '만나보는 것이다. 한 곡 한 곡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작곡가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 마치 오랜 편지를 읽듯, 천천히 그 감정의 결을 따라가 보는 것. 그렇게 클래식과 화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음악이 선물하는 진짜 행복과 마주하게 된다. 책은 우리를 클레식의 세계로 안내 한다.


음악에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18세기 빈의 촛불 아래에서 모차르트가 펜을 들던 순간, 19세기 파리의 살롱에서 쇼팽이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던 순간, 그리고 21세기 지금 이곳에서 이어폰을 꽂고 그 곡을 듣는 우리의 순간까지. 클래식은 그렇게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고전파로 흐르고, 다시 낭만주의로 번져나가는 과정은 형식만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였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의 진화였다. 바흐의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푸가 속에는 신에 대한 경외가, 베토벤의 격정적인 교향곡 속에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가, 차이콥스키의 애절한 선율 속에는 금지된 사랑의 아픔이 녹아 있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의 조화는 인간 사회의 축소판 같다. 현악기의 따스한 울림, 목관악기의 서정적인 노래, 금관악기의 웅장한 외 침, 그리고 타악기의 명확한 리듬. 각자의 개성을 지닌 악기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숨을 맞출 때, 우리는 조화라는 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과 닮아 있다. 실내악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소수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친밀한 대화. 현악 사중주에서 첼로가 깔아주는 저음 위로 바이올린이 속삭이듯 노래할 때, 우리는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섬세한 교감을 엿듣게 된다. 그것은 마치 친구와 나누는 깊은 밤의 대화처럼, 크지 않지만 진실한 울림으로 가슴에 닿는다.

협주곡을 들을 때면 나는 종종 인생을 떠올린다. 혼자서 맞서야 할 때와 누군가와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의 균형. 독주자는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때로는 그 물결에 몸을 맡기며 더 큰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아닐까.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그러나 언제나 전체의 일부로서 살아 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오페라는 클래식의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르다. 노래와 연기, 무대미술과 의상이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창조한다. 푸치니의<라 보엠>에서 미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비제의 <카르멘>에서 열정이 비극으로 치닫을 때, 우리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사랑과 질투, 배신과 용서, 야망과 좌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이 오페라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오페레타라는 형식이다. 무겁고 진 지한 오페라와 달리, 오페레타는 유머와 풍자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삶이 늘 무거운 것만은 아니듯, 예술 역시 때로는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를 들으며 웃고, 오펜바흐의<천국과 지옥>에서 경쾌한 캉캉 을 만날 때, 우리는 클래식이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간은 건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빈의 무지크페라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이 공연장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수많은 거장들이 연주했고, 수많은 관객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벽면에 스며든 음향, 객석에 남은 박수 소리, 무대 위에 서린 연주자들의 숨결. 공연장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 이자 음악의 집이다.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식이다.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무대를 비출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정적 속에서, 첫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의 전율. 그것은 음원으로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공기의 진동이 피부로 전해지고,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에너지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관객으로서의 예의도 음악을 완성하는 일부다. 연주가 끝나기 전에는 박수를 참고, 악장 사이의 침묵을 존중하며, 연주자와 함께 숨 쉬는 시간. 이 모든 것이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클래식 공연장은 음악과 청중이 하나가 되는 신성한 공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술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받는다.

음악가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두려움과 저항을 동시에 악보에 새겼고,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교향곡으로 표현하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많은 작곡가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어떤 이들은 저항의 음악을 만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음악은 때로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더 자주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수용소에서도 음악은 연주되었고, 폭격 속에서도 콘서트는 계 속되었다.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갈구했고, 음악은 그 갈망에 응답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는 힘이다. 작곡가들이 자신의 신념을 음악에 담았을 때, 그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것을 넘어섰다. 그들은 역사를 기록했고, 저항했으며,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가 그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단지 과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돌 아보고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는 시대가 왔다. 수많은 클래식 악보를 학습한 AI는 바흐 스타일의 푸가를, 모차르트 풍의 소나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이론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음악.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음악일까? 음악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다. 베토벤이 교향곡을 쓸 때, 그는 화음의 규칙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청력을 잃어가는 고통, 사랑에 대한 갈망, 운명에 대한 분노와 승리. 그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음표로 변환되었을 때 비로소 불멸의 음악이 탄생했다. AI는 패턴을 학습할 수 있지만, 고통을 겪을 수는 없다. 사랑에 빠질 수 없고, 절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술을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 AI는 음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예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도, 그것에 감동하는 것도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수백 년 전 누군가가 남긴 감정의 메시지를 오늘 여기에서 받아보는 일. 그리고 그 메시지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고, 때로는 도전받는 일이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음악이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언어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그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은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다. 한 곡을 온전히 집중해서 들어보는 용기, 낯선 감정과 마주할 준비, 그리고 아름다움 앞에서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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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있다 - 부상한 중국을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
조창완 지음 / 에이원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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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집단적 감정 중 가장 복잡하고 뜨거운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중국에 대한 것일 게다. 거리의 현수막부터 일상적 대화까지, 우리는 서슴없이 이웃 국가를 비하하고 조롱한다. 71.5%라는 압도적인 부정 인식률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어떤 불안과 두려움의 표현이다. 조창완의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불편하다.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을 정면으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28년 전 IMF 위기 당시 우리의 공장이 되어주던 그 나라가, 이제는 고속철도 시장의 74%를 장악하고, 과학기술 대학 순위에서 2위부터 11위까지를 독식하며, 두 개의 성(省)이 한국 전체 GDP를 넘어선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변화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가? 왜 객관적 현실 대신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에 기대려 하는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문화적, 역사적 우월감을 가져왔던 우리에게, 중국의 급격한 성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차이나 콤플렉스'라는 진단은 그래서 정확하다.

