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다이어리 - 오늘 당신은 어떤 미래를 살았는가?
스티븐 바틀렛 지음, 손백희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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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에 대한 조언은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일시적이고 상황적인 전략에 머물러 있다. 스티븐 바틀렛의<CEO의 다이어리>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보편적 성공 원리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 법칙은 지금도 맞고, 100년 후에도 맞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심리학과 과학 연구, 그리고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한 검증을 통해 33가지 법칙을 체계화했다. 책의 독특함은 복잡한 이론보다는 실천 가능한 원칙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책 구상 시 다섯 가지 핵심 신념을 전제했는데, 그 중에서도 "책 대다수가 필요 이상으로 길고 복잡하다"는 문제의식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탄생한 33가지 법칙은 개인의 내적 성장부터 팀 리더십까지, 성공의 모든 영역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저자가 제시하는 성공의 구조는 네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기둥인 '자아'는 모든 성공의 출발점이 되는 개인적 토대를 다루고, 두 번째 기둥인 '스토리'는 자신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세 번째 기둥인 '철학'은 일관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관과 원칙을 다루며, 마지막 기둥인 '팀'은 혼자서는 불가능한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협력의 원리를 제시한다.

첫 번째 기둥인 '자기자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올바른 순서다. 저자는 "다섯 개의 버킷을 올바른 순서로 채워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개인 성장에도 명확한 우선순위와 단계가 있다는 의미다. 마치 건물을 지을 때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하는 것처럼, 개인의 발전도 건강, 학습, 관계, 성취, 기여의 순서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언가를 완전히 익히려면 가르칠 의무를 만들어야 한다"는 법칙은 학습의 본질을 꿰뚫는다. 아는 것과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가르치는 행위는 자신의 지식을 체계화하고,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며, 더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개인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흔한 실수 중 하나는 상대방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저자는 "무턱대고 반대부터 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통점을 찾아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인 소통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득과 협력을 위한 전략적 접근이다. 자아 영역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그냥 말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원칙이다. 행동을 유도할 때 명령이나 요청보다는 질문이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할 수 있어?"보다는 "할 거야?"라고 묻는 것이 상대방의 책임감과 행동 의지를 더 강하게 자극한다. 이는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둥은 자기서사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나 조직의 성공은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독특한 인상을 남기는 능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저자는 "쓸모없는 황당함이 쓸모 있는 실용성보다 당신을 더 규정한다"고 말하며, 완벽하고 실용적인 것보다 독특하고 기억에 남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다. 이는 현대 마케팅과 개인 브랜딩의 핵심을 짚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와 자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것들은 쉽게 잊혀진다. 반면 조금 엉뚱하거나 예상 밖이지만 진정성 있는 요소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오래 기억된다. 저자는 또한 "배경화면이 되지 말라"고 조언한다. 1995년부터 진행한 언론 광고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혁명적'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남발되어 의미를 잃었는지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까지 정치적 맥락에서만 드물게 사용되던 이 단어가 1970년대 중반부터 가구, 전자제품, 심지어 초콜릿까지 모든 제품에 붙기 시작했고, 결국 그 효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는 차별화의 중요성과 동시에 진정성 있는 차별화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법칙은 강력한 브랜딩의 핵심을 담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는 시도는 결국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강한 마케팅은 의견과 반응, 감정을 요구한다. 사랑받거나 미움받더라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무관심보다 낫다. 특히 현대인의 짧아진 집중력을 고려할 때, "5초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원칙은 매우 실용적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도 이 원칙을 적용하여 모든 법칙의 서두에 5초 안에 읽을 수 있는 짧은 문구를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독자의 관심을 끌고 해당 법칙을 읽을 확률을 최소 25퍼센트 증가시킨다는 것이 저자의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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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바틀렛의 의 다이어리 > 가 제시하는 33 가지 법칙의 가장 큰 가치는 그 통합성과 실용성에 있다 . 이 법칙들은 개별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 함께 적용될 때 진정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 자아에서 시작하여 스토리로 확장하고 , 철학으로 깊이를 더하며 , 팀을 통해 완성되는 이 구조는 성공의 전체적 그림을 제시한다 .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법칙들이 성공 기법만이 아니라 삶의 원리라는 것이다 .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 이 법칙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지금도 맞고 , 100 년 후에도 맞을 것 " 이다 . 이는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변해도 인간의 본질적 욕구와 행동 패턴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현대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 어제의 성공 공식이 오늘에는 통하지 않을 수 있고 , 오늘의 혁신이 내일에는 낡은 것이 될 수 있다 .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지속적인 학습과 적응이 필수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책의 마지막 법칙인 " 학습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 의 의미다 . 하지만 동시에 이 33 가지 법칙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 올바른 원칙들을 내재화하고 일관되게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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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본색 - 가려진 진실, 드러난 욕망
