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 2
김정일 지음 / 두리미디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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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빨강과 냉정의 파랑을 섞으면 따스함과 시원함이 반반으로 얼룩진 보랏빛이 탄생한다. 보라색이 주는 느낌은 얼핏 따스하고 깊고 어디까지나 은은하게만 비쳐진다. 하지만 보라색이 정말로 빨강과 파랑의 합작품이라면, 따스함과 깊음과 은은함의 이면에 분명히 이원적인 인상이 강렬히 존재하지 않을까한다. 죽음의 반대편에 에로스가 부상하고 어둠의 저편에 빛이 도사리듯, 그리고 사랑이 아픔을 주듯이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 역시 보랏빛을 띠고 있다. 물론 보랏빛을 밝히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사랑이 결코 사랑으로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의 고통과 불안의 고통이 뒤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 하면 빨간빛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이나 연분홍빛 하트 문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리고 온 세상에는,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 영혼들이 즐비하며 사랑의 어려움에 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고민과 사랑의 어려움, 그리고 사랑 뒤편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대기하고 있는 고통의 얼굴을 조명하는 조명기구가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져보자면 에세이에 속하는 이 책이, 나는 나름대로 재밌었다. 단순히 사랑, 사랑, 지겹도록 사랑, 사랑,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들과 속성들을 보여주었던 터라 술술 넘어갔다. 우선,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곳곳에 나오는 소설형식의 문단이 흥미를 더해주었다. 마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재연’하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실제적인 사례라고 여기게 되어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남자친구 문제로 고민을 하는 여자의 상담 사례를 소설로 풀어놓거나, 남학생이 자신의 연애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아~ 그렇구나!’하는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저자가 결국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을 잘하는 방법,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잘 간직하자는 것이다. 책 속을 보면 여러 연인들이 피치 못할 의견 차이로 인해 다툼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마치 상담자처럼 그들을 향해 좋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의 행복감과 늘 붙어 다니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결국엔 우리네 인간들 스스로가 겪어야하는 것이고, 그것을 비로소 견뎌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워야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 외에 주목된 점을 보태보자면 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좋은 주목거리고, 다른 한 가지는 눈살 찌푸려지는 주목거리다. 우선, 저자는 아마도 영화광이었나 보다.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끊임없이 영화 얘기를 놓지 않는다. 사랑은 스크린처럼 멈추는 것 없이 파르륵 스쳐지나 가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저자의 영화 이야기는 흥미를 돋우는 역할로서는 아주 훌륭했다. 그에 반해 눈살 찌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면 과도하게 선정적이라고 할까, 과격한 묘사다. 책 곳곳에 ‘죽이고 싶을 만큼’이라는 정도의 묘사가 나오는데, 아무리 큰 정도라고 할지라도 죽이고 싶을 만큼이라니!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이고 싶을 만큼이란다. 이 표현을 읽으면서 간혹 가다 깜짝 놀라곤 했다. 죽을 만큼도 아니고 죽이고 싶을 만큼……. 언어를 구하는 데 보다 유순한 단어를 택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을 추구한다. 추구를 넘어 갈구하기도 하고, 사랑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고 곤혹스럽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고 전부 다 편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사랑을 조금이나마 경계해야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사랑을 본능으로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서로 조절하고 아끼고, 가두려고 하지 말고 집어 삼키려 하지 말고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사랑에서의 필연도, 우연도 결국에는 우리 인간이 결정해야할 문제다. 그 보랏빛이 따스함을 전해줄지 고통을 안겨 줄지는 오직 당사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양면적인 보랏빛을 어떤 각도로 비추어 보느냐에 따라서, 사랑은 정열을 불태울 수도 있고 차갑게 식어버릴 수도 있다. 부디 사랑을 만들어 갈 때에는, 빨간색 물감과 파란색 물감의 비율을 적당히 유지할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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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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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한적함을 더해주는 늦은 밤. 새벽 2시였다. 평소 같으면 곯아 떨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나는 그때 뭘 하고 있었지? 누워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누워서 책을 봤다. 오른쪽 얼굴과 베개의 천이 맞닿아 포근한 상태에서 모로 누워, 책 뒷표지를 이불 바닥에 눕히고 오른손으로 책을 감쌌다. <오늘의 거짓말>이었다.

