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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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원제는 The Empathic Civilization)는 주요 언론사가 지난 연말에 선정한 올해의 책에 대부분 들어가 있다. 짧지 않은 분량(800쪽이 넘는다)에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두루 받았다. 불안과 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현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상당한 근거를 들이대며 대안과 전망을 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감(empathy)을 다른 사람의 정서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이나 기쁨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공감에 앞서 등장한 동정(sympathy)은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것이고,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1부인 ‘호모 엠파티쿠스’는 공감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그는 탐욕적이고 물질적이고 쾌락을 쫒는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 규정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 특히 성충동과 죽음 본능을 주장한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을 들여 반박 한다. 그는 하위징가나 수티 등의 연구결과를 통해 인간화의 핵심요소가 놀이와 유대감, 사회성 등임을 설명한다.


   
 
  ▲ 공감의 시대  
 
생물학적으로는 거울신경세포가 발견되면서 인간 뿐 아니라 일부 동물들도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의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고 이 세포를 공감뉴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공감적 반응은 전체 집단이나 심지어 동물 전체의 고통을 자신의 고민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인류 전체적으로 보아 공감 능력은 확장되고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앙적 인식과 합리적 인식은 인간의 육체와 감정을 경시한다는 점에서 둘 다 존재에 대해 비실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본다. 반대로 공감 영역을 개발하고 인간을 성숙한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느낌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감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에 참여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언어를 발전시키고, 설득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적이 되고, 문화를 만들어 내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참여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대전환하면서 실체적 경험을 중시하는 공감이 역사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는 이성의 시대에 핵심 개념이었지만 이 자유는 노동을 통제하고 재산을 확보하는 능력으로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여 혼자 고립될 수 있는 자유였다고 해석한다. 반면 자유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면 인생의 잠재력을 최대화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런 삶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관계에서 가능성을 찾는 삶이고, 이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굴의 의지로 싸워 쟁취하는 자유가 아니라 믿음을 토대로 자신의 취약한 점을 드러내고 개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논리로 공감이라는 안경을 통해 자유 뿐 아니라 진리, 평등, 민주주의, 삶의 유한성 등을 재정의 하고, 신앙과 이성도 경험을 이해하고 다루는 수단으로 실체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공감의 시대 속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2부 ‘공감과 문명’은 저자가 에너지제도와 소통 방식, 생산 방식이라는 문명사의 변화를 통해 본 공감의 역사이다.

에너지 제도가 질적으로 달라지면 에너지의 흐름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의 소통 방식도 변하고 이에 따라 사고방식도 변한다. 수렵채집 사회는 예외 없이 구두 문화이지만, 관개농업 사회는 문자가 있었고 곡식을 생산 저장 분배하는 데 필요한 계산법을 고안해 냈다. 석탄, 증기 기관, 철도로 대표되는 19세기의 1차 산업 혁명도 이를 조정 관리할 인쇄매체가 필수적이었다. 20세기 초의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은 내연기관과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2차 산업 혁명을 관리하고 마케팅하는 데 필요한 중앙집중식 통제 메카니즘이었다.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제도 역시 인간의 의식을 바꾼다. 구두 문화는 신화적 의식에 대응하고, 경전 문화는 신학적 의식을 낳았고, 인쇄 문화는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중앙집중식 전기 문화는 심리학적 의식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의식의 각 단계들은 ‘우리’와 ‘타인’의 경계선을 긋는다. 신화적 인간에게 낯선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나 괴물이다. 신학적 인간에게 그들은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이다. 이데올로기적 인간에게 그들은 야만인이고, 심리학적 인간들에게는 병자가 ‘타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에너지-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인류의 공감 능력은 확대되고, ‘타인’은 점차 친숙한 존재가 되어 왔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에 비례하여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고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동 지방, 인도, 중국 등 거대한 관개농업 제국은 인간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진보시키고 보편적 공감을 개화시켰지만, 이들의 몰락은 토양의 염분과 퇴적 작용의 변화에서 비롯된 엔트로피 수치의 증가라는 열역학 제2법칙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로마 역시 도로와 우편제도, 방대한 인적 교류 등을 통해 공감의 문명을 최대로 발전시켰고 특히 초기 기독교 문화는 보편적 공감과 동정의 문화를 확산시켰다. 하지만 로마도 더욱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피해와 공감의 물결이 정면충돌하는 과정에서 종국을 맞이했다. 더 이상 정벌과 약탈로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로마가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의지하던 농업이 토지 비옥도가 나빠지면서 생산량이 급감하고 제국을 지키기 위한 비생산적인 군대는 늘어나면서 자멸의 길로 빠져 들어 갔다는 것이다. 에너지법칙이라는 냉혹한 현실의 결과로 숲은 사라지고, 토양은 침식되고, 인간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며 유럽은 500년 동안 암흑기에 들어간다.         
 
