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왜라니요?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냐고, 태양에게 왜 빛나고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을 사랑에 대한 신념처럼 가슴 속에 수줍게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도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리고 금기의 언어인양 부끄러워하며 숨기던 시절이라 책에 옷을 입혀 제목을 숨기고 가슴 떨리며 반복해 읽곤 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왔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소설 <침묵의 시간>을 읽으며 자연스레 마음이 그 시절로 흘러들어갔다. 독일 유수의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노작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쓴 소설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아직 생생한 젊은 작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성년으로 막 접어든 나이의 감성을 수줍은 듯 생생하게 전하는 목소리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죄다 순수했던 그 시절로 휘감아 떠미는 매력을 지녔다.


지나가버린 사랑의 기억 위로 묵직한 시간들이 쌓인다. 세월의 퇴적층 아래 설렘의 순간, 두근거림, 애달픈 그리움, 끝나버린 사랑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랑의 고통마저 조용히 잠들어 있다. 고통은 희석되고 추억은 기이하리만큼 미화되는 게 지나간 사랑에 작용하는 시간의 힘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추억의 이미지들이 가끔씩 불쑥거리며 튀어나올 때면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 버릴 거라던 믿음이 헛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무수한 사람들 머리 위로 안개꽃 한 무더기가 둥둥 떠서 내게로 온다. 배경이 되는 계절도 기억나지 않고, 꽃을 든 사람의 차림새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광장의 인파속에서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내게로 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 나에게 첫사랑은 내게로 둥둥 떠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다. 나에게 안개꽃은 안타까움과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나는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다. 눈앞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터진 후 찾아오는 찰나의 현기증처럼 사랑은 그 사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고등학교 영어교사 슈텔라 선생님과 졸업반 학생 크리스티안의 사랑, 어떤 불륜 막장 드라마 소재보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금단의 사랑. 어느 여름날 해변 축제에서 시작된 사랑은 절정에 치닫기도 전에 어이없는 사고로 황급히 끝나버렸다. 슈텔라 선생님은 떠났고 크리스티안은 영원히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 속에 영영 갇혀버렸다. ‘침묵의 시간을 이겨내거나, 아니면 아무 일없이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크리스티안에게 남겨진 유일하고 고통스런 축복인 셈이다. 크리스티안은 침묵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선생님과의 사랑은 ‘젊음의 영원한 비극인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슈텔라 선생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추모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이 치러야했던 황망한 이별에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슬픔이 눈물로 줄줄 흘러내리지 않고 가슴 안에 가둬두고 내 안의 추억의 소회들과 온통 뒤섞여서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노작가의 절제되고 섬세한 문장에 찬사를 보낸다. 바다 밑에서 캐낸 표석 위에 흔적을 남겨둔 생물의 화석처럼, 호박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딱정벌레와 모기처럼 노작가의 젊은 시절 언저리에서 애틋한 사랑의 화석 하나를 건져 올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베이고 잘려나간 상처보다 훨씬 오래도록 아픈 상처지만 훈장처럼 이런 상처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인간적인 향기가 난다.

    

<독일인의 사랑>은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순수함의 상징과도 같은 책이다. <침묵의 시간> 또한 그런 독자를 만나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바란다. 평소 즐겨 읽는 사계절 청소년 도서 ‘1318 문고’ 리스트에서 이 책을 만난 반가운 이유다. 일회적이고 수두룩한 조건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계산적인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매 순간 설레고 매 순간 눈부시길 이제 막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젊은 영혼에게 기원한다.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포트키(미리 정한 시간에 마법사들을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데 사용하는 물체/해리포터 참조) 하나쯤 청춘의 증거처럼 지니고 살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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