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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블로그 - 익명의 변호사
제레미 블래치먼 지음, 황문주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남의 일상을 엿보는 일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 사람이 몇 시에 일어나서 회사에 가고, 아침으로 무얼 먹으며, 누구에게 면박을 당하는지엿보는 일은 한편으로는 위험하지만,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서 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일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블로그 또한 그렇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데 책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블로그다.이책을 보는 것은 마치 타인의 블로그에 들어가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게시물을 확인하는, 그런 느낌이다.
세계적인 로펌의 인사담당 파트너가 블로그를 통해 들춰내는 로펌의 진실. 그들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회사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 받으며, 직위에 따라 사무실의 크기도, 제공 받는 음식도 다르다. 오죽하면 생일파티를 파트너들에게는 거하게, 화려한 케이크에 각종 아이스크림, 고급의 브라우니를 차려놓고 해주고일반 직원들에게는 오레오 쿠키 한 박스 휙- 던져주고 말겠는가. 그렇다. 동물의 세계에선 강한 동물이 살아남기 마련이듯이, 로펌에선 능력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당신은 회사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야. 몸값을 하지 못한다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이 구절을 읽을 때 로펌만의 '약육강식'의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회사원들은 회사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란다. 그리고 몸값을 하지 못한다면 당장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마치 우리가 산 물건이 쓸모가 없어지면 그것을 가차 없이 내동댕이 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린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로 이용하지만,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점점 블로그에 중독되고 도취된다.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차기 사장으로 유력한 '머저리', 날마다 자기 물건을 가져가는 '사탕도둑'등 그의 직장 동료들의 위선과 단점을 까발리고 '익명의 변호사'라는 가명으로 블로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한다. 날이 갈수록 블로그의 이용자 수는 늘어나고, 많은 독자들이 생겨난다. 그럴수록 '익명의 변호사'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염려하지만, 쉽사리 블로그의 글을 삭제하거나 자신의 블로그를 폐지하지 못한다.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블로그에 이미 발을 담궜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에게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이 책에 의하자면, 변호사들은 하루 16시간까지도 일을 한다. 그들 인생의 1순위는 달콤한 잠도 애틋한 사랑도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일>인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익명의 변호사>라는 제목이 이 책에 쓰인 소재들과 서로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블로그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블로그를 운영할 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별명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또한, 이메일이나 블랙베리도 그렇다. 자신을 증명하는 절차도 없이, 그냥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현대 사회는 '익명'이 대세고, '익명'이 최선이 된 것이다.
'익명의 변호사'는 그에게 이봐요, 난 당신을 알아요. 누구누구씨 맞죠?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글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그 글이 다 내가 지어낸 거라면 어쩔래? 이런 식으로 응수한다. 그래, 맞아. 믿을 만한 게 못돼. 이름도 '익명'인데, 블로그에 있는 글이라고 정확하란 법 있어?
이 책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믿을 수 없다.왜냐고? 블로그는 믿을 만한게 못 되니까!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본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익명'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하여 나는 블로그를 믿지 않는다. 믿지는 않지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즐겁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간에 나는 즐겁고 유쾌하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간에 나는 매일 블로그에 들리고 매일 블로그에 발자취를 남긴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인물이 남겨 놓은 블로그의 게시물을 들여다 보면서, 그와 나는 소통한다. 서로 누군지도 모르면서 서로의 글을 읽고, 덧글을 남기고, 즐거워한다.
그게 매력 아닐까? 다 알면 재미없잖아? 따분하고 식상하잖아?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이 블로그를 두고 생긴 말이 아닐까 싶다. 서로 너무 잘 알아 사생활 피해보는 것보다 서로 모르면서 즐거운게 백배, 아니 수천배 낫다.
블로그에 들어가 봐야겠다. 누군지 모를 미지의 인물이 나의 블로그에 수시로 방문할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 미지의 인물과 나는 서로 미지의 소통을 할 것이다. 서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밝히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 없는 일이다.
왜? 나는 '익명'이니까!
그러므로 블로그는 자유로움이며, 편안함이며, 가장 좋은 소통인 것이다.
아, 이러다 블로그에 투자할 시간이 없어지겠어. 이제 <블로그> 탭을 누르고 블로그에 갈 거야.
여러분 안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러분, 잘 있으라구!
하지만 내 글은 읽어줘야 해. 그게 블로그를 하는 이유니까.
미지의 소통. 그게 블로그를 하는 이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