광둥성 하나의 인구가 1억 2천만 명이다. 한국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는다. 그들의 지역 내 총생산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다. 장쑤성 역시 마찬가지다. 산둥성과 저장성이 바짝 뒤를 쫓고 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일개 지방행정구역이 우리나라 전체와 맞먹거나 능가한다는 의미다. 수치는 계속된다. 세계 고속철도의 4분의 3이 중국 땅을 달린다. 세계 교육기관 순위에서 서울대가 51위, 카이스트가 73위일 때, 중국의 대학들은 상위권을 휩쓴다. 이러한 데이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외면할 것인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냉정한 인식이다.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판단의 필요성이다. 반도체, 조선, 배터리 등 우리가 자랑하던 산업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위협적인 경쟁자이거나 곧 추월할 기세다. 기술은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한 가지 희망을 제시한다. 한국이라는 땅 자체가 가진 가치, 즉 농수산물과 관광산업이 그것이다. 영토의 크기로는 승부할 수 없지만, 땅의 질로는 경쟁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중국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용의 등에 타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데 열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인은 중국인을 싫어하지만, 중국인은 여전히 한국인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사드 배치와 팬데믹으로 악화된 관계 속에서도 중국 일반 대중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회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강화군 청소년과 중국 저우산시 청소년의 교류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 3일의 만남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지는 아이들. 정치와 이념, 편견을 걷어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그렇게 자연스럽다. 10만여 명의 중국 유학생과 동포들이 한국 거리의 비하 현수막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상상해보라는 저자의 촉구는 날카롭다. 매불쇼의 진행자가 했다는 말이 핵심을 찌른다. "이것은 친중이 아니라 친한이다."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중국을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태라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는 독특한 접근을 시도한다. 위화, 모옌, 류츠신 등 중국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위화의 '원청'이 보여주는 1900년 무렵 혼돈의 중국, 류츠신의 '삼체'가 던지는 우주적 상상력. 오바마 전 대통령이 백악관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한 그 소설 말이다. 문학은 때로 통계나 경제지표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프랑스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흩어진 중국인 작가들이 보여주는 국제적 감각. 그들의 문학세계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 경제 규모를 넘어선, 살아 숨 쉬는 중국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작가 한강을 외국인이 알면 우리가 반가워하듯, 중국 작가를 아는 한국인은 중국에서 환영받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문화 교류의 본질을 짚는다.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위를 유지할 미래 먹거리를 찾을 것인가? 중국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하듯, 한중이 협력할 때 양국 모두 번성했고 위기를 극복했다. 중국은 14억 인구를 가진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다. 모바일 결제에서부터 인공지능 관광산업까지, 그들은 매일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이것을 위협으로만 볼 것인가, 기회로도 볼 것인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던 나라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중국을 제대로 알자. 편견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알고리즘이 왜곡한 이미지가 아닌 실제 중국을 보자. 일대일로가 무엇인지, 톈궁 우주정거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희토류 장악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제대로 공부하자.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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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투자, 기본으로 돌아가라
아이리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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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들이 끝없이 이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건물들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꿈과 불안이 동시에 담겨 있을 것이다. 월급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저 집들을 보면서, 우리는 투자라는 이름의 도박을 시작한다. 아니, 도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절실하고, 투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막연한 그 무엇을 시작한다. 저자가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일종의 고백처럼 들렸다. 80억, 6채의 아파트라는 숫자 뒤에 감춰진 실패의 기록들. 그 공백이야말로 이 메시지의 진짜 무게가 아니었을까. 성공담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통과한 사람만이 기본의 중요성을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덜 잃는 방법'을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금리가 어디까지 오를지, 규제가 언제 풀릴지, 어느 지역이 다음 핫플레이스가 될지. 투자 카페와 유튜브는 이런 예측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측들을 모아서 마치 미래를 손에 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시장은 우리의 예측을 비웃듯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저자가 말한 '시장을 예측하려는 태도 자체를 경계하라',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들렸다. 예측하지 않고 어떻게 투자를 하란 말인가.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의 진짜 의미가 보였다. 예측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운명을 맡기게 된다. 반면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상승장에서 누구나 천재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꽂혔다. 레버리지를 끝까지 당겨서 빠르게 돈을 벌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부럽기도 했고 초조하기도 했다. 나는 왜 저렇게 과감하지 못할까.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그 과감함이 정말 실력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나도, 그리고 그들도, 그저 시장의 호황 속에서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진짜 실력은 하락장에서 드러난다. 시장이 식었을 때 살아남는 사람이 진짜 투자자다.