권력의 중심은 수천 개의 봉건 영토로 조각나고, 상업은 위축되고, 생계형 농업이 주종을 이루고, 학문은 쇠퇴하고, 도시 생활은 붕괴된 유럽에 10세기가 되면서 새로운 에너지 체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말과 수력과 풍력이 사용되고 이것이 인쇄 혁명과 맞물리면서 원산업혁명을 이끌고 인구는 증가하고 도시화가 촉진되고 개인화와 자의식이 깊어졌다. 주 연료와 산업 자원으로 쓰였던 목재 고갈의 위기를 석탄과 증기기관, 철도를 통해 극복하면서 1차 산업 혁명을 이루었고 교통과 이동의 혁신, 인쇄술의 발달, 공교육의 발전, 노동 인구의 증대 등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 체제를 이루었다.

석유 사용과 내연기관과 자동차와 전기의 발명은 세계를 2차 산업 혁명으로 이끌고 이와 연결된 중앙 집중적인 에너지-커뮤니케이션 체제가 등장한다.

3부 ‘공감의 시대’에서 저자는 화석연료와 우라늄이라는 엘리트 에너지의 사용은 심리학적 의식을 이끌며 지구적 차원에서 공감의 시대를 확대해 왔지만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른 한계에 봉착해 있음을 강조하고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 체제를 열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석유시대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과 축산의 결과로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위험할 정도로 증가하여 기후 변화의 심각성이 고조되고 있다.
저자는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의 의식을 대폭 재조정하여 다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길 뿐 임을 역설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이 충족 되었을 때 그 이상의 재산 축적은 우울, 걱정, 질병과 불만족 등 도리어 행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 성공의 기회를 강조하는 아메리칸 드림보다는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추는 유러피언 드림을 강조한다.

그는 다가올 3차 산업 혁명은 21세기 분산에너지 제도와 분산 정보통신혁명이 이끌 것이라고 예견한다.

석탄, 석유, 가스, 우라늄처럼 일정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엘리트 에너지와 달리 분산에너지는 햇빛, 바람, 쓰레기, 바다, 지열, 물 등 어디서나 다양한 규모로 발견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말한다. 또한 생산하는 에너지의 30-40%를 소비하는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주범인 빌딩부터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 건물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수소 이용법 같은 에너지의 저장법이 만들어져야 한단다.

그는 향후에는 에너지 민주화의 길로 가야하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산된 재생 가능 에너지는 어느 곳에서도 생산 가능하므로 가난한 나라에서도 에너지 생산과 사용의 길이 열리고, 에너지가 모든 개인의 사회적 권리이자 인권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분산 통신 혁명은 네트워크 사고방식, 오픈 소스 공유, 통신의 민주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분산자본주의는 대규모 협업과 분산 네트워크 체제이다. 자발적인 수많은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 지혜를 창조하고 있는 분산컴퓨팅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미 리눅스,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선보이고 있는 방식이다. 분산자본주의는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보다 중요해지고 삶의 질을 추구할 것이라고 한다.

매우 방대한 내용이다. 특히 경제 위기, 지구 온난화 등 위기의 시대에 3차 산업혁명과 분산자본주의라는 긍정적 대안을 제시한 것은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공감의 확장을 통해 재구성한 것은 단순하고 도식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을 경쟁하고 이기적인 존재로만 보는 것 뿐 아니라 저자처럼 공감하고 이타적인 존재로만 보는 것 역시 실체적인 접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인류는 경쟁자, 협조자, 응징자 등의 혼합전략으로 문명을 만들어왔다는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 중에 감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보다는 이성, 감성, 직관과 감각이 균형 있게 발달하고 작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그럴 듯 해 보인다. 

물론 개인주의와 경쟁이 주를 이루는 미국에서 구부러진 자를 펴기 위해 반대쪽으로 더 힘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같은 자력갱생과 승자독식의 정글 사회에서도 이 책의 관점은 바람직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처럼 공감이 더 확대되고 삶의 질을 추구하고 모두에게 더 따뜻한 사회가 꼭 올 수 있기를 소망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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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감옥
스리 오로빈도 지음, 김상준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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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주 전 한 참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열독하고 있을 무렵 신문에서 경희대 안병진교수의 칼럼을 읽다가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공감의 시대’에 일정하게 ‘공감’하고 있던 상태라 마음과 영성을 강조하는 이 책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일어 바로 인터넷서점에서 검색을 했는데 아뿔싸 아직 판매되지 않는지 찾을 수 없었다. (오늘 검색해보니 팔고 있다.) 고맙게도 안교수의 도움으로 며칠 후 이 책을 건네받았다. 우연한 인연과 우연과 인연의 고마움이란!