 

정이현, 그녀의 도시적 감수성은 여전하다. 현대인들의 현실적인 일상을 소설의 허구를 통해 재현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이현의 단편소설들은 굉장히 사실적인데, <오늘의 거짓말>에서 역시 소설이 일상으로 느껴지는 뉘앙스가 풀풀 날콩처럼 비릿하다. 한 마디로 리얼하다고 해야하나? 그렇다. 날콩의 비릿함과도 같이 찌릿, 신경을 자극하는 약간의 도발과 마치 소설이 아닌 듯 가상을 뒤엎는 리얼함. 화면에 담긴 정물을 보는 것처럼 똑바르면서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처럼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그녀의 소설은, 정곡을 찌르지는 못해도 숨은 심연을 지그시 가리키는 면모를 보인다.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트렌디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달리 여성의 트렌드보단 개인적 낭만의 갈구와 현실의 순응, 결여된 삶에 대한 만족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결핍은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적응으로 전락하고, 낭만을 품 속에 꿈꾸며 살면서도 쉽사리 자신의 인생을 향해 굿바이! 외치지 못하는 주인공들은 영락없는 체제귀속형 인물이다. 여태까지 먹어 온 아이스크림 맛에 길들여져 다른 종류의 아이스크림은 입에 대지도 못하는, 새 아이스크림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직접 아이스크림 표면 위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싶기도 하면서 미지의 맛이 두려워 늘 먹던 아이스크림만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과연 낭만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 수 있을 지는 결과가 불 보듯 뻔하다. 「어금니」에서 아말감의 빈자리는 결국 채워지지 않듯, 「타인의 고독」에서 이혼한 부부가 뺑소니를 내고 서로 묵인하듯, 「오늘의 거짓말」에서 주인공은 결국 '당신'에게 편지를 부치지 않듯, 현실을 직시함에 따라 그 시선의 상은 결국에 막다른 골목길처럼 지날 수 없는 것이다. 꿈은 꾸지만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는 이들, 즉 치열한 세상 속에서 일찍이 '주제 파악' 잘 한 현대인들의 이야기. 낭만의 아이스크림 대신 이대로 아이스크림을 선택한 자들의 건조한 현실극. 이것이 바로 낭만이 거짓말로 그 의미가 변질된 현대사회 속의 <오늘의 거짓말>이다.

 

「빛의 제국」을 보면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모아놓은 학교가 등장한다. 학교 측은 자신들이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선도하며 학생들 또한 만족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실상이 사회 속의 진실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한 학생의 의문의 죽음이 대변하고 있다. 학교 졸업 후 잘 나가는 사람과 학교 재학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 같은 절차를 거쳤는데 결과는 어찌 이리도 다른지. '빛의 제국'의 빛이 반대편에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기라도 한 것일까. 「빛의 제국」은 추리적인 전개 방식의 스릴감과 함께 부조리한 현실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이다. 여기서 저자의 역할은 잔잔한 세상 속에 숨어있는 발칙함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귀여운 인형 속에 감춰진 진상을 마치 인형뽑기하듯 착착 낚아올리는 진실의 강태공처럼. 때로는 위악적인 인간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박완서는 정이현이 발칙할 정도로 위악적인 여자인 줄 알았다고 한다. <오늘의 거짓말>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사실 정이현이 <오늘의 거짓말>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 이를테면 「낭만적 사랑과 사회」같은 경우에 정말이지 '발칙하다'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일상 속의 발칙함의 발견이기에 더욱이 발칙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오늘의 거짓말>에서는 그뿐만아니라 깊이있는 시선과 조금이나마 따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비롯하여 개인의 내면을 살포시 뒤적거린 정이현은, 더이상 발칙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을 확연히 가지게 된 것이다.

 

헌데, 그녀의 책을 다시 구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행여 도서실에 그녀의 책이 보이면 빌려 읽을 수는 있겠지만, 자금을 탈탈 털어 소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의 책이 책장에 꽂힐 때 차지하는 자리는 다른 아름다운 책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적어도 책만큼은, 소설만큼은, 희망을 보여야하지 않을까. 이 책에 물들어 버릴라, 그것만큼은 마뜩찮다. 소설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은 좋지만 그로 인해 맥 빠져버리기는 싫은 것이다.

 

파헤쳐 흐트려 놓았으면 그에 따라 덮어놓을 재간도 있어야하는 법이거늘, 과연 정이현이 앞으로 지금껏 들춰내 보인 것들을 잘 덮을 줄 아는 작가의 면모를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지 그것이 최대의 관심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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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31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거짓말 벌써 읽으셨군요. 전 정이현씨의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밖에 만나보질 못해서 아직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상상마루님의 글을 보니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자리를 잡는 것 같네요.^^
관심가지고 있던 책이었는데.. 어서 사봐야 겠네요.

