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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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 작가 아멜리 노통. 이 작가의 작품을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그녀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참신함, 아니 참신함을 뛰어넘는 충격을 받곤 한다. 물론 이번에도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나의 머릿 속을 강타했다. 왜 충격을 받느냐고?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굳이 설명해주지. 그녀만의 잔혹하고도 유머러스한 독특한 문체, 단순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주제 전달 능력, 마지막의 깔끔하고도 허무한 반전. 특히 그녀만의 독특한 문체와 '죽음'이라는 깔끔한 결말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그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배가시켜준다.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이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문체, 즉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노통은 그 조건을 매우 흡족히 만족시키는 작가다.

<오후 네시>에는 화자인 에밀과 그의 아내 쥘리에트, 이웃집에 사는 베르나르댕 부부가 등장한다. 에밀 부부는 65세의 노부부로, 황혼기를 평온하고 안락하게 보내기 위해 외딴 지방에 있는 호젓한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에밀과 쥘리에트는 조용한 '우리 집'이 좋았고, 그 곳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뿐이었고, 불행이 행복의 뒤를 맹렬히 쫓아왔으며, 결국 행복은 불행에게 뒤쳐지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일은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에밀부부의 이웃집에는 베르나르댕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에밀 부부의 '유일한' 이웃이었다. 베르나르댕 부부 중 남편 팔라메르 베르나댕씨가 '그 일'의 주인공이었다.

베르나르댕씨는 오후 4시만 되면 1분도 오차 없이 에밀 부부의 집 문을 두들겨댔다.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가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것 마냥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앉았다'보다는 '주저앉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뚱뚱한 비곗덩어리가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며 걷기에는 꽤나 힘들었을 텐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것처럼 의자를 발견하고는 그 의자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비로소 자신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셈이니까. 베르나르댕씨는 안락의자에 주저앉아서 문자 그대로 '개기고'있었다. 그리고 절대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었으며, 대답할 때는 항상 긍정 아니면 부정의 대답이었다. 만일 주관식으로 된 질문을 던지면 그는 질문자를 경멸에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처음에는 새 이웃이 왔으므로 어쩔 수 없이 예의상으로 한 번 들른 줄 알았다. 물론 집주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돼지같은 인간은 매일 오후 4시면 항상 찾아와 에밀 부부를 괴롭혔다. 이쯤 됐을 때, 나는 베르나르댕씨의 정체가 궁금했다. 에밀부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걸까? 아니다... 용건이 있으면 말이라도 할 터인데, 대답만 하지 않는가. 그럼 에밀 부부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면, 커피 얻어 마시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르나르댕씨 덕분에 에밀 부부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역시 세상에는 괴짜라는 존재가 실재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괴짜 중에 이런 괴짜는 생전 처음 본다. 이 소설 속의 괴짜는 만사가 불만스럽고, 귀찮다는 표정을 얼굴에 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이 자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나 있는 걸까?

계속되는 불청객의 방문에 화가 난 에밀은 어느날 그 괴짜를 쫓아내 버렸고, 그 괴짜는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에밀 부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이 얼마나 손 쉽고 간단하다 못해 허무한 해결인가? 그동안 에밀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를 못 쫓아낸 것이었고, 그에게 베푸는 친절이 오히려 에밀 자신에게는 화가 되고만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예의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면 그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쌓일 수도 있고, 상대편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속의 베르나르댕씨처럼 무례하고 뚱뚱한 노인한테 예의를 꼭 갖춰야 할까? 아무리 경로 우대라고는 하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무례함에는 무례함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내가 여지껏 한 말은 예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예의를 지키느라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는 예의라는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왜? 친구니까! 나 자신을 진실하게, 유리처럼 투명하고 그대로 보여주니까! 예의라는 표장을 하지 않고 나의 본모습으로 대면하니까!

