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 김기영은 남한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에도 참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며 살다 신분을 숨긴 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작전명령이 오지 않고 그는 윗선을 잊고 지낸다. 그러던 그에게 20년 만에 지령이 떨어진다. 24시간 안에 북으로 귀환하라! 이 소설은 잊혀진 남파 간첩이 겪는 그 당황스런 하루를 그린 이야기다.

빛의 제국이 출간된 2016년 여름,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든 짐을 정리해 부산 본가로 내려갔다. 얼마 남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소설을 부산대 앞 서점 북리브로에서 하루종일 붙잡고 서서 읽었다. 중간에 점심 먹으러 잠깐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 읽었던 것 같다. 그 무모함과 단순 무식함이란...사서 편한 마음으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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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어른입네 하며 더러운 쌍판 내밀던 양아치들을 시원하게 밟아주신 영미 누님.

난수표나 미해독 문자 같은 현대시들을 읽을 때면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그와 달리 최영미 시인의 작품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그냥 ‘꽂혔다‘.

기성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려 최영미 시인이 직접 출판사를 세워 펴낸 시집이다. 부디 흥하길!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 밥을 지으며

˝장미넝쿨이 올라온 담벼락에 기대어
소나기 같은 키스를 퍼붓던 너.
...
침대가 작다고 투덜대는 내게 너는 속삭였지

사랑한다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 마지막 여름 장미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 독이 묻은 종이

˝보석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은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거라˝
- 여성의 이름으로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 낙원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
- 1월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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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일곱 살 노인이 며느리 사쓰코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녀가 자신을 지배하길 원하며 그 지배를 통해 쾌감을 얻고자 한다. 다소 쇼킹한 소재. 아들의 정혼대상(줄리엣 비노쉬)과 예비 시아버지(제레미 아이언스) 사이의 사랑을 다룬 영화 ‘데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이 소설이 그 영화보다 30년 앞서 나왔다.

부유하나 병원과 약에 잔뜩 신세를 진 채 말년을 보내는 노인은 일기를 쓴다. 일기에 자신의 일상 말고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남긴다. 바로 며느리를 향한 심정. 급전이 필요하다는 딸의 부탁은 매몰차게 거절하지만 며느리에게는 300만 엔짜리 캐츠아이 반지를 덜컥 사주기도...

˝어머니의 아들인 내가 손자며느리의 매력에 빠져 그녀에게 페팅을 허락받는 대가로 300만 엔을 투자하여 묘안석을 사 주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는 아마 놀라서 기절했을 것이다.˝

˝- 가끔 기모노를 입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귀고리나 목걸이를 하지 않은 게 세련됐구나.
- 아버님 꽤 센스 있네. ˝

˝내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있다면 사쓰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쓰코의 입상 아래 묻히는 것이 내 소원이다.˝

˝- 자네 발바닥을 뜨게 해줘. 그렇게 해서 이 백당지 색지 위에 주묵으로 발바닥 탁본을 뜰 거야.
- 그걸 뭐에 쓰게?
- 그 탁본을 바탕으로 사쓰짱 발을 본뜬 불족석을 만들거야. 내가 죽으면 뼈를 그 돌 아래 묻을 거야. 그게 진정 대왕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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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시 ‘소년‘에서

윤동주.
전태일에 앞서 왔다가 떠나간 아름다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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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초중반인 여성 화자는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딸은 서른이 넘었고 대학교 시간강사다. 어머니인 화자는 어머니로서 딸애가 결혼할 생각은 없 ‘여자 파트너‘를 데려와 집에 같이 머무는 게 마음에 안든다. 딸의 연인임이 분명한 ‘그 애‘는 더 거슬린다. 화자는 정상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해고된 시간강사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딸이 요양원에서 자기가 돌보는 한 여성 환자처럼 늙게 될까봐 두렵다. 독신으로 살며 입양아와 이주노동자를 위해 헌신하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는 노인 말이다.

온당한 비교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뒷북일 수 있는데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쏠린 주목이 이 책으로도 많이 옮겨가길 바란다. 퀴어, 정상가족, 여성의 이중노동/그림자 노동, 이해와 연대 등 여러 이슈가 녹아 있는 소설이다. 예순 넘은 여성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그렸고 그녀의 관점과 행동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도 설득력 있다. 의미 있으면서도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 그리고 사생활은 일과 별개예요. 제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일과 사생활을 구분해 달라는 것. 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 달라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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