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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크노프는 어떻게 햇빛섬에 왔을까 ㅣ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미하엘 엔데 원작, 베아테 될링 엮음, 마티아스 베버 그림, 황문정 옮김 / 소년한길 / 2009년 3월
평점 :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난 후부터 그의 작품들을 죄다 훑고 있다.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 『모모』도 뒤늦게 읽고, 단편집들도 읽고, 그림책들도 미하엘 엔데라는 이름만으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내용을 제목만 다르게 출판한 것도 있었고 장편 동화의 에피소드들을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작품들도 있어서 재차 읽은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 읽었다는 얘기다. 원래 책을 고를 때 원작에 충실하고 한 작가의 작품 목록을 꼼꼼하게 살펴서 완벽한 리스트를 손에 쥐고 덤비는 편인데 미하엘 엔데에 관해서는 서둘러 만나보고 싶은 조급함에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조차 없어서 생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평소의 나는 원작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인 작품들을 유아의 눈높이에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훼손해서 재구성한 책들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는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로 읽어야지 다이제스트나 어린이 논술대비 혹은 어떤 의로도 재구성한 셰익스피어나 카프카는 이미 셰익스피어나 카프카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원작이 버겁고 어렵더라도 그대로 부딪쳐 봐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 아이에게도 어정쩡한 이런 책들을 읽히지 않으리라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미하엘 엔데라는 이름만으로 반가운 마음에 집어든 그림책들 중에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있었는데 모르고 덥석 아이에게 안겼던 거다. 이 그림책 『짐 크노프는 어떻게 햇빛섬에 왔을까』와 함께 읽은 『모험을 떠나는 짐 크노프』는 미하엘 엔데의 첫 작품인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라는 장편 동화 속 에피소드를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신기하게도 까칠하던 내 기준이 미하엘 엔데의 그림책 앞에서는 무너져 버렸다. 미하엘 엔데의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그림책이라는 분야에서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을 거라는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 거다. 속편까지 합치면 800쪽 정도 되는 장편동화를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읽으라고 들이밀 수는 없지 않은가...하면서 말이다.^^
우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매력적인 섬 햇빛섬에 대한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이 섬은 워낙 작아서 거주인이라고 해봐야 4명과 기관차 엠마가 전부다. 이 섬에 한 아이가 소포로 배달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짐 크노프’다. 섬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햇빛섬에 한 대밖에 없는 기관차 엠마를 모는 기관사 루카스 아저씨, 조상 중에 가는귀가 먹어서 자꾸 “뭐요?”하고 되묻는 사람이 있어서 대대로 붙여진 이름 뭐요 아줌마, 매일 중절모를 쓰고 우산을 팔에 걸고 햇빛섬을 산책하는 옷소매 아저씨, 12시 15분전에 태어나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햇빛섬을 다스리는 왕이 전부다.
이 작은 섬에 ‘옛날 길 133번지에 사는 어금니 부인’ 앞으로 소포가 배달되어 온다. 햇빛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옷소매 아저씨와 뭐요 아줌마 루카스 아저씨는 엠마를 타고 햇빛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어금니 부인을 외쳐 부르지만 소포의 주인이 나타날 리가 없다.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에게 고민 해결을 부탁하고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은 평소처럼 황금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한 끝에 결론을 내린다. 이 섬에 부인이라고는 뭐요 부인밖에 없으니 이 소포를 뭐요 부인이 뜯어보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모두 모여 소포를 뜯어보는데 여러 겹의 상자들을 풀어 보니 그 안에서 작은 사내아이가 나왔다. 햇빛섬은 새 주민 ‘짐 크노프’를 맞이한 것이다. 루카스 아저씨는 아이를 소포에 싸서 보낸 사람에게 분개하고 뭐요 아줌마는 짐 크노프를 사랑으로 키운다. 훗날 짐 크노프가 자라면서 햇빛섬이 비좁다는 이유로 알폰소 12시 15분전 왕은 기관차 엠마를 섬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루카스 아저씨와 짐 크노프는 엠마를 타고 모험을 떠나게 되는 얘기들이 기다리고 있다.(「모험을 떠나는 짐 크노프」참조) 물론 장편 동화 속에서는 의문의 ‘어금니 부인’의 정체도 밝혀진다.^^
장편 동화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의 부스러기 정도 되는 에피소드를 엮은 그림책이라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미하엘 엔데의 환상의 세계를 아이에게 일찍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을 이 그림책들이 해결해준다. 몇 년쯤 후가 되겠지만 이 그림책을 읽고 자란 아이가 원작인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아저씨」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미리 상상만 해도 슬쩍 미소가 피어난다. 그리고 ‘기관차 대여행’은 미하엘 엔데의 첫 번째 작품이다. 2년 가까이 열두 곳도 넘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가 겨우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이 작품이 없었다면 ‘모모’도 ‘끝없는 이야기’도 세계가 격찬한 '동화라는 수단을 통해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철학가'라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꿈과 환상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미하엘 엔데처럼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작가들이 좋다. 내가 써보고 싶다고 욕심내는 글도 이런 종류의 글인데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뛰어넘을 글은 쓸 재주는 없으니 실컷 읽으며 즐길 수밖에...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1人, 내 아이에게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줄 때 가끔씩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조르주의 마법 공원」의 클로드 퐁티와 미하엘 엔데는 내 이야기에 엄청난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