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간다 옛날옛적에 1
김용철 그림, 권정생 글 / 국민서관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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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꿈의 행복한 구현 <훨훨 간다>

초가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내 좋은 사람과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가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행복하겠소...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네처럼 딱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해지고 구체화되고 있는 내 오랜 꿈이다. 너도나도 세상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게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바삐 움직일 때에도 난 그리 치열하게 살아내질 못했다. 턱없이 부족한 능력 탓도 있지만 그 야심찬 행보가 내겐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가 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꿈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살고 싶은 거다. 지금 당장 못 이룰 꿈도 아닐 만큼 소박한 꿈이지만 먹고 살 일이며 아이의 교육이며 당장 발목을 잡아당기는 극히 현실적인 이유들에 묶여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권정생 선생님의 그림책 중에서 <훨훨 간다>와 <오소리네 집 꽃밭>은 내 소박한 꿈의 예쁜 구현이다. 회오리바람에 날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학교 화단의 꽃이 부러워서 남편을 다그쳐 꽃밭을 만들자고 하는 오소리 아줌마와 그 변덕을 군소리 없이 다 받아주는 오소리 아저씨의 행복한 웃음이 퍼지는 잿골 이야기 <오소리네 집 꽃밭>과 산골 외딴집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 <훨훨 간다>는 어쩌면 사계절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그 배경이 내가 그리던 곳이라서 부럽다기보다는 욕심 없이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가 내심 부러워서일 것이다. 

 

산골 외딴집...할아버지는 밭에 나가 일하고 할머니는 집에서 길쌈을 하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흠이 있다면 말수 적은 할아버지 때문에 긴긴 산골의 밤이 심심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꾀를 낸 할머니는 정성껏 짠 무명 한 필을 내밀며 장에 가서 이야기 한 자리하고 바꿔오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을 한다. 순순히 떠밀려 장에 나온 할아버지의 흥정은 놀림감이 되는 것 말고는 별 소득이 없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자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농부 빨간코 아저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할머니 볼 면목이 없게 생겼을 것이다. 이야기 한 자리를 무명 한 필과 바꿔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할아버지와 하루 종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소박한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할아버지가 빨간코 아저씨에게서 사온 이야기는 결국 배고파 몰래 숨어든 도둑 아저씨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지만 문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행복한 웃음은 신골의 밤을 행복하게 적신다.

‘훨훨 온다’ ‘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예끼 이놈!’ 하면서 폴짝거리며 흉내 내기 바쁘던 아이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과자를 먹을 때도 ‘콕 집어먹는다’하며 깔깔대곤 했었다. 정겹고 흥이 나는 우리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 맛도 일품인 그림책이다. 논바닥에 날아와 앉은 황새의 모습을 흉내 내는 빨간코 농부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화려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하는 어떤 이야기보다도 흥겨워진다. 장에 간 할아버지가 가져올 이야기 한 자리 기다리던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정성껏 짠 할머니의 무명 한 필이 결코 아깝지 않을 이야기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내게 아이가 생기면서부터다. 소박하고 따스한 이야기로 긴 여운이 남는 감동을 주는 선생님의 글에 단박에 반해버렸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 담담한 감동이 주는 맛은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여러 가지 맛을 두루 섭렵한 미각이 뒤늦게 그 밋밋하던 맛이 진국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할까. 몇 년 동안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웬만큼 독특해서는, 웬만큼 신선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럴 즈음 권정생 선생님의 글들이 주는 진정한 맛을 깨닫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찾아서 이야기책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데이고 혹사당한 미각을 편안하게 달래줄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위시한 내 책장의 붙박이 터줏대감들을 믿기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해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음에도 안동에 5평 남짓한 오두막이 전부였던 선생님. 돌아가시며 인세 또한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하셨다 한다. 평생을 소박하게 사셨던 분이셨지만 이야기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정겹게 살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다행히도 나는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남편이 있어 훗날 산골 생활에서 이야기 한자리와 바꿀 무명 짜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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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크노프는 어떻게 햇빛섬에 왔을까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미하엘 엔데 원작, 베아테 될링 엮음, 마티아스 베버 그림, 황문정 옮김 / 소년한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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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난 후부터 그의 작품들을 죄다 훑고 있다.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 『모모』도 뒤늦게 읽고, 단편집들도 읽고, 그림책들도 미하엘 엔데라는 이름만으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내용을 제목만 다르게 출판한 것도 있었고 장편 동화의 에피소드들을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작품들도 있어서 재차 읽은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 읽었다는 얘기다. 원래 책을 고를 때 원작에 충실하고 한 작가의 작품 목록을 꼼꼼하게 살펴서 완벽한 리스트를 손에 쥐고 덤비는 편인데 미하엘 엔데에 관해서는 서둘러 만나보고 싶은 조급함에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조차 없어서 생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평소의 나는 원작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인 작품들을 유아의 눈높이에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훼손해서 재구성한 책들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는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로 읽어야지 다이제스트나 어린이 논술대비 혹은 어떤 의로도 재구성한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는 이미 셰익스피어나 카프카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원작이 버겁고 어렵더라도 그대로 부딪쳐 봐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 아이에게도 어정쩡한 이런 책들을 읽히지 않으리라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미하엘 엔데라는 이름만으로 반가운 마음에 집어든 그림책들 중에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있었는데 모르고 덥석 아이에게 안겼던 거다. 이 그림책 『짐 크노프는 어떻게 햇빛섬에 왔을까』와 함께 읽은 『모험을 떠나는 짐 크노프』는 미하엘 엔데의 첫 작품인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라는 장편 동화 속 에피소드를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신기하게도 까칠하던 내 기준이 미하엘 엔데의 그림책 앞에서는 무너져 버렸다. 미하엘 엔데의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그림책이라는 분야에서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을 거라는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 거다. 속편까지 합치면 800쪽 정도 되는 장편동화를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읽으라고 들이밀 수는 없지 않은가...하면서 말이다.^^ 
 