입지, 수요, 공급, 가격. 이 네 단어를 모르는 투자자는 없다. 나도 안다고 생각했다. 역세권이면 좋고, 학군이 있으면 좋고, 개발 호재가 있으면 좋다. 그게 입지라고 믿었다. 하지만 책은 그 믿음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드러낸다. 입지는 고정된 조건이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이라는 설명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내가 본 것이 입지가 아니라 입지의 겉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편리한 곳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곳을 보라는 말. 이것은 체크리스트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역세권이라는 라벨 뒤에 숨겨진 실제 수요를, 학군이라는 브랜드 아래에 깔린 인구 구조를 읽어야 한다. 수요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구가 많으면 수요가 많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거주 수요와 투자 수요는 다르게 움직인다. 투자 수요가 몰린 곳은 가격만 오르다가 결국 공실로 이어진다. 가격의 상승이 가치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그동안 나는 가격만 쫓아다니지 않았는가. 시세가 오르는 것만 보고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기본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저자의 경고는, 바로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기본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기본의 표면만 훑고 지나갔던 것이다.

대출은 마법처럼 보인다. 내 돈 3억으로 10억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레버리지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책은 그 반대편의 이야기를 한다. 레버리지는 상승기에는 미덕이지만 하락기에는 리스크다. 문제는 대출 자체가 아니라, 감당 가능한 범위를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 안전 마진이라는 개념이 반복해서 강조되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가격이 떨어져도, 금리가 올라도, 공실이 생겨도, 정책이 바뀌어도 버틸 수 있는 구조. 이것을 만들지 못한 투자는 시장의 작은 파도에도 무너진다. 나는 그동안 수익률만 계산했다. 매매 차익이 얼마나 나올지만 봤다. 하지만 보유 비용은 무시했고, 기회 비용은 계산하지 않았다. 1억을 투자해서 2억을 만들어도, 그 과정에서 들어간 관리비, 세금, 대출 이자를 빼고,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했을 때의 수익을 빼면 실제 수익은 생각보다 적을 수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보는 사람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는 문장이 날카롭게 다가왔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수익은 크게 보고 비용은 작게 봤다. 그리고 그것을 투자라고 불렀다.