끝난게 아니다. 베르나르댕씨는 그 후로 에밀 부부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다른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그 살덩어리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에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에밀이 그를 구해준 것이다. 이런 에밀의 행동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테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에밀 자신은 그를 구해준 것을 후회했고, 어느날 밤 그를 죽인다. 에밀은 베르나르댕의 삶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기쁨과 행복을 모르고, 무언가에 관심 하나 없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뚱뚱하고... 그가 살 이유는 없다고 에밀은 판단했고, 그를 죽이는 것이 그를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죽였다.

조금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 허무한 결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에밀이 그를 죽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를 위해서이지만, 원래 이유는 그가 혐오스러워서이다. 그 뚱보는 매일 오후 4시마다 그와 그의 아내를 괴롭혔고,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고 하기는 커녕, 왜 나를 살렸지? 왜 나를 못살게 굴지? 자살할 용기를 얻기 위해 70년을 기다렸어. 근데 네가 뭔데 날 살려? 네가 날 죽여줄 것도 아니면서! 라는 식의 경멸의 눈빛으로 에밀을 쏘아보았다. 이러한 일들을 참지 못하고 에밀의 속에 잠자코 있던 다혈질적이고 포악한 또 다른 에밀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인간의 내면에는 '또다른 나'가 실존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인간의 마음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내면과 그들의 자아는 그 누구도 정확히 모르는 법.

이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앞으로는 내 안에 있는 본능적 자아, 다른 말로하면 악을 잘 제압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하이드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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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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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보면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민수, 유진, 민지, 보라 등 흔한 이름의 소유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다. 물론, 흔치 않은 이름의 소유자들은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테지만. 내이름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단순히 '어? 나랑 이름이 똑같네?' 하고 생각하는 것 뿐만 아니라 괜시리 동질감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같은 경우에도 TV에서 아무개를 볼때면 친근한 느낌이 들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두명의 유진이도 그런 이유 탓에 유치원에 다닐 적에 큰 유진이, 작은 유진이로 불리며 친한 친구 사이였던걸까?

 같은 학교, 같은 반 안에 유진이와 유진이가 있다. 공부 잘 하는 모범생 작은 유진이와 키 크고 활발한 큰 유진이. 두 유진이 모두 철면피같은 놈들에게 당한 성폭행 피해자이다. 큰 유진이는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한다. 작은 유진이는 유치원생 시절의 기억을 상실해버린다. 그래서 거의 10년만에 재회한 큰 유진이를 몰라본다.

 내가 보기에는 이들에게 있어 정말로 고통스러운 점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 자체보다는 성폭행 피해자인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색안경을 낀 위선적인 시선인 것 같다. 성폭행 피해자는 결코 순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무뢰한같은 성폭행범, 그 놈들이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더럽고 흉물스러운 존재인 것처럼 살며시 기피한다. 겉으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는 척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위선적일 때가 있다. 성폭행범들의 경우처럼 악할 때도 있다. 천사의 날개를 감추고 사는 착한 사람들처럼 착할 때도 물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천사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피조물? 아니면 악마의 작품? 그것도 아니면 하느님, 예수님의 자식들? 인간이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자식, 즉 인간에게 그들의 어버이가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누굴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악마의 자식도 천사의 자식도 아니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천사와 악마, 그 둘이 공존해 있으며 세상은 선과 악이 자연스레 뒤엉켜있는 상태인 것이다.

 어쨌든 두 유진이는 성폭행의 가련한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고 삐딱한 세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작은 유진이의 경우에는 앞서 말했듯이 그 때의 기억을 상실하는데, 그 기억을 지운 당사자는 놀랍게도 성폭행범이 아니라 유진이의 엄마였다. 유진이 엄마는 자신의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게 부끄럽고 창피해서, 유진이를 목욕탕으로 데려가 온 몸이 시뻘게 질 정도로 세게 박박 때를 민다. 때를 밀며 연신 "잊어버려! 하나도 남기지 말고 잊어버려!"를 외친다. 효과는 있었따. 하지만 그 기억, 유진이 엄마가 잊어버리라고 했던 기억뿐만 아니라 목욕탕의 일까지 15살이 되어서야 유진이는 비로소 떠올린다.