우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매력적인 섬 햇빛섬에 대한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이 섬은 워낙 작아서 거주인이라고 해봐야 4명과 기관차 엠마가 전부다. 이 섬에 한 아이가 소포로 배달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짐 크노프’다. 섬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햇빛섬에 한 대밖에 없는 기관차 엠마를 모는 기관사 루카스 아저씨, 조상 중에 가는귀가 먹어서 자꾸 “뭐요?”하고 되묻는 사람이 있어서 대대로 붙여진 이름 뭐요 아줌마, 매일 중절모를 쓰고 우산을 팔에 걸고 햇빛섬을 산책하는 옷소매 아저씨, 12시 15분전에 태어나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햇빛섬을 다스리는 왕이 전부다.

이 작은 섬에 ‘옛날 길 133번지에 사는 어금니 부인’ 앞으로 소포가 배달되어 온다. 햇빛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옷소매 아저씨와 뭐요 아줌마 루카스 아저씨는 엠마를 타고 햇빛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어금니 부인을 외쳐 부르지만 소포의 주인이 나타날 리가 없다.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에게 고민 해결을 부탁하고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은 평소처럼 황금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한 끝에 결론을 내린다. 이 섬에 부인이라고는 뭐요 부인밖에 없으니 이 소포를 뭐요 부인이 뜯어보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모두 모여 소포를 뜯어보는데 여러 겹의 상자들을 풀어 보니 그 안에서 작은 사내아이가 나왔다. 햇빛섬은 새 주민 ‘짐 크노프’를 맞이한 것이다. 루카스 아저씨는 아이를 소포에 싸서 보낸 사람에게 분개하고 뭐요 아줌마는 짐 크노프를 사랑으로 키운다. 훗날 짐 크노프가 자라면서 햇빛섬이 비좁다는 이유로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은 기관차 엠마를 섬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루카스 아저씨와 짐 크노프는 엠마를 타고 모험을 떠나게 되는 얘기들이 기다리고 있다.(「모험을 떠나는 짐 크노프」참조) 물론 장편 동화 속에서는 의문의 ‘어금니 부인’의 정체도 밝혀진다.^^

