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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어릴 적부터의 소원은 나만의 정원을 갖는 것이었다. 내 소유의 정원에서 온갖 화려한 꽃들을 키우고, 이곳저곳으로 가지가 쭉쭉 뻗어있는 활엽수와 소소하고 푸른 침엽수를 가꾸고 싶었다. <정원 일의 즐거움>의 헤르만 헤세와 <타샤의 정원>의 타샤 튜더처럼 말이다. 이런 나의 소소하지만 아직 미처 다 자라지 않은 소년에게는 가능치 못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그 아이, 그 소년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동구다.
동구가 마음 속에 간직했던,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정원은 산동네 중에서도 최고로 잘 사는 집의 넓은 정원이다. 그래서 마음껏 드나들 수 없었고, 멀리서 빼꼼히 들여다보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정원이라는 공간이 등장했을 때, 나는 그 곳이 주인공의 주된 터전이 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 곳에서 아이들이 히히덕대며 잰걸음으로 돌아다니거나 그곳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생활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다다를 수 없는 공간, 한없이 아름다운, 그래서 더욱 다가가기 힘든 그런 공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집 정원에 들어가려면 숨어 들어가는 수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 집 대문은 마치 아름다움을 수호하는 정원의 파수꾼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정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고, 이 소설의 흐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소설의 구성 방식은 흔히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들은 이 구성 방식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보려고 한다. 부정의 적응-갑작스런 행복-끝없는 추락.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밑바닥에서 맴돌다가 경사가 심하게 급등하고, 다시 밑바닥으로 맹렬히 추락하며, 그 바닥을 뚫고 더더욱 깊숙히 밑으로 내려간다. 그러니까 평평한 가로선에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V자를 뒤집어 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의 그래프가 완성된다.
부정의 적응. 부정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동구와 어머니는 대적하지 못하고,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매일같이 어머니 욕을 하고, 지청구를 일삼는 할머니와 어머니 말을 곧잘 따라 아내에게 번번이 상처를 안겨주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그들의 부정에 동구와 어머니는 적응이 된 듯이 보였다. 그런 일들이 거의 날마다 일어나는데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하루하루를 넘겨버린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이어지던 시대였으니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력 또한 만만치 않았으리라.
만약 내가 동구였더라면 어머니를 데리고 그 집에서 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런 콩가루 집안에서 무얼 더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동구는 그 고통을 참을 인자를 새기며 인내한다. 그래도 내 아버지잖아. 그래도 나의 하나뿐인 할머니잖아. 어른스런 동구의 모습때문일까. 더욱 연민이 일었다.
갑작스런 행복. 행운의 박이 터졌다. 무려 두 개 씩이나 연달아 터졌는데, 그 모두가 동구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우선, 동구의 동생인 영주가 태어난다. 내심 아들이길 소원했던 할머니는 일순간 실망했지만, 이른 나이에 동구도 잘 못하는 '읽기'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영주가 태어나자 동구는 동네방네 영주를 업고 다녔으며, 부정이 자리잡고 있던 집안에는 간만에 화기가 돌았다. 또한, 동구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담임선생님인 박영은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박영은 선생님은 지구의 중력을 무시한 듯, 사뿐한 걸음걸이로 그 우아함을 발산하며 걸었고, 그 모습에 동구는 선생님이 틀림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생각했다.
선생과 제자 사이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가당치도 않은 사랑에 피식 웃음이 돌았다.
끝없는 추락.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큰 슬픔이 있을까? 그 사람을 사랑한 만큼, 잃을 때의 슬픔 또한 그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구의 슬픔은 작은 연못이 아니라 크나큰 바다였으리라. 박영은선생님은 어느날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 학교에는 선생님이 데모에 참석하느라 학교에 나오지 않는 거라는 소문이 퍼진다.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박선생님... 동구는 단념한다.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을 기다려봤자 돌아오는 것은 점점 더 커지는 그리움이요, 씁쓸한 후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의 슬픔이 채 가시기 전에 영주가 죽어버린다. 장독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버린다. 단념할 수 있을까. 단념할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일까. 아니였다.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도 벅찬 슬픔이었다.
영주를 잃고 동구의 가족들은 점점 갈라지기 시작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파국에 이르렀고, 동구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주가 떠나고 며칠 후, 동구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본다.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마리 곤줄박이를 보았다. 황금빛 깃털을 가진 그 새는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상처를 입었을 뿐, 여전히 그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영주도, 박선생님도 저 곤줄박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그 두 명이 사실은 작은 상처만 입은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읽는 내내 동구를 지켜보며 내 마음 속에는 동감과 애정, 연민, 대견함이 일었다. 인생에 대해 2% 부족한,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그 불완전한 상태. 그 상태에 동감했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데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하고, 읽는 것 또한 힘들어하는 동구의 난독의 모습에서 일말의 연민이 들었고, 나 또한 저런 시절이 있었지하며 그 시절로의 회상에 잠겨들었다. 성장 소설에는 어린 시절로의 회상이 뒤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동구가 대견하기도 했는데, 어린 영주를 보살피는 녀석의 따뜻한 마음씨에 내 마음까지 훈훈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래서 영주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애통했다.
사랑과 애정의 배반, 그것은 죽음이었으며 한 인간의 성숙의 거름이 되었다.
금빛 찬란한 유년기를 아름다운 정원에서 보낸 소년 동구의 삶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아름다움과 동시에 한 줄기 슬픔의 흉터가 가슴 한 복판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흉터는 소년의 여린 가슴에 깊숙이 각인될 것이며,
성숙의 치유로 그 흉터는 서서히 아물어 갈 것이다.
소년이여, 성숙해져다오.
그대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