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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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고통 위에 내가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구조라는 이름으로 작동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불의라고 부르지 않고 '당연한 질서'라고 부른다. 나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일부러 짓밟으려 하지 않았고, 혐오를 입에 달고 살지도 않았으며, 약자를 조롱하는 커뮤니티 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쾌감을 느끼는 부류와 나는 다르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이, 사실은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선언 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진지하게 마주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처음 든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어딘가 나를 겨누는 것 같은 느낌. '남자라서 잘못이냐'는 방어 본능이 먼저 일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조금만 더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불편함이란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 때 생기는 감각이고, 익숙한 것이 흔들린다는 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강한 남자'라는 신화를 팔아왔다. 그리고 그 신화는 남자들에게도 잔인했다. 울지 말 것, 약하게 보이지 말 것, 감정을 드러내지 말 것, 책임을 질 것, 부양할 것. 남성성이라는 이름의 감옥은 실제로 존재했고, 그 안에 갇힌 남성들의 고통도 실재한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 고통의 출구를 잘못된 방향에서 찾을 때, 비극이 시작된다. 자신이 힘든 이유를 '여성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서'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 믿음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또 다른 누군가를 짓밟는 것으로 끝난다. 문제를 만든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그 구 조 안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누리던 자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구닥다리'라는 말이 흘러다닌다. 이미 여성들의 지위가 충분히 높아졌다는 뉘앙스를 품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묻고 싶어진다. 어디서 보셨나요. 데이트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들의 뉴스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직장에서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임신을 숨기는 여성들이 여전히 있고,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상이 박살나는 것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이 현실을 '이미 충분히 나아졌다'는 말로 덮어버리는 건, 현실을 보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문제가 단지 '나쁜 남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젠더폭력은 개인의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성을 특정 방식으로 대상화하는 것이 유머가 되고 밈이 되고 문화가 되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무감각하게 자란 감각들,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가장 오래 붙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는가? 회의실에서 자연스럽게 발언권을 가졌던 것, 밤길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걸었던 것, 능력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성별이 단서로 붙지 않았던 것들. 이것들이 모두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아니, 알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직하다. '착한 남자'라는 정체성은 종종 성찰을 막는 방어막이 된다.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으니까, 나는 차별하지 않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이 논리는 ‘그렇다면 나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결론으로 쉽게 이어진다. 하지만 구조적 불평등은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만의 작품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 불편하지만 괜찮은 척하는 사람들, 알고 있지만 나서지 않는 사람들의 침묵이 함께 만든 것이다. 그 침묵의 공모자였던 순간들을 기억해 본다. 모른 척했던 농담들, 흘려들었던 불편한 발언들, 신경 쓰지 않았던 관행들. 그것이 부끄럽 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평등이 왜 남성에게도 해방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가부장제는 여성만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답지 않은' 남성도 억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 남성도 억압하고,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살고 싶은 남성도 억압한다. 강함만을 허용하는 구조는 그 강함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사람을 주변부로 밀어낸다. 그 기준 안에 완벽히 들어맞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그래서 모두가 조금씩 자신을 속이며 살아간다.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 억압적인 기준 자체를 부수는 일이다. 눈물을 흘려도 괜찮고, 약해도 괜찮고, 돌봄의 역할을 맡아도 괜찮고, 누군가에게 기대도 괜찮은 세상. 그것이 여성에게만 좋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경쟁하지 않고 나란히 설 수 있는 세상을 바래본다. 누가 더 아프냐고 다투지 않고, 각자의 고통을 인정하며, 그 고통을 만든 구조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불편함을 기꺼이 마주하는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 아주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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