장편 동화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의 부스러기 정도 되는 에피소드를 엮은 그림책이라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미하엘 엔데의 환상의 세계를 아이에게 일찍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을 이 그림책들이 해결해준다. 몇 년쯤 후가 되겠지만 이 그림책을 읽고 자란 아이가 원작인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아저씨」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미리 상상만 해도 슬쩍 미소가 피어난다. 그리고 ‘기관차 대여행’은 미하엘 엔데의 첫 번째 작품이다. 2년 가까이 열두 곳도 넘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가 겨우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이 작품이 없었다면 ‘모모’도 ‘끝없는 이야기’도 세계가 격찬한 '동화라는 수단을 통해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철학가'라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꿈과 환상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미하엘 엔데처럼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작가들이 좋다. 내가 써보고 싶다고 욕심내는 글도 이런 종류의 글인데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뛰어넘을 글은 쓸 재주는 없으니 실컷 읽으며 즐길 수밖에...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1人, 내 아이에게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줄 때 가끔씩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조르주의 마법 공원」의 클로드 퐁티와 미하엘 엔데는 내 이야기에 엄청난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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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그리스로마 신화 공부가 되는 시리즈
글공작소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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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세상을 향해 난 창이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세상이 넓다. 넓은 창을 갖느냐 좁다란 창을 갖느냐 혹은 콱 막힌 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당연히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다른 법이다.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은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건축 등 다방면에서 이해의 폭을 넓게 하기 위함이 신화를 읽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 곳곳에 스며든 신화를 만나는 일은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옛이야기처럼 친숙하고 즐거운 일이다. 처음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기 시작한 게 중학생 무렵이었다. 3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이듬해 3월이 될 때까지의 무료하고 어정쩡한 시기에 친구들에게 책과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 얘기로 시작된 이야기가 슬슬 책 얘기로 넘어가면서 즐겨서 소재로 삼았던 이야기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야기였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앞에서 옆에서 순식간에 몰려들던 친구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행복하게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는 판타지와 로맨스와 출생의 비밀과 복수와 호러와 전쟁과 모험 활극 등이 죄다 들어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였으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그리 즐거워했음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까뮈의 ‘시지푸스 신화’처럼 문학작품의 주된 모티브가 되거나, 무수한 문학작품 속에서 많이 인용되거나 비유되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야기가 감질난 느낌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 읽은 그리스로마 신화도 생각난다.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전집의 1번이 ‘그리스 로마 신화’였는데 범우사 사르비아 문고를 한창 읽을 때라 자연스레 같은 출판사의 책을 골라 읽게 됐다. 다 읽었음에도 장님 코끼리 더듬듯 흥미로운 부분만 떼서 기억하고는 그저 끝냈음에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비록 문고판이었지만 ‘오이디푸스 왕’이나 ‘아가멤논’같은 책들에도 무턱대고 덤벼들곤 했었다. 십대 시절, 넘쳐나던 호기심이 무모한 도전을 이끌었던 시기의 시작이 그리스로마 신화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아라비안 나이트’ 또한 신밧드의 모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리딘의 요술램프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서점을 돌며 ‘아라비안 나이트’의 완역판을 찾아다닌 것도 그 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제대로 된 ‘아라비안 나이트’ 완역판을 만난 건 5,6년의 세월이 더 흘러 1992년이 되어서였다.        

