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작은 거인 먼클 트록 1 - 용을 타고 하늘을 날다! 456 Book 클럽
재닛 폭슬리 지음, 스티브 웰스 그림, 고수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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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현란하게 환상적으로, 혹은 기괴하게 상상력을 펼쳐놓는 이야기들이 넘친다. 그 중에는 작가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상상력까지 쥐어짜낸 건 아닐까 싶은 다소 억지스런 판타지에 실망하기도 한다. 비교의 대상에는 무작정 따라 하기만 해도 뭔가 뚝딱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손뜨개 교본이나 여행지의 친절한 가이드북처럼 상상의 세계를 마치 실존하는 공간인 것처럼 촘촘하게 짜낸 작품들이 버티고 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처럼 탄탄하고 완벽하리만치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대표주자 격이다. 그 촘촘한 그물에 걸리지 않은 이야기를 창조해내야 하는 판타지 작가들의 고충을 천재 모차르트 옆의 살리에르를 끌어다 견준다면 조금 지나칠까? 『먼클 트록』의 작가 재닛 폭슬리와의 대화 중 <해리포터> 시리즈 때문에 마법이나 마술이 나오는 이야기는 피하려고 했고 그래서 결국 거인을 등장시키기로 했다는 대목이 솔직해서 인상적이다.


환상적인 맛에 길들여진 입맛을 갖고 있는 독자들은 웬만한 판타지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해리포터 때문에 마법사를 피해 거인을 택했다지만 거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또한 이미 넘친다. 작가는 무수한 이야기들 속 등장하는 거인들의 사이즈의 극대치나 포악하고 잔인함의 최대치로 승부를 보는 식상함 말고 거인 마을의 제일 작은 거인 소년을 등장시키는 반전을 노렸다.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동생에게 거꾸로 들려서 대롱대롱 매달리다 던져질 정도로 아주 작은 거인 소년 먼클 트록의 험난한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거인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거인인 먼클 트록을 감싸주는 이는 엄마뿐이다. 늘 안쓰럽고 학교에 보내놓고도 걱정이 끊이질 않는 엄마와 마을 최고의 사냥꾼 아빠, 그리고 우르릉 산에서 가장 거친 패거리 ‘천둥파’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동생 그릿, 그리고 아기 플럽이 먼클의 가족이다. 먼클의 가족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가족이고, 먼클은 작은 체구 때문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의 놀림감이고 성적 또한 신통치 않아서 졸업 후 진로도 막막한 상태이다. 하지만 박물관으로 현장 학습을 간 이후 먼클의 삶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다.


소인이라 지칭되는 인간들에게 쫓겨 우르릉 산 깊숙한 곳에서 숨어 살고 있는 거인들은 소인 세상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거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 소인들을 납치하던 시절에 소인들과의 전쟁에서 소인들의 무시무시한 기계에 밀려 결국 우르릉 산으로 도망 와서 소인들의 세상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를 차단해 버리고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몇백 년이 흐르면서 소인들 세상에서 거인들의 존재는 잊혀졌고 아마도 옛이야기나 전설로만 떠돌고 있을 것이다. 거인 세상의 현자인 바이블로스 경은 박물관에 딱 하나뿐인 소인의 옷과 그 주머니 안의 책이 거인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소인의 체구와 비슷한 먼클에게 소인의 옷을 입혀주면서 그 마법책의 글자를 읽을 수 있는 현자가 나타난다면 바깥 세상에 나가 다시 우리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전한다. 우르릉 산 임금님의 생일날 바이블로스 경과 먼클 가족만이 아는 특별 공연이 성공리에 끝난 후 오래된 봉인이 해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먼클의 동생인 그릿과 ‘천둥파’ 패거리들이 소인의 마을로 내려가 소인 여자 아이를 납치해 온 것이다. 소인들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막대기’를 두려워하는 거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소인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소인의 옷을 입고 소인들의 세상에 갔었던 적이 있었던 먼클은 그곳에서 만났던 여자 아이 에밀리가 납치되어 온 것을 알고 에밀리를 구할 계획을 세운다. 에밀리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거인의 세계가 소인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막는 길임을 먼클은 알고 있었다. 역시 차세대 현자의 재목이다.^^ 에밀리를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소인과의 접촉도 피할 묘책을 세워서 훌륭하게 해낸 먼클은 거인 학교의 찌질한 왕따에서 왕실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인 현자의 자리에 오른다. 인간 소녀인 에밀리와의 비밀스런 우정과 휴화산임을 짐작케 하는 우르릉 산에 임박한 화산 활동의 가능성이라는 뒷이야기를 여운으로 남기며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거인 먼클 트록의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난다. 먼클 트록이 존경받는 현자가 될 수 있을 지 2편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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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날 - 오늘의 일기 보림 창작 그림책
송언 글, 김동수 그림 / 보림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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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을 훌쩍 넘은 시간을 마음이 되짚어 달려간다. 면 단위 하나 밖에 없었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면 아랫마을 윗마을 온통 축제와 같았던 시절이었다. 매일 뛰어 노는 게 전부였던 아이에게 시간 맞춰 가야할 곳이 생겼고, 배우는 기쁨이 있고,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기대감으로 설레고 긴장됐던 내 어릴 적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학교 가는 날>에 소개된 동성국민학교 1학년 2반 구동준과 한솔초등학교 1학년 2반 김지윤의 교차일기를 읽으며 그 옛날 국민학교 입학하던 날의 기억와 올해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엄마의 마음이 조우한다. 나에겐 구동준도 김지윤도 낯설지 않은 아이들이다.