 그 다음의 사건의 전개는 내용을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갈등, 괴로움, 깊은 슬픔, 가출 등. 작은 유진이의 엄마는 왜 그랬던 것일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작은 유진이가 너무 불쌍했다. 그 엄마도 불쌍했다.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식을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고통과 차별이 붙어다닌다는 것을. 만약 내가 유진이같은 일을 당했더라면 우리 엄마도 유진이 엄마처럼 그랬을까? 그럴리가 없다. 안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누나와 내가 키우던 햄스터가 더럽다며 목욕을 시켜준다 해놓고 햄스터집에 수돗물을 콸콸, 가득 틀어 햄스터를 죽였던 엄마지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진이 엄마는 잘못된 방법을 써먹은 것이다. 더 아껴주고 보듬어 주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성폭행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무겁고 어두울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적잖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그런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좀 더 빨리 빠져들 수 있었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내가 3~4시간 만에 후딱 읽을 수 있었으니 그 누구에게나 그리 어렵지 않고 흥미로운 소설이 될 듯 싶다.

 마지막으로 유진이들에게 전한다.

"성폭행을 당한 일은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야. 물론, 그에 따른 차별과 곱지 않은 시선이 너희들을 따라 다닐 테지만, 힘을 내. 너희 곁엔 친구가 있잖아. 큰 유진이, 작은 유진이. 서로가 친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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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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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릴 적부터의 소원은 나만의 정원을 갖는 것이었다. 내 소유의 정원에서 온갖 화려한 꽃들을 키우고, 이곳저곳으로 가지가 쭉쭉 뻗어있는 활엽수와 소소하고 푸른 침엽수를 가꾸고 싶었다. <정원 일의 즐거움>의 헤르만 헤세와 <타샤의 정원>의 타샤 튜더처럼 말이다. 이런 나의 소소하지만 아직 미처 다 자라지 않은 소년에게는 가능치 못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그 아이, 그 소년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동구다.

동구가 마음 속에 간직했던,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정원은 산동네 중에서도 최고로 잘 사는 집의 넓은 정원이다. 그래서 마음껏 드나들 수 없었고, 멀리서 빼꼼히 들여다보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정원이라는 공간이 등장했을 때, 나는 그 곳이 주인공의 주된 터전이 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 곳에서 아이들이 히히덕대며 잰걸음으로 돌아다니거나 그곳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생활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다다를 수 없는 공간, 한없이 아름다운, 그래서 더욱 다가가기 힘든 그런 공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집 정원에 들어가려면 숨어 들어가는 수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 집 대문은 마치 아름다움을 수호하는 정원의 파수꾼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정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고, 이 소설의 흐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소설의 구성 방식은 흔히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들은 이 구성 방식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부정의 적응-갑작스런 행복-끝없는 추락.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밑바닥에서 맴돌다가 경사가 심하게 급등하고, 다시 밑바닥으로 맹렬히 추락하며, 그 바닥을 뚫고 더더욱 깊숙히 밑으로 내려간다. 그러니까 평평한 가로선에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V자를 뒤집어 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의 그래프가 완성된다.

부정의 적응. 부정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동구와 어머니는 대적하지 못하고,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매일같이 어머니 욕을 하고, 지청구를 일삼는 할머니와 어머니 말을 곧잘 따라 아내에게 번번이 상처를 안겨주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그들의 부정에 동구와 어머니는 적응이 된 듯이 보였다. 그런 일들이 거의 날마다 일어나는데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하루하루를 넘겨버린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이어지던 시대였으니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력 또한 만만치 않았으리라.

만약 내가 동구였더라면 어머니를 데리고 그 집에서 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런 콩가루 집안에서 무얼 더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동구는 그 고통을 참을 인자를 새기며 인내한다. 그래도 내 아버지잖아. 그래도 나의 하나뿐인 할머니잖아. 어른스런 동구의 모습때문일까. 더욱 연민이 일었다.

