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세계문학의 숲 2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태동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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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양배추보다 사람을 더 좋아해요(I prefer men to cauliflowers)”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도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인생을 쌓아 올렸다가 허물어뜨리면서도 매 순간 왜 또 다시 지으려는 걸까. 이유는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누추한 여인들, (자신들의 몰락을 마시며) 문 앞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사랑한다. 그건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거라고 클라리사는 확신했다. 사람들의 저 눈빛 속에, 활기찬 몸놀림 속에, 터벅터벅 걷는 무거운 발걸음 속에, 고함과 아우성치는 소리 속에, 마차들, 자동차들, 버스들, 화물차들, 발을 끌고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샌드위치맨들, 취주 악대들, 손풍금 소리, 승리에 넘친 환호, 머리 위를 지나는 비행기가 내는 기이하고도 높은 소음 속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인생이, 런던이, 6월의 이순간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젊은, 그러면서도 말할 수 없이 나이가 든 기분이었다. 그녀는 칼처럼 모든 것을 저미고 지나가지만, 그러면서도 밖에서 구경을 하는 듯했다. […] 단 하루라도 산다는 것은 아주,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영리하다거나 보통 사람들과 그리 다르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가정교사 대니얼스 양이 가르쳐 준 몇 가지 안 되는 지식으로 어떻게 인생을 헤쳐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이, 지나가는 택시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피터에 대해, 또 그녀 자신이 대해서도,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극초반부 (번역은 시공사판, 열린책들판을 섞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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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울프는, 이런 서술들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왜 사느냐?" Why live? (시공사, 148) 라는 물음.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이 물음에 천착한다. 이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를 비롯, 작품 속 모든 인물이 공유하는 질문이다. 사람은 대체 왜 살까? 클라리사는 거리에서 마주친 비참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속에는 '(내)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 직설적으로 말하면 곧 '죽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울프는 사실상 같은 의미인 말을 두 주인공,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에게 분배해서 서로 다른 화법으로 말하게 한다.

그 와중에 '식물이냐 사람이냐' 라는 오래된 질문이 툭 던져진다.

그렇다. 사실 오래된 질문이고 그만큼 진부한 질문이다. 답도 뻔하고(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지 않나). 물론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고 풀어나가는 울프의 방식이란...! 결코 뻔하지 않다. 어떻게 뻔해지지 않느냐면 울프는 이 질문을 확고한 인간 혐오(=자기 혐오)를 바탕에 깐 채로(한 순간도 그걸 거둬들이지 않는다) 던지고 또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느낄 때, 인간이 싫어질 때 당신은 어느 쪽을 찾는가. 식물인가 사람인가. 식물과 사람 중 당신은 어느 쪽을 더, 혹은 덜 신뢰하는가. 소설 내내 이 질문은 변주, 반복된다. 전무후무한 식물과 인간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 대결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현란하게 펼쳐지는 한편, 가장 훌륭한 태피스트리를 한땀 한땀 공들여 짠 중세 장인이 발휘했을 수작업적 섬세함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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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플라워. 버지니아 울프는 아마 콜리플라워를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게 아닐까. 나도 콜리플라워 좋아하는데, 그냥 막연한 좋음인 것이 아쉽다. 울프가 좋아한 방식으로 콜리플라워를 좋아해보고 싶다(울프는 좋아한 것으로 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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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는 삶을 혐오하고 인간을 혐오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각자 나름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삶에 대한 혐오와 사랑. 자기 자신의 삶을 두고 한 사람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 두 양립불가능한 감정을 그녀는 다룬다. 극히 섬세하고 예리하며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묘사한다. 그런데 그 둘을 조화시키거나 중화시키거나 상쇄시키지는 못한다.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지도 못한다. 후자로 전자를 극복하지도 못한다. 극복한 '척'도 못한다(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지도(슬몃 끼워넣지도)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혐오와 사랑(및 그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정직하고 또 정직할 뿐이다. 