처음 신화를 읽을 때는 그리스 신과 로마 신의 명칭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같은 신임에도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다루는 명칭이 달랐음을 모르고 신들의 명단이 두 배로 부풀어 있음을 알고 황당했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서로 많이 헷갈린다. 성인이 되고 신화는 이렇게 읽어야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책은 단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신화 속 장소와 신화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들을 곁들여 소개한 이 책은 신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셈이다. 이 책 이후로 국내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는 방식이 가벼워지고 친근해지지 않았나 싶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출판돼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어른 아이 책 구분 없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그림과 사진으로 옷을 입은 신화 이야기들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됐다. 물론 지금 리뷰로 써야 할 부분에 사설만 길어지고 있는 이 책도 그런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올림포스 최고의 신 제우스의 아버지인 티탄족 크로노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흥미롭고 비교적 잘 알려진 신화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지루하거나 골치 아플 틈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신화에서 영감을 얻거나 신화를 재현한 미술 작품들을 풍부하게 실었고, 신화에서 유래한 흥미로운 상식들을 본문 옆에 박스를 달아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신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리고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놓고 있어서 앞뒤로 오가며 책을 읽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예를 들면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목마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한군데 모여 있어야 이해가 빠르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게 되고,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느라 고향을 떠났다가 오래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고,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는 집에 남아 모두가 죽었다고 단정 지은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의 구애에 시달리며 옷감을 짜야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런 구성력이 좋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여기저기로 튀던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려고 엄청 애를 먹으며 읽던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하면 세상 참 좋아졌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테세우스의 여섯 가지 모험, 바람둥이 제우스, 판도라, 피그말리온, 에로스와 프시케, 나르키소스, 오이디푸스, 카산드라...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공부가 되는...’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된 책이라 제목에 턱하니 ‘공부가 되는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붙은 게 흠이라면 흠이다. ‘공부가 되는..’이라면 부모들은 확 덤벼들지 몰라도 아이들의 마음은 저만큼 도망가 버리지 않을까 싶다. 호기심과 흥미만 갖고 슬슬 빠져들다 보면 아마 저절로 신화에 대한 지식이 쌓이게 될 텐데 말이다. 최근에 보도된 소식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이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밝혀졌다고 한다.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의 연구와 열정으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도 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이 책 한권만 제대로 읽어도 그리스로마 신화의 별미들을 많이 맛본 거라고 할 수 있다. 신화 속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호기심을 더 확장시키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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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정글북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2
바주 샴 글.그림, 조현진 옮김 / 리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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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읽은 <야쿠바와 사자>이후로 독특한 작품들을 기웃거리다 찾게 된 몇몇 작품들이 있다. 세계 젊은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중 한 권이 <런던 정글북>이다. 인도 빈민가 출신의 예술가 바주 샴이라는 생소한 작가 이름과 벽화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에 끌려 집어든 책이었다. 인도의 곤드족 출신인 작가가 런던 레스토랑의 벽화 작업의 의뢰를 받고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두 달 정도 체류하면서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런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든 땅과 가족들과 친숙한 음식들 동물들을 떠나는 불안한 마음은 생각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으로 표현했고, 처음 타본 비행기와 공항의 모습은 사람들을 삼켜버리는 커다란 독수리의 모습을 한 비행기를 커다란 스탬프 안에 그려 넣고 사람들은 나란히 기어가는 개미들로 그린 모습이 인상적이다. 런던의 우중충하고 비와 안개가 많은 날씨를 곤드족의 무늬로 보여줬고, 지상만큼이나 분주한 런던의 지하세계를 커다란 뱀으로, 밤이면 집 밖으로 나와 레스토랑에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런던 사람들은 야행성 박쥐로, 인도 곤드족 여인들에 비해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소화해 내고 있는 런던의 여인들은 네 개의 팔을 가진 인도의 여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런던의 멋진 시계탑 빅벤은 곤드족의 시간의 상징인 수탉과 그럴듯하게 결합했고, 번호만 잊지 않는다면 언제나 편안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는 런던 이층버스는 믿음직스럽고 편한 강아지로 변신했다.

그밖에도 낯선 땅 레스토랑에서 음식 주문하기의 애로사항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메뉴판의 번호를 기억하려고 애썼다는 마음에 깊은 공감을, 그리고 길에서 자유롭게 애정 표현하는 남녀의 모습과 곤드족에게는 좋은 식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트림이 런던 사람들에게는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할 행동이라는 것이라고 문화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낯선 땅에서의 여행자, 이방인으로서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의 박제된 모습을 통해서도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모습은 예술가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두 달 동안의 런던 체류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바주 샴은 마을의 시인이 되었다 한다. 곤드족 마을에서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시인들만 사람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바주 샴의 입을 통해 듣는 런던이라는 도시에 대한 상상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런던정글북>이라는 제목 때문이겠지...늑대에 의해 키워진 모글리가 인간 세상에서 돌아와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정글의 동물들에게 들려주는 모습과 런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바주 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바주 샴의 그림은 이미지와 상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하학적 도형의 무늬들과 인류와 우주와 부족의 전설과 상상 속 동물들이 간결하게 형상화 되어 있다. 바주 샴의 그림은 전통 부족들의 문양들을 차용해서 일러스트로 세련되게 형상화한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빠져 있는 순수함과 투박함이 느껴진다. 눈이 즐거운 그림책이다. 낯선 땅 런던을 바라보는 바주 샴의 시선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열려있다. 그 따스한 시선을 그림 속에서 자주 만난다. 런던은 꽤 뿌듯한 그림책 한권을 갖게 됐다. 이방인이나 여행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 지 생각해 본다. 가깝게는 타인의 시선 속의 내 모습도 생각하게 된다.              