갑작스런 행복. 행운의 박이 터졌다. 무려 두 개 씩이나 연달아 터졌는데, 그 모두가 동구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우선, 동구의 동생인 영주가 태어난다. 내심 아들이길 소원했던 할머니는 일순간 실망했지만, 이른 나이에 동구도 잘 못하는 '읽기'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영주가 태어나자 동구는 동네방네 영주를 업고 다녔으며, 부정이 자리잡고 있던 집안에는 간만에 화기가 돌았다. 또한, 동구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담임선생님인 박영은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박영은 선생님은 지구의 중력을 무시한 듯, 사뿐한 걸음걸이로 그 우아함을 발산하며 걸었고, 그 모습에 동구는 선생님이 틀림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생각했다.

선생과 제자 사이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가당치도 않은 사랑에 피식 웃음이 돌았다.

끝없는 추락.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큰 슬픔이 있을까? 그 사람을 사랑한 만큼, 잃을 때의 슬픔 또한 그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구의 슬픔은 작은 연못이 아니라 크나큰 바다였으리라. 박영은선생님은 어느날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 학교에는 선생님이 데모에 참석하느라 학교에 나오지 않는 거라는 소문이 퍼진다.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박선생님... 동구는 단념한다.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을 기다려봤자 돌아오는 것은 점점 더 커지는 그리움이요, 씁쓸한 후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의 슬픔이 채 가시기 전에 영주가 죽어버린다. 장독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버린다. 단념할 수 있을까. 단념할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일까. 아니였다.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도 벅찬 슬픔이었다.

영주를 잃고 동구의 가족들은 점점 갈라지기 시작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파국에 이르렀고, 동구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주가 떠나고 며칠 후, 동구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본다.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마리 곤줄박이를 보았다. 황금빛 깃털을 가진 그 새는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상처를 입었을 뿐, 여전히 그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영주도, 박선생님도 저 곤줄박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그 두 명이 사실은 작은 상처만 입은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읽는 내내 동구를 지켜보며 내 마음 속에는 동감과 애정, 연민, 대견함이 일었다. 인생에 대해 2% 부족한,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그 불완전한 상태. 그 상태에 동감했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데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하고, 읽는 것 또한 힘들어하는 동구의 난독의 모습에서 일말의 연민이 들었고, 나 또한 저런 시절이 있었지하며 그 시절로의 회상에 잠겨들었다. 성장 소설에는 어린 시절로의 회상이 뒤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동구가 대견하기도 했는데, 어린 영주를 보살피는 녀석의 따뜻한 마음씨에 내 마음까지 훈훈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래서 영주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애통했다.

사랑과 애정의 배반, 그것은 죽음이었으며 한 인간의 성숙의 거름이 되었다.
금빛 찬란한 유년기를 아름다운 정원에서 보낸 소년 동구의 삶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아름다움과 동시에 한 줄기 슬픔의 흉터가 가슴 한 복판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흉터는 소년의 여린 가슴에 깊숙이 각인될 것이며,
성숙의 치유로 그 흉터는 서서히 아물어 갈 것이다.

소년이여, 성숙해져다오.
그대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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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산 대교북스캔 클래식 5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오현수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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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여태껏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을 뽑으라면 '빨간머리 앤'이 해당될 것이다.
그만큼 '빨간머리 앤'이라는 작품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책을 조금이나마 읽게 된 계기도 '빨간머리 앤' 덕분이었고,
'책은 지루하다'라는 생각을 바로잡아 준 책도 '빨간머리 앤'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서실에서 책을 고르는데 '루시모드 몽고메리'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사랑의 유산'이라는 책에 적혀있는 글씨였는데,
'빨간머리 앤'을 떠올리며 그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사랑의 유산? 이게 무슨 뜻일까... 잘 모르겠어서 제쳐두고 내용을 보았다.
이 책에는 아쉽게도 빨간머리 앤이 등장하지 않았고, 내용도 생판 달랐다.
다크집안과 펜할로우 집안의 이야기였는데, 이 두 집안에서는
대대로 커플을 배출해내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다크단지'라는 귀중한 보물과도 같은 단지를 대대로 물려주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의 중심사건이 바로 이 다크단지로 인해 벌어진다.
다크단지를 소유하고 있던 과부 베키가 위독해지면서 누군가에게 다크단지를
물려줘야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 상황이 친척들에게 알려졌을때 친척들의 반응이 너무도 기가막혔다.
아픈 사람의 안부를 걱정하기는 커녕 단지가 자기 손아귀에 넘어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귀중한 유품들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앞으로 이야기의 전개과정이 예상되었고 내 예상은 맞아들었다.