구동준이 초등학생이 되는 과정은 추억여행과 같았다. 소매 끝이 연실 닦아대던 콧물에 반질거리던 시절이라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옷핀으로 고정시킨 하얀 손수건이 가슴에 훈장처럼 빛났었다. 학교 운동장은 입학하는 아이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가득 메워서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나란히 줄 맞춰 선 아이들의 얼굴엔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했었다. 영희와 철수와 바둑이를 소리 높여 불러대는 것을 시작으로 글자를 깨치고, 셈을 익히며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는 느낌이었고,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에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었다.


초등학생 김지윤의 모습은 바로 내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취학통지서를 받고 아이의 지난 동영상들을 챙겨보고 아기 수첩과 앨범을 꺼내보며 감회에 젖는 지윤이 엄마가 곧 내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의 치열한 교육현장에 첫 발을 들여놓는 아이를 보며 군대 영장 나온 날 기분이라는 지윤이 아빠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취학 전 예방접종도 마무리하고, 엄마 손이 가던 일들을 혼자서 해보도록 시켜보기도 하고, 초등학교 생활에 대한 적응 훈련도 시켜보는 마음은 아마도 부모의 불안감 때문이리라. 예비소집일도 커다란 행사였던 옛날과 달리 학교에서 배포한 유인물만 받아왔던 썰렁한 예비소집일은 맥 빠진 기분이 들었고, 한반에 50명이 넘어 북적대던 입학생이 고작 한반에 25,6명 정도가 전부인 오붓함도 낯설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운동회가 다음 주에 있다. 입학식뿐만 아니라 운동회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바리바리 음식을 준비해서 온가족이 총출동하던 운동회를 생각한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맞벌이로 참석 못하는 부모들이 많아서 부모가 참석하는 아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급식으로 대신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아이의 일상과 입학식 풍경이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책가방을 준비하는 것 말고는 매일매일 지구 최후의 날인 것처럼 푸짐하게 놀았던 행복이 있던 시절, 가끔씩 불안과 걱정이 슬며시 생겨났지만 신나는 놀이로 날려버리곤 했었다. 그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한글과 기본 셈과 영어까지 욕심껏 무장하고 초등학생이 된다. 놀이로 허비할 시간이 아깝기라도 하듯 유치원 졸업식을 끝내자마자 바로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온다. 옛날에 비하면 지식으로 무장하고 영특해 보이지만 왠지 불안감은 더 커지는 이 기분은 아마도 내 위치가 부모의 자리다 보니 느껴지는 감상일 것이다. 


