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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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상황에 대한 이 솔직하고 깔끔한 태도는 몹시 골리니쉬체프의 마음에 들었다. 안나의 마음씨 착하고 쾌활하며 정력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안나의 남편]도 알고 있던 골리니쉬체프로서는 그녀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5부 7장 / 문학동네 2권 438쪽.


얼마 전에 지인과 체호프의 안나와 톨스토이의 안나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잠깐 나눴다. ('체호프의 안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에 관하여>에 등장한다. 그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확인을 못했다.)

차후 더 디테일한 비교를 위해 일단 내가 파악한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성격을 정리해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simple(솔직하고 깔끔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full of spirit(쾌활하고 정력적인 모습)이다.

'솔직하고 깔끔한'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작가정신), '직설적이고 솔직한'(민음사)라고 번역했다. 영어본에서는 'direct and simple'.

'쾌활하며 정력적인'의 다른 번역은 '유쾌하고 적극적인'(작가정신), '명랑하며 활기찬'(민음사), '명랑하며 열정적인'(펭귄클래식)이다. 영어로는 'spirited gaiety'(혹은 full of spirit).

톨스토이는 이 두 가지 성격적 특성, 즉 '솔직함'과 '열정'을, 개인이 사회적 억압(프레셔)에 맞서 '진정한 삶', '주체적인 삶', 혹은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근데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춰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소설에서 안나는 결국 자살한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볼 일은 아니고, 어째서 그런 결말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어떤 함의가 깃들어 있는지는 따로 또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숱한 문학 작품, 철학서들(그리고 요새는 인문학 강좌들)이 강조하는 게 바로 저 두 가지 자질이고, 사실 저 두 가지를 갖추는 것만해도 무척 힘든 일이거늘, 그걸 다 갖춘 사람도 결국 끝은 자살이라니. 그것도 극심한 신경쇠약에 이은 자살...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체호프가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저 두 가지 자질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인물들에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안나들은 (자신의 욕망/마음에) 솔직하지도 않고 당연히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체호프가 놀라운 것은 이런 주인공 같지도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도(단편이니 가능했겠지만) 거기에 상당한 함의를,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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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 대목(내가 정말 사랑하는 대목이기도 한데)에서 톨스토이의 솜씨도 상당하다. 거장은 거장이다. 인용 대목은 소설 중반, 안나가 불륜의 대가로 모든 걸 잃은 상황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남편을 잃음과 동시에 사회적 평판을 잃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의 욕망/마음을 simple하게 드러낸 대가다. 사실 사교계에서는 모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아무도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쉬쉬한다. 하지만 안나는, 예의 direct and simple한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오늘날 독자 입장에서야 이런 안나가 '존멋'이어서 '걸크러쉬'를 하고픈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안나가 속한 '세상' 입장에서는 괘씸하게도 사교계의 불문율을 어긴 셈이니 그 대가로 자연히 왕따를 당한다. 안나는 고립된다. 당대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거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나는 full of spirit의 태도로 모든 걸 걸고 브론스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자꾸 안나의 사랑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부담스러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떠나 외국으로 간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 위 장면은 외국에 머무는 이 커플을 브론스키의 친구인 골리니쉬체프가 방문하는 장면. 이 사람은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역이고 안나와는 거의 안면도 없다. '빙의의 천재' 톨스토이는 이 '단역의 시각'에서 안나를 바라보게 한다. 친구가 어떤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그 결과 안나의 (객관적) 처지가 어떠할지 잘 아는 상태에서 이들을 방문했을 골리니쉬체프에게는 안나의 현재 모습,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상식적인 기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그 상식을 단번에 깨뜨려버린다. 정말이지 '매력터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독자는 안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인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게 톨스토이의 솜씨다. 그는 인물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며, 그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안다.

그나저나... '한 책 읽기'(한 권의 책을 여러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는 모임이다)에서 조만간 <안나 카레니나>를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이 오길 기다려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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