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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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참 묘하다.

그가 내놓은 책 <바람의 그림자>는 에드거 앨런 포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기에 스티븐 킹을 뒤섞어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 정도면 초호화 작가군단이 아닌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미의 이름>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이야기의 플롯이 비슷하다는 점과 <장미의 이름>에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있다면 <바람의 그림자>에는 페르민과 다니엘 콤비가 추리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고 있으리라. 또 희귀본을 취급하는 고서점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브루클린 풍자극>을 비교하는 것일 테지만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과 치밀한 구성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조를 비롯해서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 면에서도 폴 오스터와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1권 285~286쪽)


친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는 작가. 그렇다, 2권 합쳐 80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깔리고 성장소설의 냄새도 풍기고 스페인 내전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니 전쟁과 역사 또한 무시하지 못할 주요 요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 가지 맛이 혼합돼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괴상한 맛이 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작가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각의 맛을 제대로 적당하게 혼합하여 아주 맛깔스런 작품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낸, 욕심을 잔뜩 부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답게 세심함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스치듯 지나칠 법도 한 인물들에게도 특유의 색깔을 입혀주는 탁월한 글솜씨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작가다.


<바람의 그림자>는 과거의 연인 훌리안-페넬로페와 현재의 연인 다니엘-베아의 닮은 듯 달랐던 사랑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모자점 주인의 아들 훌리안,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주인의 아들 다니엘이 대부호의 외동딸인 페넬로페와 베아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 여인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딸들을 아끼지만 고집스럽고 엄하고 권위적이라서 딸들의 애정행각이 드러났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발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다는 점도 그대로 닮아있다. 그로 인해 딸의 죽음과 딸의 가출로 이어지지만 사랑이 컸던 만큼 그 화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두 집안에 외동딸보다 평가절하 됐던 외아들들의 반응 또한 판박이다. 이렇듯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닮아있는 연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용기와 충고와 사랑으로 현재의 연인에게 조금 다른 엔딩을 선사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과거의 누군가가 살아낸 모습이겠구나 하는 공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에 모든 인생을 다 건 훌리안. 유배자처럼 살아오는 동안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사랑의 죽음을,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와 치를 떨게 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곤 하는 운명의 횡포에 분노한다. ‘불에 삼켜진 흉터가 아문 검은 가죽으로 된 가면’과 같은 얼굴로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의 닮을 꼴 인생을 향해 발을 내디딘 다니엘과 첫 대면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니엘이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충고한다.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2권 197쪽)


훌리안의 유일한 사랑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누구더냐. 남편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절개를 지켜낸 여인네가 아니더냐.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와 20세기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운명 또한 닮았다. 20년을 기다린 신화 속 페넬로페였지만 20세기의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니, 살아서의 기다림이 길지 못했다. 신화 속 페넬로페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네 번째 생일날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열 살 소년 다니엘.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갔던 그 새벽 이후 이 소년의 인생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손에 넣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은 자연스레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자신에게서 다시 실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니엘에게는 훌리안에게 없었던 아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다. 바로 아버지 셈페레씨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 모습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아버지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권 298쪽)


그리고 다니엘의 연인 베아.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이다. 용감한 그녀 베아는 연인 다니엘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훌리안과 다니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다. 훌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이 모든 사건들의 결실이다.


그밖에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남자 페르민, 무기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친구인 훌리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정을 보여준 미켈, 한번도 본적이 없는 페넬로페를 질투하며 훌리안을 사랑하다 죽어간 누리아,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누리아의 아버지인 이삭,...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잇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1권 14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한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이 책을 처음 읽고 난 어느 날, 바람의 흔적들에 에워싸여 산길을 오르며 ‘바람의 그림자’를 골똘히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함에도 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는 흔적들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인 바람. 그 바람의 그림자라... 참으로 찰나적이며 상실과 부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 존재하는 동명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 존재하나 부재의 의문만 던져주고, 살아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묘지보다 더 참혹한 추억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 남자, 온통 의문투성이인 이 남자,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바람의 그림자」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연작소설로 예고됐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천사의 게임」이다. 연작소설의 재미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바람의 그림자」속의 매력적인 서점 ‘셈페레 서점’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작가의 작품은 무턱대고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달려가게 된다. 첫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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