<학교 가는 날>은 여러 세대가 함께 둘러앉아 읽으면 좋을 그림책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다면 안성맞춤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의 생활이 시대에 따라 잘 드러나 있다. 많이 달라보이지만 새로운 장을 여는 순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닮아있다. 가족 간에 이야기도 풍성해지고, 깔깔대는 웃음도 있고, 그러면서 서로 공감과 격려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 옛날, 큰 소리로 싸울 줄도 모르고 얌전하기만 한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켜놓고 불안한 마음에 몰래 학교 운동장을 서성거렸던 친정 엄마의 마음에 절절하게 공감한다. 오늘도 나는 학교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운동장을 가로 질러 내게 달려올 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마음을 쓸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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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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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왜라니요?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냐고, 태양에게 왜 빛나고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을 사랑에 대한 신념처럼 가슴 속에 수줍게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도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리고 금기의 언어인양 부끄러워하며 숨기던 시절이라 책에 옷을 입혀 제목을 숨기고 가슴 떨리며 반복해 읽곤 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왔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소설 <침묵의 시간>을 읽으며 자연스레 마음이 그 시절로 흘러들어갔다. 독일 유수의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노작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쓴 소설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아직 생생한 젊은 작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성년으로 막 접어든 나이의 감성을 수줍은 듯 생생하게 전하는 목소리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죄다 순수했던 그 시절로 휘감아 떠미는 매력을 지녔다.


지나가버린 사랑의 기억 위로 묵직한 시간들이 쌓인다. 세월의 퇴적층 아래 설렘의 순간, 두근거림, 애달픈 그리움, 끝나버린 사랑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랑의 고통마저 조용히 잠들어 있다. 고통은 희석되고 추억은 기이하리만큼 미화되는 게 지나간 사랑에 작용하는 시간의 힘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추억의 이미지들이 가끔씩 불쑥거리며 튀어나올 때면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 버릴 거라던 믿음이 헛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무수한 사람들 머리 위로 안개꽃 한 무더기가 둥둥 떠서 내게로 온다. 배경이 되는 계절도 기억나지 않고, 꽃을 든 사람의 차림새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광장의 인파속에서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내게로 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 나에게 첫사랑은 내게로 둥둥 떠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다. 나에게 안개꽃은 안타까움과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나는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다. 눈앞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터진 후 찾아오는 찰나의 현기증처럼 사랑은 그 사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고등학교 영어교사 슈텔라 선생님과 졸업반 학생 크리스티안의 사랑, 어떤 불륜 막장 드라마 소재보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금단의 사랑. 어느 여름날 해변 축제에서 시작된 사랑은 절정에 치닫기도 전에 어이없는 사고로 황급히 끝나버렸다. 슈텔라 선생님은 떠났고 크리스티안은 영원히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 속에 영영 갇혀버렸다. ‘침묵의 시간을 이겨내거나, 아니면 아무 일없이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크리스티안에게 남겨진 유일하고 고통스런 축복인 셈이다. 크리스티안은 침묵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선생님과의 사랑은 ‘젊음의 영원한 비극인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슈텔라 선생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추모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이 치러야했던 황망한 이별에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슬픔이 눈물로 줄줄 흘러내리지 않고 가슴 안에 가둬두고 내 안의 추억의 소회들과 온통 뒤섞여서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노작가의 절제되고 섬세한 문장에 찬사를 보낸다. 바다 밑에서 캐낸 표석 위에 흔적을 남겨둔 생물의 화석처럼, 호박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딱정벌레와 모기처럼 노작가의 젊은 시절 언저리에서 애틋한 사랑의 화석 하나를 건져 올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베이고 잘려나간 상처보다 훨씬 오래도록 아픈 상처지만 훈장처럼 이런 상처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인간적인 향기가 난다.

    

<독일인의 사랑>은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순수함의 상징과도 같은 책이다. <침묵의 시간> 또한 그런 독자를 만나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바란다. 평소 즐겨 읽는 사계절 청소년 도서 ‘1318 문고’ 리스트에서 이 책을 만난 반가운 이유다. 일회적이고 수두룩한 조건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계산적인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매 순간 설레고 매 순간 눈부시길 이제 막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젊은 영혼에게 기원한다.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포트키(미리 정한 시간에 마법사들을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데 사용하는 물체/해리포터 참조) 하나쯤 청춘의 증거처럼 지니고 살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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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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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참 묘하다.