양상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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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언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확인하고, 출근길에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속보를 받아보며, 저녁 시간대 메인 뉴스를 시청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언론이 전하는 정보를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마치 언론이 객관적 진실의 전달자이자, 권력을 견제하는 공정한 심판관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과연 정당한가? 디지털 시대를 맞아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그 한계와 모순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짜뉴스의 확산, 편향된 보도, 상업적 이익에 따른 진실의 왜곡 등 언론을 둘러싼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진정한 언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언론인들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신속성과 정확성 사이의 선택이다. 24시간 뉴스 사이클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언론사들은 경쟁사보다 한 발 빠른 보도를 위해 검증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언론의 태생적 한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완벽한 검증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언론사가 먼저 보도하면 특종의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언론이 자신들의 보도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단언하는 언론의 어조는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보이는 신중함과는 대조적이다. 학계에서는 연구의 한계를 명시하고, 추가 검증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론에서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단정적인 표현을 선호한다. 진정한 언론이라면 이러한 딜레마를 인정하고, 보도의 신뢰도를 솔직하게 제시해야 한다. 확인된 사실과 추정, 의견을 명확히 구분하고, 정보의 출처와 검증 정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독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책임이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이는 철학에서부터 과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탐구해온 근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언론이 다루는 진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사건과 현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 진실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완전히 객관적인 보도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 언론학의 중요한 인식이다. 문제는 언론이 이러한 진실의 다면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의 구성, 제목의 선택, 사진의 배치, 편집의 방향 등 모든 과정에서 특정한 관점이 개입되며, 이는 불가피하게 어떤 측면은 부각시키고 다른 측면은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많은 언론사들이 이러한 선택의 과정을 은폐하고, 마치 자신들의 보도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실인 것처럼 포장한다. 진정한 언론은 자신들이 전하는 정보가 진실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서 전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솔직히 고백하고, 가능한 한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와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 언론의 진정한 역할이다.

진실은 시의성을 갖는다. 아무리 정확한 진실이라도 때를 놓치면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언론이 진실을 제때 보도하지 못해 발생한 비극적 사건들이 적지 않다. 전쟁, 정치적 음모, 사회적 불의 등 중요한 사안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보도되다가 뒤늦게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 후였다. 이는 언론의 속도 경쟁이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을 보여준다. 충분한 검증 없이 성급하게 보도하는 것도 문제지만, 권력의 압력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늑장 보도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외면할 때,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다. 진정한 언론은 권력이나 자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시민들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적시에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공익을 우선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진정한 언론의 모습을 그려보면, 그것은 완벽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언론이다. 절대적 진실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언론이다. 권력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감시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언론이다. 이러한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과 함께 언론인 개인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저널리즘의 기본 윤리를 재확립하고, 공익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동시에 시민들도 언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참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언론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장기적 과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진정한 언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언론이 다시 시민의 편에 서서, 진실을 향한 여정에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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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양정무의 명작 읽기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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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이 동굴 벽면을 비추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울퉁불퉁한 암벽에 그려진 들소와 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의 구석기인들이 경험했던 그 전율은 현대 우리가 디지털 아트 전시장에서 느끼는 몰입감과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 오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이 예술 앞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지와 물질이 만나 빚어내는 신비로운 경험, 그것이 바로 미술의 시작이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 순간,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이끌리는 그 떨림 말이다. 인류의 유산인 예술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경외와 힐링을 생각해 본다. ^.^ 이번에 미술 사학사로 잘 알려진 양정무교수의 명작읽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경주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석굴암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본존불의 완벽한 얼굴과 대조되는 거칠게 마감된 뒷모습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완성되지 못한 부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손길을 거쳐 온 흔적들, 보수의 역사가 새겨진 상처들이 이 공간을 더욱 숭고하게 만든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미켈란젤로의 거친 붓질과 수정의 흔적들이 완벽한 기법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을 꺾고 위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화가의 고통스러운 몸짓이 느껴진다. 신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그 절묘한 거리감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열망이 동시에 읽힌다.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작은 뗏목 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그린 제리코의 작품 앞에 서면 숨이 막힌다. 메두사호의 조난 사건을 다룬 이 그림은 아름답지 않다. 죽음과 절망, 인간의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구조선을 향해 손을 뻗는 한 사람의 몸짓이 모든 것을 뒤바꾼다. 