상상마루 2007-08-10 14:52   좋아요 0 | URL
그리 추천하는 책은 아니지만... 읽어서 나쁠건 없을 것 같아요 ^^ 문장의 미학이나 치밀함은 거의 엿볼 수 없지만 리얼함 하나는 괜찮더라구요. 감동이 아니라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부모로 산다는 것
오동명 지음 / 두리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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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방 한 편에는 10년도 더 된 낡은 갈색의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시흥으로 이사 오고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어머니는 건장한 아저씨 두 분을 데리고 오셨고, 바로 그 날부터 피아노는 줄곧 우리 집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 꽤 오래 된 피아노였는데, 곳곳에 긁힌 자국과 그리 신통치 못한 음색이었지만 그래도 피아노라는 이름 이였기에 둥당둥당 치는 맛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부모님은 나를 위해 매달 피 같은 돈을 학원비로 대신해야 했다.


부모님이 그 때 왜 피아노를 시키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또래 애들도 학원에 다니는 것을 보고는 나 역시 어딘가에는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부모님을 위해 작은 실력으로나마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 순간만큼은 부모님의 얼굴에 햇빛이 찬란했다. 평소에는 그늘이 살짝 드리워진 어두운 얼굴의 두 분이었는데, 나의 연주에 그리도 감격하시다니. 어린 나는 IMF로 인해 힘든 삶을 사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얼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마주할 때는 언제나 웃음으로 답하시던 부모님……. 나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두둥둥- 두둥둥- 둥당둥당- 그럴 때면 언제나 부모님의 얼굴은 날아다니는 음표들에 의해 기쁨으로 흠뻑 적셔지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피아노에 대한 추억이다. 어릴 적에는 그저 재밌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만 했지 부모님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을 위해 뒷바라지 해주시던 그 든든함. 힘들면서도, 정말 힘들면서도 자식을 마주할 때면 항상 입가에 웃음이 머물고 있었던 부모님의 얼굴. 책 속 예화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지금보다 더 젊은 부모님을 회상하게 되었다. 부모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련한 추억을 통해서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나의 기억은 책과 회상과 그리움을 타고 피아노 선율에 맞춰 흔들흔들 춤추었다.


피아노 학원에는 5개의 피아노 방이 있었다. 유명한 음악가의 이름을 딴 5개의 방은 각각 헨델, 바흐,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 이렇게 5가지의 이름으로 나뉘었다. 피아노를 어느 방에서 칠 것인가 선택할 수 없었고, 그냥 자리가 없는 곳에 들어가 한 곡당 다섯 번 내지 열 번의 연습을 하면 됐다. 나는 헨델 방에 자주 들어갔다. 그렇다고 그 방이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헨델 방은 소리도 잘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도 고장이 나 잘 닫히지 않았다. 그 방은 마치 아버지 같았다. 소리도 잘 나지 않으며 마음의 문도 고장이 나버린 아버지……. 일하느라 매일 밤늦게 돌아오시곤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헨델 방처럼 조용하고 눅눅했다. 책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입니다.’ 언제나 힘든 일을 도맡아 하시던 아버지셨다. 정말로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었을까. 그 눈물을 왜 진즉에 닦아드리지 못했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던 방은 슈베르트 방이었다. 최근에 피아노를 새 것으로 바꾼 지라 소리가 아주 낭랑했고, 공기마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꼭 어머니와도 같았다. 항상 힘이 넘치시던 어머니……. 가끔 아버지를 도와 부업으로 살림살이를 도우며 어머니는 견뎌내셨다. 그렇게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어머니는 더욱 힘차지셨고, 그럴수록 더욱 더 그 이면은 깊어만 갔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찌나 나의 어머니를 빼닮았는지. 슈베르트 방을 찾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아 맞다. 슈베르트 방의 피아노는 이상하게도 자주 바뀌었고, 고장이 자주 났다. 평소엔 힘이 있다가도 가끔 흔들리는 피아노 선율. 어머니가 더 생각났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이 넘치시던 모습으로 흔들리는 것에 대한 자위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는 일할 적에는 아버지로서 강하게 일하셨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자로서 약한 마음을 다잡으셨다. 내가 처음에 헨델 방을 좋아하지 않았듯이 아버지와 나 또한 처음에는 거리가 상당했다. 매일 늦게 돌아오시니 함께할 시간이 없었고, 그저 어렵게 여겨지기만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부정이 내 가슴에 쌓였고 아버지의 술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헨델 방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헨델 방을 자주 찾던 나처럼 말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이 책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주었다. 항상 정성스레 생일상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일화와 가족을 짐에 진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 점점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 너 때문에 산다. 우리에겐 너 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곤 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다. 지금도 어린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얻는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그 당시 부모님 역시 우리들을 보며 희망을 품으셨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런 희망을 품고 계실 것이다. 그 희망이 작아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부모님의 마음속에 자리한 희망의 싹을 정성껏 돌보자고 다짐해본다. 쑥쑥 자라게 해드릴게요…….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본다. 예전 같지 않다. 벌써 손이 굳어버렸는지 툭툭 끊어지는 선율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계속 두드리고 있다. 내일 아침 부모님을 위해 연주회를 해드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그렇게 자주 해드리던 연주회를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어 해드리려 한다. 두둥둥- 두둥둥- 둥당둥당- 부모님의 얼굴이 다시금 날개 단 음표들에 의해 기쁨으로 충만할 모습을 상상하며, 건반 위의 내 손이 점점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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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라디오
구효서 지음 / 해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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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중앙일보로 신문을 바꾼 뒤 며칠이 지나고, 문화면에 새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 있는 걸 보았다. ‘<2006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 명두>’ 아니, 이럴 수가.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뽑히기를 내심 바랬는데 구효서가 나의 ‘내심’을 큰 아쉬움으로 휘리릭 뒤집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이깨나 들어 보이는 푸근덕한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을 바라다보며 그의 작품을 언젠가는 꼭 보리라고 다짐했다. 얼마나 대단한 작자이기에!