그가 내놓은 책 <바람의 그림자>는 에드거 앨런 포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기에 스티븐 킹을 뒤섞어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 정도면 초호화 작가군단이 아닌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미의 이름>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이야기의 플롯이 비슷하다는 점과 <장미의 이름>에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있다면 <바람의 그림자>에는 페르민과 다니엘 콤비가 추리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고 있으리라. 또 희귀본을 취급하는 고서점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브루클린 풍자극>을 비교하는 것일 테지만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과 치밀한 구성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조를 비롯해서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 면에서도 폴 오스터와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1권 285~286쪽)


친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는 작가. 그렇다, 2권 합쳐 80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깔리고 성장소설의 냄새도 풍기고 스페인 내전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니 전쟁과 역사 또한 무시하지 못할 주요 요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 가지 맛이 혼합돼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괴상한 맛이 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작가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각의 맛을 제대로 적당하게 혼합하여 아주 맛깔스런 작품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낸, 욕심을 잔뜩 부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답게 세심함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스치듯 지나칠 법도 한 인물들에게도 특유의 색깔을 입혀주는 탁월한 글솜씨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작가다.


<바람의 그림자>는 과거의 연인 훌리안-페넬로페와 현재의 연인 다니엘-베아의 닮은 듯 달랐던 사랑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모자점 주인의 아들 훌리안,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주인의 아들 다니엘이 대부호의 외동딸인 페넬로페와 베아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 여인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딸들을 아끼지만 고집스럽고 엄하고 권위적이라서 딸들의 애정행각이 드러났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발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다는 점도 그대로 닮아있다. 그로 인해 딸의 죽음과 딸의 가출로 이어지지만 사랑이 컸던 만큼 그 화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두 집안에 외동딸보다 평가절하 됐던 외아들들의 반응 또한 판박이다. 이렇듯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닮아있는 연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용기와 충고와 사랑으로 현재의 연인에게 조금 다른 엔딩을 선사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과거의 누군가가 살아낸 모습이겠구나 하는 공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에 모든 인생을 다 건 훌리안. 유배자처럼 살아오는 동안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사랑의 죽음을,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와 치를 떨게 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곤 하는 운명의 횡포에 분노한다. ‘불에 삼켜진 흉터가 아문 검은 가죽으로 된 가면’과 같은 얼굴로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의 닮을 꼴 인생을 향해 발을 내디딘 다니엘과 첫 대면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니엘이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충고한다.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2권 197쪽)


훌리안의 유일한 사랑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누구더냐. 남편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절개를 지켜낸 여인네가 아니더냐.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와 20세기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운명 또한 닮았다. 20년을 기다린 신화 속 페넬로페였지만 20세기의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니, 살아서의 기다림이 길지 못했다. 신화 속 페넬로페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네 번째 생일날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열 살 소년 다니엘.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갔던 그 새벽 이후 이 소년의 인생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손에 넣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은 자연스레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자신에게서 다시 실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니엘에게는 훌리안에게 없었던 아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다. 바로 아버지 셈페레씨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 모습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아버지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권 298쪽)


그리고 다니엘의 연인 베아.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이다. 용감한 그녀 베아는 연인 다니엘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훌리안과 다니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다. 훌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이 모든 사건들의 결실이다.


그밖에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남자 페르민, 무기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친구인 훌리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정을 보여준 미켈, 한번도 본적이 없는 페넬로페를 질투하며 훌리안을 사랑하다 죽어간 누리아,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누리아의 아버지인 이삭,...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잇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1권 14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한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이 책을 처음 읽고 난 어느 날, 바람의 흔적들에 에워싸여 산길을 오르며 ‘바람의 그림자’를 골똘히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함에도 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는 흔적들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인 바람. 그 바람의 그림자라... 참으로 찰나적이며 상실과 부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 존재하는 동명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 존재하나 부재의 의문만 던져주고, 살아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묘지보다 더 참혹한 추억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 남자, 온통 의문투성이인 이 남자,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바람의 그림자」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연작소설로 예고됐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천사의 게임」이다. 연작소설의 재미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바람의 그림자」속의 매력적인 서점 ‘셈페레 서점’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작가의 작품은 무턱대고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달려가게 된다. 첫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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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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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참 묘하다.