진정한 명작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지 않는다.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발견하게 한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의 빛은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명작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일상의 논리를 벗어난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울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이 밀려온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경외감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엿보는 순간이다. 이런 경험은 종교적 체험과 비슷하다. 실제로 많은 명작들이 신성한 공간에서 탄생했거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꼭 종교적이지 않더라도 진정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평범한 일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그래서 예술 감상은 영혼의 정화, 정신의 승화를 가능하게 한다. 완벽함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딘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에서 더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석굴암 본존불의 거친 뒷모습, 미켈란젤로 천장화의 수정 흔적들, 모네 만년작의 흐릿한 윤곽들이 그렇다. 이런 미완성의 아름다움은 인간적이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실수와 시행착오, 망설임과 번민의 흔적들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차가운 완벽함보다 따뜻한 불완전함에 더 깊이 공감한다. 명작을 마주하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꿈과 절망,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발견한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서 바라본 연못의 모습은 어땠을까.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려낸 수련들이 캔버스 위에서 꿈틀거린다. 형태는 흐려졌지만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늙은 화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젊은 시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름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탄생시켰다. 시간은 명작들에게 가혹하다. 색채는 바래고, 균열이 생기며, 때로는 훼손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상처들이 작품에 새로운 서사를 더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흔적들이 오히려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다. 명작은 완성된 순간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계속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간다. 1980년 백남준이 남긴 한 줄의 예언이 떠오른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다." 당시에는 허황된 소리로 들렸을 그 말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K-팝, K-드라마, 웹툰까지, 영상 문화의 중심에 한국이 서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앞서 보는 예언자다. 김환기가 캔버스에 뿌린 무수한 점들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명상이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미래 문명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넘어 훨씬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명작들은 태어날 때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스티나 성당의 나신 그림들은 불경하다며 비난받았고, 결국 옷을 입히는 수모를 당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는 너무 충격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미완성이라며 조롱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가가 드러났다. 당대의 편견과 관습에 맞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작품들이 결국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진정한 명작은 안전한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긴장과 갈등 속에서 예술의 진보가 이루어진다. 미술의 힘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인 물질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화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환상이 캔버스 위의 물감이 되고, 조각가의 상상이 차가운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변환의 순간에 마법이 일어난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 물질성의 힘은 여전하다. 백남준의 모니터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 그 차가운 기계들이 모여 이루는 따뜻한 조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여전히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재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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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PT 공식문제집 N1 ver2.0 - 청해 실전용+복습용 MP3, 청해 받아쓰기 워크북 JLPT 공식문제집
국제교류기금.일본국제교육지원협회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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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상 위에 놓인 JLPT N1 문제집을 바라보며, 나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았다. JLPT 시험 준비로 나는 마치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처럼, 나는 지금 일본어라는 거대한 언어의 산 앞에 서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이 떨린다. ^.^ 실제 기출문제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고, 갑자기 현실이 다가온다. 이 문제들은 이미 수많은 도전자들을 시험대에 올렸고, 어떤 이는 통과했고 어떤 이는 좌절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이 될까?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며 느끼는 것은 겸손함이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어 실력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문법 문제 앞에서 머뭇거리고, 독해 지문을 읽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내 모습이 초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하다. 해설을 읽으며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들이 내 무지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다. 오답의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나는 내 사고의 허점들을 발견한다. 이것이 성장이라는 이름의 아픔인가. MP3 파일을 재생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간다. 일본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나는 마치 도쿄의 어느 골목길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문장의 절반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단어들이 뒤섞여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실제 시험과 동일한 속도의 음성은 나에게 정확한 현실 인식을 선사한다. 이것이 내가 넘어야 할 산의 높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사장 버전이라는, 실제 시험장의 소음까지 담은 음원을 들으며 나는 전율한다. 연필 소리,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누군가의 작은 기침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현실감을 더해준다. 배속 버전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어가 기관총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절망적인 순간이 나에게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저 속도에도 적응할 수 있다면, 실제 시험은 한결 수월하게 느껴질 것이다.

