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양정무의 명작 읽기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이 동굴 벽면을 비추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울퉁불퉁한 암벽에 그려진 들소와 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의 구석기인들이 경험했던 그 전율은 현대 우리가 디지털 아트 전시장에서 느끼는 몰입감과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 오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이 예술 앞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미지와 물질이 만나 빚어내는 신비로운 경험, 그것이 바로 미술의 시작이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초월적 순간,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이끌리는 그 떨림 말이다. 인류의 유산인 예술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경외와 힐링을 생각해 본다. ^.^ 이번에 미술 사학사로 잘 알려진 양정무교수의 명작읽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경주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석굴암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본존불의 완벽한 얼굴과 대조되는 거칠게 마감된 뒷모습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완성되지 못한 부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손길을 거쳐 온 흔적들, 보수의 역사가 새겨진 상처들이 이 공간을 더욱 숭고하게 만든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미켈란젤로의 거친 붓질과 수정의 흔적들이 완벽한 기법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을 꺾고 위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화가의 고통스러운 몸짓이 느껴진다. 신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그 절묘한 거리감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열망이 동시에 읽힌다.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작은 뗏목 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그린 제리코의 작품 앞에 서면 숨이 막힌다. 메두사호의 조난 사건을 다룬 이 그림은 아름답지 않다. 죽음과 절망, 인간의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구조선을 향해 손을 뻗는 한 사람의 몸짓이 모든 것을 뒤바꾼다. 진정한 명작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지 않는다.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발견하게 한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의 빛은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명작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일상의 논리를 벗어난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울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이 밀려온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경외감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엿보는 순간이다. 이런 경험은 종교적 체험과 비슷하다. 실제로 많은 명작들이 신성한 공간에서 탄생했거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꼭 종교적이지 않더라도 진정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평범한 일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그래서 예술 감상은 영혼의 정화, 정신의 승화를 가능하게 한다. 완벽함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딘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에서 더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석굴암 본존불의 거친 뒷모습, 미켈란젤로 천장화의 수정 흔적들, 모네 만년작의 흐릿한 윤곽들이 그렇다. 이런 미완성의 아름다움은 인간적이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실수와 시행착오, 망설임과 번민의 흔적들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차가운 완벽함보다 따뜻한 불완전함에 더 깊이 공감한다. 명작을 마주하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꿈과 절망,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발견한다.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서 바라본 연못의 모습은 어땠을까.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려낸 수련들이 캔버스 위에서 꿈틀거린다. 형태는 흐려졌지만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늙은 화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젊은 시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름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탄생시켰다. 시간은 명작들에게 가혹하다. 색채는 바래고, 균열이 생기며, 때로는 훼손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상처들이 작품에 새로운 서사를 더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흔적들이 오히려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다. 명작은 완성된 순간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계속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간다. 1980년 백남준이 남긴 한 줄의 예언이 떠오른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다." 당시에는 허황된 소리로 들렸을 그 말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K-팝, K-드라마, 웹툰까지, 영상 문화의 중심에 한국이 서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앞서 보는 예언자다. 김환기가 캔버스에 뿌린 무수한 점들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명상이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미래 문명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넘어 훨씬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명작들은 태어날 때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스티나 성당의 나신 그림들은 불경하다며 비난받았고, 결국 옷을 입히는 수모를 당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는 너무 충격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미완성이라며 조롱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가가 드러났다. 당대의 편견과 관습에 맞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작품들이 결국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진정한 명작은 안전한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긴장과 갈등 속에서 예술의 진보가 이루어진다. 미술의 힘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인 물질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화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환상이 캔버스 위의 물감이 되고, 조각가의 상상이 차가운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변환의 순간에 마법이 일어난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 물질성의 힘은 여전하다. 백남준의 모니터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 그 차가운 기계들이 모여 이루는 따뜻한 조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여전히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재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