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벨기에 출신 작가 아멜리 노통. 이 작가의 작품을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그녀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참신함, 아니 참신함을 뛰어넘는 충격을 받곤 한다. 물론 이번에도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나의 머릿 속을 강타했다. 왜 충격을 받느냐고?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굳이 설명해주지. 그녀만의 잔혹하고도 유머러스한 독특한 문체, 단순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주제 전달 능력, 마지막의 깔끔하고도 허무한 반전. 특히 그녀만의 독특한 문체와 '죽음'이라는 깔끔한 결말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그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배가시켜준다.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이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문체, 즉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노통은 그 조건을 매우 흡족히 만족시키는 작가다.

<오후 네시>에는 화자인 에밀과 그의 아내 쥘리에트, 이웃집에 사는 베르나르댕 부부가 등장한다. 에밀 부부는 65세의 노부부로, 황혼기를 평온하고 안락하게 보내기 위해 외딴 지방에 있는 호젓한 집으로 이사를 온다. 에밀과 쥘리에트는 조용한 '우리 집'이 좋았고, 그 곳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뿐이었고, 불행이 행복의 뒤를 맹렬히 쫓아왔으며, 결국 행복은 불행에게 뒤쳐지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일은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에밀부부의 이웃집에는 베르나르댕 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에밀 부부의 '유일한' 이웃이었다. 베르나르댕 부부 중 남편 팔라메르 베르나댕씨가 '그 일'의 주인공이었다.

베르나르댕씨는 오후 4시만 되면 1분도 오차 없이 에밀 부부의 집 문을 두들겨댔다.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가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것 마냥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앉았다'보다는 '주저앉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뚱뚱한 비곗덩어리가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며 걷기에는 꽤나 힘들었을 텐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것처럼 의자를 발견하고는 그 의자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비로소 자신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셈이니까. 베르나르댕씨는 안락의자에 주저앉아서 문자 그대로 '개기고'있었다. 그리고 절대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었으며, 대답할 때는 항상 긍정 아니면 부정의 대답이었다. 만일 주관식으로 된 질문을 던지면 그는 질문자를 경멸에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처음에는 새 이웃이 왔으므로 어쩔 수 없이 예의상으로 한 번 들른 줄 알았다. 물론 집주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돼지같은 인간은 매일 오후 4시면 항상 찾아와 에밀 부부를 괴롭혔다. 이쯤 됐을 때, 나는 베르나르댕씨의 정체가 궁금했다. 에밀부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걸까? 아니다... 용건이 있으면 말이라도 할 터인데, 대답만 하지 않는가. 그럼 에밀 부부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면, 커피 얻어 마시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르나르댕씨 덕분에 에밀 부부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역시 세상에는 괴짜라는 존재가 실재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괴짜 중에 이런 괴짜는 생전 처음 본다. 이 소설 속의 괴짜는 만사가 불만스럽고, 귀찮다는 표정을 얼굴에 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이 자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나 있는 걸까?

계속되는 불청객의 방문에 화가 난 에밀은 어느날 그 괴짜를 쫓아내 버렸고, 그 괴짜는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에밀 부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이 얼마나 손 쉽고 간단하다 못해 허무한 해결인가? 그동안 에밀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를 못 쫓아낸 것이었고, 그에게 베푸는 친절이 오히려 에밀 자신에게는 화가 되고만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예의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면 그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쌓일 수도 있고, 상대편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속의 베르나르댕씨처럼 무례하고 뚱뚱한 노인한테 예의를 꼭 갖춰야 할까? 아무리 경로 우대라고는 하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무례함에는 무례함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내가 여지껏 한 말은 예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예의를 지키느라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는 예의라는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왜? 친구니까! 나 자신을 진실하게, 유리처럼 투명하고 그대로 보여주니까! 예의라는 표장을 하지 않고 나의 본모습으로 대면하니까!

끝난게 아니다. 베르나르댕씨는 그 후로 에밀 부부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다른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그 살덩어리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에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에밀이 그를 구해준 것이다. 이런 에밀의 행동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테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에밀 자신은 그를 구해준 것을 후회했고, 어느날 밤 그를 죽인다. 에밀은 베르나르댕의 삶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기쁨과 행복을 모르고, 무언가에 관심 하나 없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뚱뚱하고... 그가 살 이유는 없다고 에밀은 판단했고, 그를 죽이는 것이 그를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죽였다.

조금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 허무한 결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에밀이 그를 죽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를 위해서이지만, 원래 이유는 그가 혐오스러워서이다. 그 뚱보는 매일 오후 4시마다 그와 그의 아내를 괴롭혔고,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고 하기는 커녕, 왜 나를 살렸지? 왜 나를 못살게 굴지? 자살할 용기를 얻기 위해 70년을 기다렸어. 근데 네가 뭔데 날 살려? 네가 날 죽여줄 것도 아니면서! 라는 식의 경멸의 눈빛으로 에밀을 쏘아보았다. 이러한 일들을 참지 못하고 에밀의 속에 잠자코 있던 다혈질적이고 포악한 또 다른 에밀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인간의 내면에는 '또다른 나'가 실존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인간의 마음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내면과 그들의 자아는 그 누구도 정확히 모르는 법.

이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앞으로는 내 안에 있는 본능적 자아, 다른 말로하면 악을 잘 제압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하이드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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