청해 받아쓰기 노트를 처음 펼쳤을 때, 하얀 페이지가 마치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문장을 받아쓰며 깨달은 것은, 내가 평소에 얼마나 대충 듣고 있었는지였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하며 적어내려가는 과정에서 나는 일본어의 미묘한 뉘앙스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빈 공간이 더 많았던 노트가 점차 검은 글씨로 채워져 간다. 잘못 들었던 부분을 빨간 펜으로 수정하고, 새로 배운 표현들을 파란 펜으로 표시하며, 나만의 학습 기록이 쌓여간다. 반복해서 듣던 문장이 어느 순간 완벽하게 들리는 그 순간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명확한 이정표를 발견한 기분이다. 그 작은 승리의 순간들이 모여 큰 자신감을 만들어낸다.

​추가로 제공된 청해 워크북을 펼치며, 나는 마치 보물 지도를 발견한 탐험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체계적으로 구성된 연습 문제들이 내 약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단계별로 실력을 쌓아갈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해준다. 매일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워크북을 펼치는 것이 나의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조용한 새벽 시간, 집중력이 가장 높은 그 시간에 일본어와 마주하는 것은 마치 명상과도 같다. 문제를 풀고, 틀리고, 다시 도전하는 과정에서 나는 점진적인 발전을 체감한다. 시원스쿨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버전의 음원을 다운로드받으며, 나는 마치 무기고에서 최고의 장비를 선택하는 전사 같은 기분이었다. 일반 버전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고사장 버전으로 실전 감각을 키우고, 배속 버전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을 하는 이 과정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지 감탄할 뿐이다. 지하철에서, 산책하며, 잠들기 전까지 나의 이어폰에서는 끊임없이 일본어가 흘러나온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지만, 그 소리들이 점차 친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새로운 언어적 DNA가 내 안에서 생성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물론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의고사에서 참담한 점수를 받고 한동안 책을 덮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은 정체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기출문제로 돌아갔다. 실제 시험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며 방향을 재정립했다. 해설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일본어 학습에는 왕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실력 향상의 길이다. 빈출 어휘들을 외우고, 문법 패턴을 익히고, 청해 실력을 기르는 이 모든 과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몇 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달라진 것들이 있다. 일본어 뉴스를 들을 때 예전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 드라마를 볼 때도 자막에 의존하는 정도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일본어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문제를 틀렸을 때도 예전처럼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이것도 배움의 기회구나" 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답 해설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의 변화야말로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일이다. JLPT N1이라는 문고리를 돌리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나 자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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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혀 - 황교익의 본격 정치 시식기
황교익 지음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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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녁 식탁에 앉아 "오늘 뭐 먹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작은 정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한다.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 투표와 닮았다는 황교익의 통찰은 깊은 울림을 준다.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선택의 순간, 그 작은 결정들이 모여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고, 나아가 한 나라의 권력자가 되었을 때는 국가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언론의 취재만을 통해서 청와대 회담 테이블 위의 한우갈비와 비빔밥, 판문점에서 나누어 먹은 냉면 한 그릇. 이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 음식들은 시대정신과 외교적 메시지가 담긴 상징이었다. 권력자의 혀끝에서 시작된 선택이 어떻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놀랍도록 흥미롭다. 흥미로운 책이다 <대통령의 혀>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혼밥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권력이란 혼자서는 행사할 수 없는 것이고, 소통과 설득의 과정에서 비로소 그 정당성을 얻는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가 혼자 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상징성을 갖는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도 누구와 의논하지 않고, 누구의 조언도 구하지 않은 채 홀로 식사를 하는 지도자. 