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라디오
구효서 지음 / 해냄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조선일보에서 중앙일보로 신문을 바꾼 뒤 며칠이 지나고, 문화면에 새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 있는 걸 보았다. ‘<2006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 명두>’ 아니, 이럴 수가.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뽑히기를 내심 바랬는데 구효서가 나의 ‘내심’을 큰 아쉬움으로 휘리릭 뒤집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이깨나 들어 보이는 푸근덕한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을 바라다보며 그의 작품을 언젠가는 꼭 보리라고 다짐했다. 얼마나 대단한 작자이기에!

말도 안 되는 오기가 발동해 읽게 된 그의 작품이 바로 [라디오 라디오]이다. 도서실 신간 도서 코너에 자리 잡고 있던 그 책은 형광펜을 박박 문질러 놓은 듯이 야시시한 분홍빛을 발산하며 라디오, 라디오, 경쾌한 리듬으로 위아래를 들썩이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한 번만 쓰면 될 것이지. 애꿎은 책에게 핀잔을 들이부으며 첫 장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입니다.’ 형식의 문장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는데, 배경 또한 다가가기 편안한 ‘학교’였다. 뭔가 심오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더니만, 통통 튀는 축구공과 이리저리 들썩거리는 아이들의 등장으로 마음이 일순간 가라앉음을 느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촌구석 마을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다.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고생하지만, 그들에게는 ‘라디오’가 있기에 잠시나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드라마 속 연인의 애틋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을 사람들은 전율하듯 몸서리친다. 이 마을에서 라디오는 마치 보물단지처럼 그 이상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남북 분단의 상황 속에서의 위험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에 사람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운다. 그 때 마침맞게도 라디오에서 더 진화한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상 라디오는 희귀품이 아닌 물건으로서 치부되어 버린다. ― 한 마디로 말하면, 분단 속 덩그러니 남겨진 마을과 그 속에 자리한 라디오? 라디오의 음성이 순간 경보로 바뀌기도 하는 그런 아찔한 상황 속에서 밥과 정과 일상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시대적 상황 운운하기에는 너무도 일상적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구효서의 [라디오 라디오]는 그야말로 촌구석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처럼 편안하고 구수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라디오조차 귀하디귀한 촌구석이니 그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소소한 일상을 엿보는 기분이랄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흐름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다. 구효서의 또 다른 작품 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맛이 있다. 도시가 아닌 ‘마을’이라는 배경을 통해 구효서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한 맛과 동시에 구수한 일상의 일화를 속삭이듯 진한 체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전교생이 채 50명도 되지 않는 학교 앞 운동장, 그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뚜벅 걸음 속에 파묻혀 귀를 막을지니, 그 귀 막음은 귀로 듣지 아니하며 마음으로 듣고자 하는 진정의 읽음의 행위이리라.

소설을 읽으면서 다원적인 시각에 또 한 번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하여, 각 장마다 여러 인물들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능수능란함에 소설을 읽는 재미가 한층 불어났다. 하나의 대상을 이곳저곳에서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이 얼마나 색다르며 뱅뱅 도는 스릴감이 느껴졌는지 모른다. 특히 3인칭으로 인물들을 묘사하다보니 오로지 1인칭 시점일 때와는 달리 다방면으로 풍부한 감이 있었고, 그 상황에 맞게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등장인물 중 무당 ‘묘선’이 달려가는 모습의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휙휙, 미지의 그곳을 향하여 발을 내딛는 상황이 묘사되었을 때 나도 같이 급박해지는 이 느낌. 이 느낌이야말로 저자의 묘사와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읽는 내내 즐겁게 읽은 반면 성에 대한 묘사에 눈살이 잠시 동안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순히 하하 호호거리며 웃기에는 우리들의 상황을 똑 닮은, 그렇지만 무언가 전달 받기에는 다소 미약한 소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그냥 멀리 서서 지켜보며 아련한 향수에 젖어볼 정도로만 작용하는 소설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보다 더 날카로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기에 그런 생각은 접어두었다.

그래, 단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 사는 속절없는 일상 이야기일 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7-26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효서라는 이름은 몇번 들어봤지만.. 아직 만나보질 못했습니다. 이 책 지대한 관심이 가는 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