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간다 옛날옛적에 1
김용철 그림, 권정생 글 / 국민서관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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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꿈의 행복한 구현 <훨훨 간다>

초가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내 좋은 사람과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가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행복하겠소...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네처럼 딱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해지고 구체화되고 있는 내 오랜 꿈이다. 너도나도 세상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게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바삐 움직일 때에도 난 그리 치열하게 살아내질 못했다. 턱없이 부족한 능력 탓도 있지만 그 야심찬 행보가 내겐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가 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꿈은 이름 없는 여인처럼 살고 싶은 거다. 지금 당장 못 이룰 꿈도 아닐 만큼 소박한 꿈이지만 먹고 살 일이며 아이의 교육이며 당장 발목을 잡아당기는 극히 현실적인 이유들에 묶여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권정생 선생님의 그림책 중에서 <훨훨 간다>와 <오소리네 집 꽃밭>은 내 소박한 꿈의 예쁜 구현이다. 회오리바람에 날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학교 화단의 꽃이 부러워서 남편을 다그쳐 꽃밭을 만들자고 하는 오소리 아줌마와 그 변덕을 군소리 없이 다 받아주는 오소리 아저씨의 행복한 웃음이 퍼지는 잿골 이야기 <오소리네 집 꽃밭>과 산골 외딴집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 <훨훨 간다>는 어쩌면 사계절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그 배경이 내가 그리던 곳이라서 부럽다기보다는 욕심 없이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가 내심 부러워서일 것이다. 

 

산골 외딴집...할아버지는 밭에 나가 일하고 할머니는 집에서 길쌈을 하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흠이 있다면 말수 적은 할아버지 때문에 긴긴 산골의 밤이 심심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꾀를 낸 할머니는 정성껏 짠 무명 한 필을 내밀며 장에 가서 이야기 한 자리하고 바꿔오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을 한다. 순순히 떠밀려 장에 나온 할아버지의 흥정은 놀림감이 되는 것 말고는 별 소득이 없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자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농부 빨간코 아저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할머니 볼 면목이 없게 생겼을 것이다. 이야기 한 자리를 무명 한 필과 바꿔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할아버지와 하루 종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소박한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할아버지가 빨간코 아저씨에게서 사온 이야기는 결국 배고파 몰래 숨어든 도둑 아저씨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지만 문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행복한 웃음은 신골의 밤을 행복하게 적신다.

‘훨훨 온다’ ‘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예끼 이놈!’ 하면서 폴짝거리며 흉내 내기 바쁘던 아이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과자를 먹을 때도 ‘콕 집어먹는다’하며 깔깔대곤 했었다. 정겹고 흥이 나는 우리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 맛도 일품인 그림책이다. 논바닥에 날아와 앉은 황새의 모습을 흉내 내는 빨간코 농부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화려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하는 어떤 이야기보다도 흥겨워진다. 장에 간 할아버지가 가져올 이야기 한 자리 기다리던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정성껏 짠 할머니의 무명 한 필이 결코 아깝지 않을 이야기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내게 아이가 생기면서부터다. 소박하고 따스한 이야기로 긴 여운이 남는 감동을 주는 선생님의 글에 단박에 반해버렸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 담담한 감동이 주는 맛은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여러 가지 맛을 두루 섭렵한 미각이 뒤늦게 그 밋밋하던 맛이 진국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할까. 몇 년 동안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웬만큼 독특해서는, 웬만큼 신선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럴 즈음 권정생 선생님의 글들이 주는 진정한 맛을 깨닫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찾아서 이야기책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데이고 혹사당한 미각을 편안하게 달래줄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위시한 내 책장의 붙박이 터줏대감들을 믿기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해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음에도 안동에 5평 남짓한 오두막이 전부였던 선생님. 돌아가시며 인세 또한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하셨다 한다. 평생을 소박하게 사셨던 분이셨지만 이야기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정겹게 살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다행히도 나는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남편이 있어 훗날 산골 생활에서 이야기 한자리와 바꿀 무명 짜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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