그 모습에서 우리는 소통 부재의 참혹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연대 행위인데, 그마저 거부한 권력자가 어떻게 국민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었을까. 혼밥의 정치학은 현재진행형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고, 그 시작은 언제나 함께하는 식탁에서 시작된다. 권력자가 혼자 먹는 밥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4월에 수박이 나온 이기붕의 집. 이 한 문장이 담고 있는 시대의 분노와 절망을 생각해본다. 계절을 거스르는 사치, 그것은 부의 과시가 아니라 민심과 동떨어진 권력의 오만을 상징했다. 권력자의 식탁이 일반 국민의 현실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반면 김영삼의 칼국수는 어떨까. 조선시대 반가의 격조 있는 음식이었던 칼국수가 서민 음식의 대표로 자리 잡은 시점과 그의 정치 여정이 겹친다. 품격을 갖추되 서민적인 음식, 그것은 그가 추구했던 정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음식의 계급성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은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노무현의 라면은 또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공군1호기라는 권위적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라면 한 그릇. 하지만 그 부조화가 오히려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권력의 공간을 비트는 서민적 음식, 그 안에서 우리는 진짜 인간 노무현을 발견한다.

음식만큼 강력한 외교적 도구가 또 있을까. 독도새우 메뉴에 발끈하는 일본의 반응을 보면, 음식이 정치적 메시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새우 한 마리가 담고 있는 영토 주권의 의지, 그것을 읽어내는 외교관들의 예민함이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판문점 냉면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단 70년의 세월을 견뎌온 한민족의 음식이 다시 한반도에서 함께 나누어 먹어지는 순간. 냉면 그 자체가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메시지였다는 해석이 깊은 울림을 준다.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세계 어디에서든 한민족이 있는 곳에는 냉면이 있다. 그 냉면을 남과 북의 정상이 함께 먹는 모습에서 우리는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감동도 잠시, 현실은 다시 냉혹해졌다. 음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진정성은 그것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의 진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1972년 이전의 음식은 배고파서 먹는 것이고, 1987년 이후의 음식은 즐기기 위해 먹는 것이라는 구분이 흥미롭다. 정치인 먹방의 시작점을 1987년으로 보는 시각도 날카롭다. 민주화 이후 정치인들이 시장을 누비며 서민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이 일종의 의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 먹방들을 지켜보며 느끼는 어색함은 무엇일까. 진정성의 문제일 것이다. 선거철에만 나타나는 일회성 퍼포먼스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서민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소통의 한 방식인지를 국민들은 예리하게 구분해낸다. 김대중을 '정치 먹방의 원조'라고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의 먹방에는 계산된 전략보다는 자연스러운 친화력이 있었다. 음식을 매개로 한 소통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반면 어떤 정치인들의 먹방은 왜 그리 어색해 보이는 걸까. 아마도 음식 너머의 진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음식에서 '왕의 냄새'를 맡았다는 표현이 충격적이다. 국가권력을 자기 것으로 착각한 대통령들의 음식에서 나는 그 냄새. 반면 공화국의 선출된 공무원이고자 했던 대통령의 음식에서는 보통 인간이 먹는 음식 냄새가 났다고 한다. 권력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왕은 신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이 왕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화국의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공복이어야 한다. 그 차이가 식탁 위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식탁이 국민들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그들이 누구를 위해 밥을 먹고 있는지는 결국 그들의 정치 철학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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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다음 대통령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그의 식탁에는 누가 함께 앉을까. 그가 즐겨 찾는 식당은 어디일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의 음식에서 왕의 냄새가 날까, 아니면 평범한 인간의 냄새가 날까. 대통령의 혀는 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들이 선택하는 음식, 그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방식, 그들이 음식에 담는 메시지는 모두 정치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력자의 식탁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음식이 정치이고 정치가 음식이라는 명제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내 앞의 밥그릇이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이 굶지 않고,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함께 나누어 먹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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