바로 '단지 쟁탈전'시작 된 것이다.

단지 쟁탈전은 치열하다 못해 목숨을 건 사투와도 같았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단지를 줄 수 없다.' 라는 베키 아주머니의 말로 인해
말만 하면 욕이 튀어나오던 사람은 욕이 입 밖을 뚫고 나오지 못했으며,
성격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또한, '다른 사람 흉보기'라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크단지라는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 애를 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재물은 '부와 명성' 이라는 물질적 가치를 주는 것 뿐인데...
사랑이나 우정,희망에 비하면 턱 없이 하찮은 것들인데...

물론 다크와 펜할로우 집안의 사람들 모두 다크단지에 정신이 팔려있는 건 아니었다.
한 소녀는 다크나 펜할로우가 아닌 다른 집안의 청년과 사랑하고 있었으며,
한 과부는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을 찾았다. 또, 한 과부는 새 짝을 찾았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따뜻한 마음씨를 보여주었다.
그에 반해 한 형제의 사이는 마치 원수와도 같아졌고,
사람들간의 사이는 점점 벌어져가고 있었으며 서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치열한 다툼 속에서 다크단지는 과연 누구의 손에 넘어갔을까?
정답은 '아무도 아니다.' 이다. 단지가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지는 깨져버리고, 한 소녀와 두 과부가 자신들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끝이 난다.

다크단지가 깨져버리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은 이럴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왜 이렇게 살아왔지?'
'내가 겨우 저 단지 때문에 애를 썼단 말인가?'
'내가 겨우 저 단지 때문에 나의 형제를 원수와도 같이 대했단 말인가?'
'내가 겨우 저 단지 때문에 사람들과의 사이가 벌어졌었단 말인가?'

후회와 안타까움이 섞인 반응이 차례차례 나올 것이다.
또한 깊이 반성할 것이고 그동안 자신들의 행동이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의 노력은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나는 단지의 깨짐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가 깨지지 않았더라면, 단지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재물에 대한 욕망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테니까..
또, 단지 쟁탈전은 영원히 끝나지 않았을 테고 사람들간의 다툼은 끝이 나질 않을 테니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김과 동시에 크나큰 깨달음이 느껴졌다.
단지는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찮은 것이었다.
아무리 많고 많은 재물과 부, 명성이라 할지라도 사랑보다는 하찮은 것이었다.
이 책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이러한 진리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단지를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단지는 누가 차지했는가?
아무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사랑은 여러 사람사이에서 싹 트였다.

비로소 사랑의 유산의 뜻을 알게 되었다.
단지를 향한 사람들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진정한 유산은
바로 사랑이였다.
재물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도 아닌 사랑이 바로 위대한 유산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재물도 아닌, 돈도 아닌, 귀중한 물건도 아닌
바로 사랑이였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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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블로그 - 익명의 변호사
제레미 블래치먼 지음, 황문주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남의 일상을 엿보는 일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 사람이 몇 시에 일어나서 회사에 가고, 아침으로 무얼 먹으며, 누구에게 면박을 당하는지엿보는 일은 한편으로는 위험하지만,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서 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일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블로그 또한 그렇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데 책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블로그다.이책을 보는 것은 마치 타인의 블로그에 들어가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게시물을 확인하는, 그런 느낌이다.

