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나는 냇가 건너편 공동탕 쪽을 보았다. 김이 오르는 와중에 일고여덟 명의 나체가 어렴풋이 떠올라 있었다.

어둠침침한 욕탕에서 갑자기 알몸의 여자가 뛰어나오는가 싶더니 탈의장 끝에서 냇가로 뛰어들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서서 양손을 쭉 펼치고 무엇인가 외치고 있다. 수건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그 무희였다. 어린 오동나무처럼 다리가 쭉 뻗은 흰 나체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에 샘물을 느껴 후우 깊은 숨을 내쉬고 나서 쿡쿡 웃었다. 어린애잖아. 우리를 발견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알몸인 채로 햇빛 속으로 뛰쳐나와 발끝으로 힘껏 발돋움을 할 만큼 어린애였던 것이다. 나는 해맑은 기쁨으로 계속해서 쿡쿡쿡 웃었다. 머리가 씻은 듯 맑아졌다. 미소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즈의 무희> - P22

연분홍 비단에 하얀 천 마리 학 무늬가 그려진 보자기를 든 아가씨는 아름다웠다.

<천 마리 학> - P55

중년 여자의 과거가 뒤엉킨 앞에서도 청결하게 차를 타는 아가씨를 기쿠지는 아름답게 느꼈다.

<천 마리 학> - P63

여자라는 물결이 이렇게 뒤를 쫓아오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천 마리 학> - P73

기쿠지는 치아를 보이며 다가갔다
부인의 아까 그 물결이 되돌아왔다
기쿠지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천 마리 학> - P78

붉은 석양은 마치 숲의 나뭇가지 끝을 스치며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숲은 저녁놀 진 하늘에 검게 떠올라 있었다.
우듬지를 흐르는 석양도 지친 눈에 스며들어 기쿠지는 눈을 감았다.
그때 기쿠지는 눈 안에 남은 저녁놀 진 하늘에서 이나무라 아가씨 보자기에 그려진 하얀 천 마리 학이 날고 있는 영상을 문득 그렸던 것이다.

<천 마리 학>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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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재기>

용화사 주지의 아들 신뇨, 그는 승려의 길을 걸을 예정이다.
요시와라에서 잘나가는 유녀를 언니로 둔 미도리, 그녀 역시 유녀가 될 몸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그린 단편소설. 1896년작이라는 게 놀랍다. 전혀 낡지 않았다.

예쁘고 귀여운 분위기인데 파고 파고 들어가보면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 윤가은 감독이 만든 영화도 이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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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면 임 그리워 돌아본다는 오몬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이르는 길은 멀지만 오하구로 도랑에 등불이 비치는 유곽 삼 층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손에 잡힐 듯 들리고 밤낮없이 오가는 인력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영을 상기시킨다. <키 재기> - P31

...몸부림치면서 욕하자 "뭐야, 이년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언니 뒤나 이을 비렁뱅이 년. 네 상대는 이게 적당하겠다" 하며 아이들 뒤에서 흙 묻은 짚신을 집어 던지자, 과녁에 명중해서 지저분한 것이 미도리의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키 재기> - P51

...말하면서도 자기가 약한 것이 부끄러운 듯한 얼굴빛이다. 무심코 미도리와 마주치는 눈매가 귀엽다. <키 재기> - P56

어느 서리 내린 아침에 조화로 된 수선화를 격자문 밖에서 밀어 넣은 자가 있었다. 누가 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미도리는 왠지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계단식 선반의 꽃병에 넣어 쓸쓸하고 청초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어딘가에서 들려온 것은 그 다음 날이 신뇨가 승려학교에 들어가서 소매의 색을 바꾼 바로 그날이었다는 이야기다. <키 재기> - P98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의 달빛이 시원하게 내리비추는 거리에 달각달각 나막신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선명하다. <탁류>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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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디를 가나 외국인 관광객이 많고, 그 중에서도 나라에는 더 많았지만, 그 나라에서도 이스이엔에는 정말로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쩌면 세계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P238

일본은 수천년의 역사와 남한 면적의 4배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하나의 명제로 정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인간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전공하는 문학에서 다루는 ‘근대적 인간‘이란, 우주보다 깊고도 심오한 내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요. 한 명의 개인이 그러할진대, 1억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를 한두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겁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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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세이코의 탄생>

마츠다 세이코를 발굴한 프로듀서, 와카마츠 무네오가 쓴 회고록을 읽었다.

1978년 CBS 소니 재직 시절, 그는 오디션에 제출된 녹음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씩 듣다가 소녀 마츠다 세이코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그땐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마츠다 세이코를 데뷔시키고, 80년대 후반까지 함께 작업을 이어갈 줄은. 그리고 그녀가 ‘사회현상‘이 되고 영원한 아이돌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는 것 역시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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