월급만으로는 집을 살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투자해야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가슴 아픈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투자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잃을 수 없는 돈으로 하는 투자이기에, 화려한 전략보다 단단한 기본이 필요하다. 이 글을 덮으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 투자 기회가 왔을 때, 주변의 성공 사례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조급함에 떠밀려 움직이지 않겠다고. 대신 기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입지는 정말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는가. 수요는 진짜 존재하는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버리지는 얼마인가. 이 투자로 인해 내 삶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투자할 것이다. 서두르지 않겠다. 남들보다 늦어도 괜찮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목표다. 기본에 충실한 투자자로 남는 것. 그것이 책이 나에게 남긴 가장 큰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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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명언 필사 365 - 마음 챙김과 악필 교정을 동시에!
타타오(한치선)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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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 스며들 무렵,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손에 쥔 펜의 무게가 묘하게 든든하다. 디지털 기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종이 위에 펜촉이 닿는 순간, 세상이 조금 느려지는 것 같다. "당신이 하루 종일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당신의 일생을 이룬다." 오늘의 문장을 천천히 읽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읽는다.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루 종일, 생각, '일생'.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단어들이 오늘은 유독 또렷하게 다가온다. 첫 획을 긋는다. '당'자의 첫 획.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힘을 주는 강도, 펜을 떼 는 타이밍, 선의 각도.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조율되어야 한다. 평소 휘갈겨 쓰던 글씨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자체는 정직하다. 마음이 산만하면 글자도 흔들리고, 마음이 고요하면 글자도 안정된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키보드로 업무를 처리하는 일상. 손으로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언제부터 이토록 낯설어졌을까. 손글씨는 이제 생일 카드나 특별한 편지를 쓸 때나 등장하는, 희귀한 의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펜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동안, 묘한 일이 벌어진다. 손끝에서 뇌로, 뇌에서 다시 마음으로 무언가가 흐른다. 단순히 문장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 문장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눈으로만 읽을 때는 지나쳤던 의미들이, 손으로 쓰는 동안 비로소 이해된다. '하루의 가장 달콤한 시간은 동트기 전의 새벽에 있다'는 문장을 쓸 때였다. '달콤하다'는 표현이 왜 쓰였을까 생각하며 '달'자를 쓰는데, 문득 어제 새벽 4시에 잠에서 깬 적이 떠올랐다.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 고요함. 그것이 달콤함이었구나. 손으로 쓰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 쳤을 깨달음이다.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빠르게 산다는 것과 같다. 빠른 배송, 빠른 응답, 빠른 성장. 모든 것이 속도를 요구한다. 그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천천히 음미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5분. 하루 중 고작 5분이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SNS를 스크롤하는 시간보다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5분이 주는 평온함은 몇 시간 분량의 드라마나 영상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명언을 필사하는 시간은 강제적인 느림이다. 빨리 쓸 수 없다. 정자체로 반듯하게 쓰려면 한 획 한 획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타이핑하면 1분도 안 걸릴 텐데, 왜 이렇게 느리게 써야 하나.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느림이 주는 선물을 알게 되었다. 느리게 쓰는 동안, 생각도 느려진다. 빠르게 지나가던 잡념들이 정리된다. 오늘 해야 할 일, 어제 있었던 일, 내일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들이 잠 시 멈춘다. 지금 이 순간, 이 문장, 이 글자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명상이다.

나는 악필이었다. 학창 시절 필기 노트는 나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친구들은 내 글씨를 보고 "의사 될거나"며 농담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어차피 컴퓨터로 치면 되니까. 손글씨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 필사를 시작하고 나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저자가 써놓은 글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자 하나를 쓰는데도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쓰다 보니, 선이 곧아지기 시작했다. 글자 의 균형이 잡혔다. 100일쯤 지났을 때, 처음 썼던 페이지와 비교해보았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가 맞나 싶을 정 도로 달라져 있었다. 물론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가끔 삐뚤어지고, 크기가 들쭉날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즐겁다. 바른 글씨를 쓴다는 것은 글씨를 바르게 쓰려고 집중하는 그 시간이, 마음을 바르게 세우는 시간이었다. 글자가 반듯해지면서 마음도 반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책에는 365개의 명언이 실려 있다. 1년, 매일 하나씩이다. 어떤 날은 공자의 말씀이고, 어떤 날은 인디언 속담이고, 어떤 날은 이름 없는 현자의 지혜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행복은 나비와 같아서 쫓으면 도망가지만, 가만히 있으면 다가와 앉는다." 문장을 쓰는 날, 나는 최근 몇 달 간 얼마나 많은 것을 쫓아다녔는지 깨달았다. 성공, 인정, 성취. 그것들을 붙잡으려 애쓰느라 정작 곁에 있는 작 은 행복들을 놓쳤다. 필사하며 새긴 이 문장은, 그날 하루를 다르게 살게 만들었다. 명언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필사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눈으로만 읽으면 좋은 말이네"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다 보면,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질문을 만든다. '이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 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의지로 시작했다. '매일 5분씩 필사하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달력에 체크 표시를 했다. 놓치는 날도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다시 시작했다. 하루 이틀 놓쳐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책상에 앉아 펜을 든다. 이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필사를 하지 않으면 하루가 어딘가 허전하다. 석 달쯤 지나자, 습관이 아니라 필요가 되었다. 이 시간이 없으면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마치 아침 세수나 양치질 처럼, 필사는 나의 하루를 여는 의식이 되었다. 작은 루틴이 만드는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365일이 지나고 돌아보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 차분하고, 더 성찰적이고, 더 중심이 잡힌 사람으로. 필사는 결국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SNS의 알림을 무시하고, 오로지 나와 마주한다. 펜을 쥔 나, 종이를 응시하는 나,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쓰는 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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