말도 안 되는 오기가 발동해 읽게 된 그의 작품이 바로 [라디오 라디오]이다. 도서실 신간 도서 코너에 자리 잡고 있던 그 책은 형광펜을 박박 문질러 놓은 듯이 야시시한 분홍빛을 발산하며 라디오, 라디오, 경쾌한 리듬으로 위아래를 들썩이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한 번만 쓰면 될 것이지. 애꿎은 책에게 핀잔을 들이부으며 첫 장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입니다.’ 형식의 문장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는데, 배경 또한 다가가기 편안한 ‘학교’였다. 뭔가 심오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더니만, 통통 튀는 축구공과 이리저리 들썩거리는 아이들의 등장으로 마음이 일순간 가라앉음을 느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촌구석 마을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다.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고생하지만, 그들에게는 ‘라디오’가 있기에 잠시나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드라마 속 연인의 애틋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을 사람들은 전율하듯 몸서리친다. 이 마을에서 라디오는 마치 보물단지처럼 그 이상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남북 분단의 상황 속에서의 위험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에 사람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운다. 그 때 마침맞게도 라디오에서 더 진화한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상 라디오는 희귀품이 아닌 물건으로서 치부되어 버린다. ― 한 마디로 말하면, 분단 속 덩그러니 남겨진 마을과 그 속에 자리한 라디오? 라디오의 음성이 순간 경보로 바뀌기도 하는 그런 아찔한 상황 속에서 밥과 정과 일상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시대적 상황 운운하기에는 너무도 일상적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구효서의 [라디오 라디오]는 그야말로 촌구석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처럼 편안하고 구수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라디오조차 귀하디귀한 촌구석이니 그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소소한 일상을 엿보는 기분이랄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흐름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다. 구효서의 또 다른 작품 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맛이 있다. 도시가 아닌 ‘마을’이라는 배경을 통해 구효서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한 맛과 동시에 구수한 일상의 일화를 속삭이듯 진한 체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전교생이 채 50명도 되지 않는 학교 앞 운동장, 그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뚜벅 걸음 속에 파묻혀 귀를 막을지니, 그 귀 막음은 귀로 듣지 아니하며 마음으로 듣고자 하는 진정의 읽음의 행위이리라.