요즘 나의 그림책읽기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신선한 작품들을 찾게 된다. 웬만한 감동에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좀 더 자극적인 일러스트나 신선함을 줄 수 있는 생소한 작가의 작품들에 자꾸 손이 간다. 물론 이런 강한 자극도 언젠가는 식상해져서 다른 맛을 찾아 나서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당분간은 기발한 이야기로 마음을 자극하거나 독특한 그림으로 신선함을 주는 그림책을 찾아다니게 될 것 같다. 아이와 함께 읽는 책이니 나의 취향이 아이와도 맞아떨어져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무리가 없는 듯하다. 아이는 배제되고 어른들만을 위한 그림책 또한 늘 염려하고 경계하는 부분이니 아이와 함께 끊임없이 조율하는 작업을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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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5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4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내인생의책 그림책 14
조시 리먼 글, 그레그 클라크 그림, 데카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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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1초가 아쉬운 아침 시간에 느리게 밥 먹기, 양치하고 세수할 때 짜증내기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아이를 오늘은 참다못해 엉덩짝을 한 대 쳐서 유치원을 보냈다. 며칠 동안 웃음으로 받아주기도 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주의도 주고 마지막 경고도 날렸건만 오늘 아침에도 여전한 태도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웬만하면 아침 등원하는 길에 좋은 기분으로 보내려고 참았는데 이 녀석이 너무 눈치 없었던 거다. 지금 이 책을 다시 꺼내 읽다보니 아이의 ‘아침 심술’은 무슨 신호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엄마 아빠의 인내심 테스트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일까? 자신의 아침 심술을 잠재울 협상 카드를 하루빨리 엄마가 꺼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깔아둔 물밑작업이었을까? 물고기 키우게 해달라는 아이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놓고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고 있던 마음이 슬슬 움직이는 걸 느끼면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드는 것은 순전히 다 이 책 때문이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은 엄마 아빠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설명서다. 엄마 아빠를 적절히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한 발칙한 방법들을 은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먹기 싫어하는 채소를 안 먹는 방법과 마음에 드는 도시락을 갖고 가는 방법, 숙제를 떠넘기는 방법, 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조르는 방법 등을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가면 뒤로 숨겨두고 있다. 고함 소리로 아침을 시작하는 건 엄마 아빠의 지각을 막기 위한 배려와 방으로 달려오시게 함으로써 운동을 해서 건강을 지켜드리려는 마음을 담은 행동이고, 숙제를 엄마 아빠에게 미루는 것은 엄마 아빠의 두뇌 훈련을 위해서고, 첨벙거리며 목욕하는 것과 목욕이 끝난 후 물기를 닦지 않고 거실을 뛰어다니는 것은 욕실 청소와 거실 바닥청소를 도와드리려는 것이란다. 뭐 이런 아이들의 대견한 속마음을 읽게 된다면야 기꺼이 속아주고 놀아나 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녹초가 돼서 침대에 쓰러진 엄마 아빠 뒤로 이 비밀 지침서를 전하는 누나와 전수 받고 있는 동생의 시선이 만난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방법을 전수해준다며 엄마 아빠에게 제대로 혼나는 방법을 들려줬던 누나와 내가 속을 줄 알았냐는 동생의 속마음이 마지막 웃음 펀치를 날린다. 사실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들은 '엄마 아빠에게 제대로 혼나는 방법'이었던 거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엄마 아빠 사용 설명서’, ‘엄마 아빠에게 제대로 혼나는 방법’,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는 방법’...여러 가지로 이름붙일 수 있는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아이의 행동 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과격하거나 소심하게 보내는 신호에 좀 더 마음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아침마다 짜증과 심술을 부리는 아이와 진지하게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다. 물고기를 키우게 해 준다고 하면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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