세계적인 로펌의 인사담당 파트너가 블로그를 통해 들춰내는 로펌의 진실. 그들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회사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 받으며, 직위에 따라 사무실의 크기도, 제공 받는 음식도 다르다. 오죽하면 생일파티를 파트너들에게는 거하게, 화려한 케이크에 각종 아이스크림, 고급의 브라우니를 차려놓고 해주고일반 직원들에게는 오레오 쿠키 한 박스 휙- 던져주고 말겠는가. 그렇다. 동물의 세계에선 강한 동물이 살아남기 마련이듯이, 로펌에선 능력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당신은 회사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야. 몸값을 하지 못한다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이 구절을 읽을 때 로펌만의 '약육강식'의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회사원들은 회사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란다. 그리고 몸값을 하지 못한다면 당장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마치 우리가 산 물건이 쓸모가 없어지면 그것을 가차 없이 내동댕이 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린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로 이용하지만,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점점 블로그에 중독되고 도취된다.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차기 사장으로 유력한 '머저리', 날마다 자기 물건을 가져가는 '사탕도둑'등 그의 직장 동료들의 위선과 단점을 까발리고 '익명의 변호사'라는 가명으로 블로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한다. 날이 갈수록 블로그의 이용자 수는 늘어나고, 많은 독자들이 생겨난다. 그럴수록 '익명의 변호사'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염려하지만, 쉽사리 블로그의 글을 삭제하거나 자신의 블로그를 폐지하지 못한다.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블로그에 이미 발을 담궜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에게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이 책에 의하자면, 변호사들은 하루 16시간까지도 일을 한다. 그들 인생의 1순위는 달콤한 잠도 애틋한 사랑도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일>인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익명의 변호사>라는 제목이 이 책에 쓰인 소재들과 서로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블로그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블로그를 운영할 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별명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또한, 이메일이나 블랙베리도 그렇다. 자신을 증명하는 절차도 없이, 그냥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현대 사회는 '익명'이 대세고, '익명'이 최선이 된 것이다.

'익명의 변호사'는 그에게 이봐요, 난 당신을 알아요. 누구누구씨 맞죠?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글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그 글이 다 내가 지어낸 거라면 어쩔래? 이런 식으로 응수한다. 그래, 맞아. 믿을 만한 게 못돼. 이름도 '익명'인데, 블로그에 있는 글이라고 정확하란 법 있어?

이 책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믿을 수 없다.왜냐고? 블로그는 믿을 만한게 못 되니까!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본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익명'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하여 나는 블로그를 믿지 않는다. 믿지는 않지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즐겁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간에 나는 즐겁고 유쾌하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간에 나는 매일 블로그에 들리고 매일 블로그에 발자취를 남긴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인물이 남겨 놓은 블로그의 게시물을 들여다 보면서, 그와 나는 소통한다. 서로 누군지도 모르면서 서로의 글을 읽고, 덧글을 남기고, 즐거워한다.

그게 매력 아닐까? 다 알면 재미없잖아? 따분하고 식상하잖아?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이 블로그를 두고 생긴 말이 아닐까 싶다. 서로 너무 잘 알아 사생활 피해보는 것보다 서로 모르면서 즐거운게 백배, 아니 수천배 낫다.

블로그에 들어가 봐야겠다. 누군지 모를 미지의 인물이 나의 블로그에 수시로 방문할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 미지의 인물과 나는 서로 미지의 소통을 할 것이다. 서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밝히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 없는 일이다.

왜? 나는 '익명'이니까!

그러므로 블로그는 자유로움이며, 편안함이며, 가장 좋은 소통인 것이다.

아, 이러다 블로그에 투자할 시간이 없어지겠어. 이제 <블로그> 탭을 누르고 블로그에 갈 거야.

여러분 안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러분, 잘 있으라구!

하지만 내 글은 읽어줘야 해. 그게 블로그를 하는 이유니까.

미지의 소통. 그게 블로그를 하는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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