소설을 읽으면서 다원적인 시각에 또 한 번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하여, 각 장마다 여러 인물들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능수능란함에 소설을 읽는 재미가 한층 불어났다. 하나의 대상을 이곳저곳에서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이 얼마나 색다르며 뱅뱅 도는 스릴감이 느껴졌는지 모른다. 특히 3인칭으로 인물들을 묘사하다보니 오로지 1인칭 시점일 때와는 달리 다방면으로 풍부한 감이 있었고, 그 상황에 맞게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등장인물 중 무당 ‘묘선’이 달려가는 모습의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휙휙, 미지의 그곳을 향하여 발을 내딛는 상황이 묘사되었을 때 나도 같이 급박해지는 이 느낌. 이 느낌이야말로 저자의 묘사와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읽는 내내 즐겁게 읽은 반면 성에 대한 묘사에 눈살이 잠시 동안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순히 하하 호호거리며 웃기에는 우리들의 상황을 똑 닮은, 그렇지만 무언가 전달 받기에는 다소 미약한 소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그냥 멀리 서서 지켜보며 아련한 향수에 젖어볼 정도로만 작용하는 소설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보다 더 날카로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기에 그런 생각은 접어두었다.

그래, 단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 사는 속절없는 일상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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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6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효서라는 이름은 몇번 들어봤지만.. 아직 만나보질 못했습니다. 이 책 지대한 관심이 가는 군요.ㅎㅎ
 
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 - 신화 속에서 찾은 24가지 사랑 이야기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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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구름은 유유자적이 제자리를 맴돌며 빙글빙글 거리는 자태에서 부드러움을 한껏 풍기고, 그 주위로 아롱이 퍼져있는 은은하면서도 짙은 색채의 정열적인 하늘 곳곳에서는 분홍빛 축포가 터진다. 팡파르 소리를 내며 터지는 축포의 대상을 향해 세상의 눈은 집중되고, 그 중심에는 미소의 연속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미소의 근원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소에서 비롯되며, 상대방을 한껏 담아낸 눈동자가 물기에 촉촉이 젖어 빛을 발한다. 아, 그 빛의 이름은 사랑이던가. 모든 자연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력보다도 더 강력한 끌림의 결정체, 세상 곳곳에서 그 방대한 빛을 발산하며 만물 속에서 움튼다.


만물 속에서, 전천후에 능통하면서, 그리고 신화 속에서도 그 빛이 비추어진다는 사실. 알고 있었는가?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의 존재에 감탄하며 이 책 <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를 펼쳐들었다. 저자의 사인에 잠시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목차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목차가 나오기 이전에 수많은 그림이 실려 있었다. 바로 신화 속의 사랑에 대한 그림이었는데, 그 밑에는 여러 신들 간의 사랑에 대해 간단한 소개 글이 적혀있었다.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나를 신들의 사랑에 흠뻑 취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녀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잠든 에로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프시케의 모습은 어찌 보면 애처롭기도 하고, 비밀스런 인연으로 어떻게 사랑을 해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읾과 동시에 내 마음 속까지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그림은 힐라스를 유혹하는 강의 님프들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소위 ‘훈남’으로 칭송받을 만큼 잘생기고 다부진 청년 힐라스의 사방으로 매혹적으로 생긴 강의 님프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그림이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그 유혹적인 자태에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저 정도로 매혹적이라면 위험하지는 않을지 걱정도 살짝 들면서 힐라스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게 되는 이 마음이 책장 넘기는 손에 가속도를 붙였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동세를 잘 표현한 그림을 보며 사랑의 역동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숨죽여, 어떤 때는 조마조마해하며, 또 어느 때는 도취되며 사랑의 당사자들보다도 더 그들의 사랑을 향유할 수 있었는데,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여러 가지의 모습과 분위기가 배어나온다는 것이 다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현대적인 사랑과 신화적인 사랑의 비슷한 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내 생각으로는 사랑이라는 자체의 순수성에는 지금도 예전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손을 부여잡고 있는 두 인물 속의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림으로 눈요기를 채운 뒤, 본격적으로 신화 속의 사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목차(드디어 찾았다!)를 펼쳐들자 내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신들의 이름이 난무했고, 그 각양각색의 제목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들의 사랑은 정말이지 다양했는데, 이 책만 읽어봐도 사랑의 온갖 종류를 죄다 습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풍성한 이야깃거리에 기쁨의 전율이 흘렀다. 이를테면 우리들의 머나먼 선조들을 통해 사랑을 학습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 1교시 종이 울린다. 쉬는 시간이 벌써 끝났어. 자, 1교시 수업은 과연 무얼까?