이 정직함이 아마도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울프의 소설을 읽고, 사람이 너무 정직해서는 안 돼... 그럼 죽어...(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라고 결론짓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빨리 결론짓고 싶은 유혹. 이 유혹에는 나도 쉽게 넘어가곤 한다.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나도 살아야하기 때문이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든 살아가는 데 환상과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 삶에, 인간의 존재에 이런저런 이유나 목적이나 의의를 갖다붙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설정한, 아니 대개는 어디서 급하게(=그만큼 절박해서) 빌려다 갖다 붙인 삶의 이유나 목적이나 의의가 환상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아닌 척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부정직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정직하다. 거짓과 기만, 시기와 질투, 원한과 정신 승리, 냉소와 혐오가 판치는 이 시대에, 이타주의와 공동체주의(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를 외쳐대는 개인주의(인생은 어차피 혼자다!)의 시대에 '철저하게 정직한' 태도란 무엇일까, 그런 태도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어떤 실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가 거짓, 기만, 시기, 질투, 원한, 정신승리(값싼 우월감), 냉소, 혐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러한 세계의 일부'인 '나'는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나는 이 세계를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나의 혐오는 정당한가.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종종 느낀다면, 그게 이 세계에 당연한 듯 만연해 있는 거짓과 기만 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래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종종 시달린다면, 그러다 '스스로에 대해 철저하게 정직한 태도'란 대체 무엇일까,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것들이 문득 궁금해졌다면 여러분은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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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honest?" 
이것은 <햄릿>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하는 대사다.
"당신은 순결하오?"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대사는 "당신은 정직하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정직함이 햄릿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듯 울프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울프는 셰익스피어 빠이기도 하다. 
그녀는 작품 곳곳에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며 열심히 팬 인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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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한국어 번역 판본은 시공사, 열린책들, 책읽는수요일 출판사 세 종을 참고했다.
'어떤 게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각각 오역이 있고, 잘 된 부분도 있어서다.

잘 읽히기로는 시공사판이 잘 읽히는데 가독성을 살리느라 원문의 어순을 많이 바꿔놓은 게 아쉽다.

이 소설에서는 울프가 쓴 원문 어순이 뉘앙스상 상당히 중요하기에 한층 아쉽다. 
그래도 초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 번역이라는 점에서 가치는 있다.
울프의 소설을 두 장 이상 넘길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이 번역본 덕택이었다.
울프 초심자나 문학비전공자는 시공사판으로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물론 가독성을 살리느라 원문의 뉘앙스가 많이 훼손되었고 몇 군데 중요한 오역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필요는 있다.)
한편, 해설은 어려운데 괜찮다.
일반 독자가 접하기 힘든 석학의 논문을 번역해서 실어두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열린책들판은 원문의 어순을 잘 살려놓았다. 
하지만 가뜩이나 줄거리 및 상황 파악이 어려운 소설이라 초반에 잘 안 읽힌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울프의 서술 방식에 충실하려 노력한 덕분에 원문의 뉘앙스는 살아 있다. 
열린책들 해설도 괜찮다. 상당히 알차서 작품 이해에 도움 된다.
번역자 정말 수고 많으셨겠다, 싶다.

책읽는수요일판은 초반에 오역이 상당히 눈에 띄어 접어 두었는데,
모임 참가하신 분의 말에 따르면 후반부 번역은 괜찮다고 한다.
울프의 팬이고 <댈러웨이 부인>을 각별히 좋아한다면 이 판본도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번역본에 따라 작품이 상당히 다르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판본으로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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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펭귄클래식 페이페백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펴낸 주석판을 참조했다. 
캠브리지판은 대학 도서관에 다른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빌렸는데 
본문 분량에 맞먹는 주석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말 시시콜콜한 사실들까지 언급되어 있다.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울프의 지인 중 누구를 모티프로 한 것인지가 설명되어 있고,

울프가 쓴 소설 속 표현들, 비유들에 대해서도 그와 연관되는 영문학(사)적 맥락들을 짚어주며 어디서 끌어온 것인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울프가 반복, 강조해서 쓰는 특정 표현들이 소설 전체에서 몇 번 반복되는지도 정리되어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막독19기 세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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