그가 내놓은 책 <바람의 그림자>는 에드거 앨런 포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기에 스티븐 킹을 뒤섞어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 정도면 초호화 작가군단이 아닌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미의 이름>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이야기의 플롯이 비슷하다는 점과 <장미의 이름>에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있다면 <바람의 그림자>에는 페르민과 다니엘 콤비가 추리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고 있으리라. 또 희귀본을 취급하는 고서점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브루클린 풍자극>을 비교하는 것일 테지만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과 치밀한 구성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조를 비롯해서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 면에서도 폴 오스터와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1권 285~286쪽)


친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는 작가. 그렇다, 2권 합쳐 80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깔리고 성장소설의 냄새도 풍기고 스페인 내전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니 전쟁과 역사 또한 무시하지 못할 주요 요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 가지 맛이 혼합돼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괴상한 맛이 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작가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각의 맛을 제대로 적당하게 혼합하여 아주 맛깔스런 작품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낸, 욕심을 잔뜩 부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답게 세심함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스치듯 지나칠 법도 한 인물들에게도 특유의 색깔을 입혀주는 탁월한 글솜씨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작가다.


<바람의 그림자>는 과거의 연인 훌리안-페넬로페와 현재의 연인 다니엘-베아의 닮은 듯 달랐던 사랑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모자점 주인의 아들 훌리안,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주인의 아들 다니엘이 대부호의 외동딸인 페넬로페와 베아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 여인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딸들을 아끼지만 고집스럽고 엄하고 권위적이라서 딸들의 애정행각이 드러났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발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다는 점도 그대로 닮아있다. 그로 인해 딸의 죽음과 딸의 가출로 이어지지만 사랑이 컸던 만큼 그 화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두 집안에 외동딸보다 평가절하 됐던 외아들들의 반응 또한 판박이다. 이렇듯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닮아있는 연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용기와 충고와 사랑으로 현재의 연인에게 조금 다른 엔딩을 선사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과거의 누군가가 살아낸 모습이겠구나 하는 공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에 모든 인생을 다 건 훌리안. 유배자처럼 살아오는 동안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사랑의 죽음을,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와 치를 떨게 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곤 하는 운명의 횡포에 분노한다. ‘불에 삼켜진 흉터가 아문 검은 가죽으로 된 가면’과 같은 얼굴로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의 닮을 꼴 인생을 향해 발을 내디딘 다니엘과 첫 대면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니엘이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충고한다.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2권 197쪽)


훌리안의 유일한 사랑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누구더냐. 남편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절개를 지켜낸 여인네가 아니더냐.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와 20세기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운명 또한 닮았다. 20년을 기다린 신화 속 페넬로페였지만 20세기의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니, 살아서의 기다림이 길지 못했다. 신화 속 페넬로페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네 번째 생일날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열 살 소년 다니엘.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갔던 그 새벽 이후 이 소년의 인생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손에 넣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은 자연스레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자신에게서 다시 실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니엘에게는 훌리안에게 없었던 아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다. 바로 아버지 셈페레씨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 모습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아버지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권 298쪽)


그리고 다니엘의 연인 베아.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이다. 용감한 그녀 베아는 연인 다니엘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훌리안과 다니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다. 훌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이 모든 사건들의 결실이다.


그밖에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남자 페르민, 무기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친구인 훌리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정을 보여준 미켈, 한번도 본적이 없는 페넬로페를 질투하며 훌리안을 사랑하다 죽어간 누리아,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누리아의 아버지인 이삭,...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잇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1권 14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한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이 책을 처음 읽고 난 어느 날, 바람의 흔적들에 에워싸여 산길을 오르며 ‘바람의 그림자’를 골똘히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함에도 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는 흔적들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인 바람. 그 바람의 그림자라... 참으로 찰나적이며 상실과 부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 존재하는 동명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 존재하나 부재의 의문만 던져주고, 살아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묘지보다 더 참혹한 추억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 남자, 온통 의문투성이인 이 남자,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바람의 그림자」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연작소설로 예고됐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천사의 게임」이다. 연작소설의 재미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바람의 그림자」속의 매력적인 서점 ‘셈페레 서점’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작가의 작품은 무턱대고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달려가게 된다. 첫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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