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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
필립 리브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널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꼭 해리포터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거든. 6권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가 출간됨과 동시에 후딱 읽어버리고 이름 모를 공허감에 빠져 푸드득거리던 나로서는, 나를 또 다른 환상세계로 인도해줄 너와 같은 녀석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해. 너의 첫인상이라고 하자면, 정말이지 판타지적인 판타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 은백색 제목에 여덟 방향의 별무늬, 그리고 네가 큰 의미를 부여한 거미 문양이 너를 장식하고 있었지. 특히나 각 모서리 부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하나의 표식처럼 보이는 은백색 거미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어. 처음에는 웬 거미야? 하고 거치적거려 했는데 너를 읽고 나니 표지에 왜 거미가 그려졌는지 이유를 알겠더라고. 너의 말에 따르자면 거미가 ‘최초의 존재들’이라지 아마? 그것만 빼면 난 정말 네가 맘에 들어. 왜 그것만 빼느냐고? 난 거미가 싫거든. 거미가 아무리 제일 높은 조상님이라 할지라도 난 절대로 거미에게 절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손을 휘휘 저어 멀리 쫓아버릴 지도 모르지. 아니, 모르지가 아니라 확실해.
네 머리에 붕 떠있는 새치머리(첫 페이지)를 막상 보았을 땐 적잖이 어려움이 있었어. 소설은 허구의 세계, 즉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하잖아. 그래서 난 소설을 읽을 때 항상 상상을 하고 내 머릿속에 책장 하나하나의 단상들을 떠올려봐. 그런데 너의 새치머리를 보는 순간 좀 아득하더라고. 앙증맞고 신선하고, 위로 쭉쭉 뻗친, 그래서 신선한 너의 새치머리였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동떨어진 배경 때문에 상상하는데 꽤 애를 먹었어. 그래도 내가 누구야. 상상마루가 아니겠어? 그래서 상상하고, 너의 이미지들을 내 머릿속으로 끄집어들였지.
말 그대로 우주를 떠도는 집인 라크라이트를 먼저 상상해. 아니지,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는 게 더 먼저지. 집을 상상한 후에는 주인공인 아트와 머클의 얼굴을 떠올려봐. 표지에 이미 그림이 나와 있어 선입견이 살포시 심어졌지만, 내 나름대로의 아트와 머클을 상상하는데 성공했지. 머클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산스러운 아이, 영국 신사들을 찬양하는 새침데기. 그리고 아트는 그런 누나를 둔 멋진 소년! 꼭 해리 같다니까! 그리고 그들의 아빠, 지적인 연구원의 이미지를 떠올려. 참 멋진 아빠야. 그리고 주변 사물들과 생물체들을 떠올리지. 하인 역할을 수행하는 로봇들과 중력 생성 장치, 멈비 어류형 변종, 그리고 둥둥 돼지들까지. 둥둥 돼지들의 모습은 참 귀여웠어. 풍선처럼 부풀어있는 몸뚱이에 기막힌 추진 에너지란! 기막힌 추진 에너지, 그건 바로 방귀였지. 뽕- 뽕- 방귀를 뀌어대며 라크라이트를 가로지르는 둥둥 돼지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감돌았어. 아유, 귀여운 것들!!
내가 상상하기 가장 어려웠던 건 바로 아트와 머클의 어머니야. 상상하는 것 자체는 쉬웠지. 하지만 그 상상이 맞는지, 아트와 머클과 그녀의 남편에게 썩 어울릴만한 상상인지, 그녀의 가족들이 맘에 들어 할지 몰랐단 말이야. 이미 가족들 곁을 떠나버린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란, 그녀가 즐겨 기르던 ‘노래하는 꽃들’ 의 노래를 듣는 것만큼이나 몽환적이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어. 그래서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었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상상한 그녀의 모습은 정말 만족스러웠지. 청아한 분위기에 우아한 발걸음, 그리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그 정열의 눈빛. 내가 상상한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달려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어.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내 상상의 한 조각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 당신네들의 어머니를 재회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그녀에 대해 더 말해보자면 꼭 해리의 어머니 같았어. 자식의 마음속에 한 조각 추억을, 또는 아련한 느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모습이 꼭 닮아있었어. 그러고 보니 판타지라는, 어찌 보면 현실과 무관하면서도 동떨어진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가족’이 등장하는 것 같아. 만약 가족이, 인정이 없다면 판타지소설은 한낱 허구덩어리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사람 사는 맛이 있기에 판타지소설이 그나마 현실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손길을 차지하는 게 아니겠어? 판타지도 결국엔 사람 사는 얘기라는 것이 맘에 드는데, 이것도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더욱 사람 사는 맛이 풀풀 나는 거겠지. 현실과 비현실이 가장 멋들어지게 뒤섞인 것이야말로 바로 판타지소설이 아닐까싶어.
학교에서 너를 읽고 있는데 같은 반 친구 녀석이 말하기를, 자기는 판타지소설이 싫다고 하네? 예전에는 적잖이 재밌고 즐거웠는데, 자꾸 읽다보니까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싫다고 말하더라고. 그러고는 나한테 왜 판타지소설을 읽느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대답했지. 내가 왜 판타지소설을 보느냐고? 그건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찾기 힘든 한 줄기 빛을 보기 위해서라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세상 속에서,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너무도 ‘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기 위해서라고. 날개 달린 듯 자유로운 상상과 어린아이의 너스레처럼 즐거운 환상을 만끽하여 ‘철에 찌든’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지. 환상을 믿지 않는 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라크라이트야. 너의 깜찍한 새치머리부터 시작해서 텁텁한 발 밑창(마지막 페이지)까지 훑어봤던 그 시간은 내게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어. 철없는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가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의뭉스러운 상상을 깔짝대는 것처럼 매우 들뜨고 기분 좋은 느낌을 선사해주었어. 항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너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부디 건강하렴. 상하지 않고, 접히지 않고, 먼지 쌓이지 말고(내가 그렇게 해줄게.)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주길 바라. 그럼 안녕. 아니, 다음에 또 봐. 반드시 다음에 또 보자고... 영원한 헤어짐의 인사가 아니라 다음에 또 보자는 작별 인사를 해주고 싶구나. 그럼 다음에 또 봐! 그 때도 내 상상에 환상을 더해줘!
- 라크라이트, 너의 어느 한 독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