 


독자가 독자에게 전하는 순전히 내 멋대로 사랑 수업


제 1교시, 비운의 사랑. 인간들의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신들이 사랑에 실패했다고? 0.1T 망치 타격을 입은 듯 충격적이고도 의외의 면모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아폴론이 있는데, 상사병이 걸릴 지경에까지 가도록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독단적으로 듣는 수업이라 그런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져 상상해보았다. ‘뭐? 아폴론이 차였다고? 정말 희한한 일이네. 그렇게 위대하신 신께서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니 말이야. 딱하기도 하지.’ ― 어지간히 애처로워야 말이다. 그렇게 쫓아다녔건만 돌아오는 건 매정함과 도피뿐이었다지. 사랑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현실적인 현실 말이다. 사랑의 현실에 부닥치지 않을 존재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정말? 아폴론이? 그거 참 잘 되었군. 신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잘난체하더니 말이야.’ ― 이 쪽의 반응은 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반응이다. 고소해 죽겠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정말로 이런 감정을 신에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사랑의 벽 앞에 멈추어 서고 만 아폴론의 모습을 보니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머리 위에서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신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가산점을 주지 않는 법이다.


제 2교시, 운명적 사랑. 우리들은 우리네 삶에서 종종 ‘운명’이란 단어를 접하곤 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을 운명이라고 하는데, 초인간적인 힘의 주동자가 신이라고 믿어온 우리들의 생각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인간적인 힘은 신들이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힘을 받는 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운명에 얽힌 신의 모습은 그들 또한 운명의 덫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에서 그 덫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신들도 비껴 갈 수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또한 운명의 기로 사이에는 우연이 실존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연이 운명으로 변하여 가는 과정, 그게 사랑 아닐까? 운명이 아니라면, 또 우연이 아니라면 사랑은 존재할 수 없거니와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불멸의 이름으로 항시 대기 중입니다!


제 3교시, 잘못된 사랑. KBS 인기코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보면 불륜의 관계가 숱하게 출현한다. 배우자를 두고도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똥배짱 정신과 살인적인 나눔 정신이라니. 불미스러운 일이건만, 놀랍게도 신화 속에서도 불륜의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바람둥이 제우스다. 요정 이오와 사랑에 빠져 헤라의 바가지는 바가지대로 듣고, 이오가 헤라의 노여움을 사게 만든 일등 공신 제우스. 이 책에서만 제우스는 세 번이나 등장하는데, 그의 사랑의 논리를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랑은 나눔의 정신이다’ ― 뭐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잘못 됐다는 게 문제다. 신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마땅한데 바람을 피우다니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결국엔 제우스도 사랑 앞에선 어떤 존재보다도 평범해진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셈이다. 신들도 절제할 수 없는 사랑의 방대함은 도대체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사랑의 요정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랑 가루를 뿌려대는 건지 뭔지 세상 곳곳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있는데, 존재의 이유가 사랑일 지도 모른다. 사랑에 기대여 고립된 현실을 만끽하는 순간의 자유스러움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제 4교시, 자습 시간.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서 그 책의 내용을 죄다 알아버리려 하는 심보를 가진 사람은 없겠지? 그래서 자습 시간을 마련했다. 물론 의미상 자습일 뿐,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온전히 자기 혼자서 고뇌에 빠지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 서평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학구열을 불태우는 독자들은 훌륭한 독자들인 것이다. <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를 읽으며 참고할 서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딱인 것 같다. 몇몇 가지 이야기는 거의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하며, 사랑 뿐 아니라 신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자습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두고 보자고! 물론, 더 똑똑한 독자들이라면 <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를 직접 읽어보는 센스를 발휘하겠지?


끝으로 사랑에 대한 총체적인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우선 사랑의 범위는 넓지도 좁지도, 그렇다고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사랑의 범위는 없다. 범위란 효력이 가해지는 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의 효력은 어느 곳에서든 통하기 때문이다.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자연에게나 한낱 미물에게나 사랑의 빛이 스며들고 그 찬란함을 내뿜는다. 그리고 사랑의 역할, 사랑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실’ 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현실 속에서의 도피’ 라고도 할 수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게 사랑이라면, 지극히 반현실적인 것도 사랑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벽을 실감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구름 위를 거닐 듯 몽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사랑의 이중성에 충격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적응을 해나간다면 그 양면을 동시에 체험하는 다채로운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신과 인간의 사랑. 내가 생각하는 신과 인간의 관계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똑바른 평행의 모습이다. 사랑이 그 둘의 무게를 적절히 저울질하여 같은 높이에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도 결국엔 사랑 앞에서 인간과 동격화 되었듯이, 그 둘의 관계는 우월과 열등의 관계가 아닌 평등의 관계일 것이다. ― 신과 인간, 두 존재 모두가 결국엔 사랑의 종속물에 불과할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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