처음 얼마간은 생소한 이름, 지명, 문화와 문체 탓에 쉽게 읽어 가질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마자 100년의 시차를 뛰어 넘어 오로빈도 고슈에게 푹 빠져들었다.


   
 
     
 
1872년 인도에서 태어난 오로빈도는 의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곱 살 때 영국으로 보내져 14년 동안 영국화 교육을 받는다. 지독한 책벌레이자 성실했던 그는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다. 이미 대학 시절 독서를 통해 현실비판의식을 가진 그는 인도유학생급진조직에서 활동하다 귀국한다. 아버지의 오랜 소원인 식민지 관료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대학교수가 되어 인도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다.

당시 인도인에게 영국은 너무 강하고 우수한 체제를 가진 나라였고, 따라서 영국의 지배를 내심 인정하는 온건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빈도는 최초로 인도의 미래는 완전한 자주독립에 있다고 보고 이를 적극 주장하기 시작하고 온건파와 대립하는 ‘열렬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된다. 결국 1908년 5월 2일 오로빈도(당시 36세)는 영국 행정장관 폭탄테러의 배후주모자로 체포되어 투옥된다.

이 책 ‘유쾌한 감옥’은 1년 간의 투옥 경험과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과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그는 짐승 취급을 받는 비참한 감옥 생활을 통해 오히려 고통과 슬픔을 관조하고 뒤집는 엄청난 영적인 성숙을 이룬다. 그의 글에는 적과 아, 신분 고하를 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함과 조국 인도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넘친다. 자신을 끝내 사형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검사 노턴에 대한 묘사에서도 잘 드러나는 특유의 유머 감각과 통찰력, 균형감각도 감탄스럽다.

오로빈도는 인도는 게으르고 어둡고 정체된 기운인 타마스에 빠져 무기력하다고 보고, 뜨겁고 공격적이고 움직이는 기운인 라자스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라자스는 타마스를 누를 수 있지만 넘치면 독이 되는 기운이다.

그는 이 라자스를 사트바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맑고 차분한 기운을 통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사트바 역시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다. 자신의 영적 해방에 집착하여 세상사를 외면하고 자기에게 침잠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마스의 폐기, 라자스의 통제, 사트바의 발현과 사트바 넘어서기”로 그의 사상을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은 훨씬 넓고 깊다. 그는 감옥에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인도 최고의 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감옥을 고통과 통제의 공간이 아니라 수양과 성취의 공간으로 삼은 분이 있다. 숱한 투옥의 반복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통일의 상징으로 부활한 고 문익환 목사이다. 그의 평전을 보면 학자이던 그와 감옥을 통해 단련된 후의 그는 육체적인 강인함과 정신력 등 모든 면에서 크게 다른 면모를 보인다. 상식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온 문 목사의 영성과 진정성이 북의 김일성 주석을 마음으로 설득하고, 열사들의 이름을 외치는 것만으로 최고의 연설을 만드는 힘의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 한다.

진정성, 공감, 영성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기쁨이 절박하고 그리운 시절이다. 새해, 오로빈도의 인류에 대한 꿈과 문 목사의 어처구니없는 꿈이 현실로 다가서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빈다. 김상준의 번역과 해설에도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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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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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나나’는 태국 나나역 근처 소이식스틴이라는 거리의 이야기이다. 나나역은 우리나라의 청량리역, 16번가인 소이식스틴은 청량리 588번지에 해당한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거리에는 길이 있고, 이 길을 중심으로 건물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 새벽의 나나  
 
이 소설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큰 미덕은 충실한 자료조사와 현장조사이다. 독자들에게 간접 경험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작가는 상당한 기간 동안 현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며 이 소설을 완성 했다. 워낙 자료가 많다 보니 마지막에는 뭉텅이로 사연들이 잘려 나가고 주인공마저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인 청년 레오는 아프리카에 가는 길에 별 생각 없이 며칠 태국에서 지내다 운명처럼 매춘부인 플로이를 만나고 그녀에게 한없이 끌리게 된다. 여기에 비현실적인 전생의 기억이 끼어드는데 레오와 플로이는 500년 전 애틋한 사연을 가진 부부였다.

이상한 설정일 수 있지만 레오는 태국에만 오면 사람들의 전생이 보인다. 레오는 플로이의 집에 여러 매춘부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매춘부의 거리 소이식스틴에서 살아간다. 충실한 자료조사답게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매춘부들과 이웃들의 삶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타이’에는 온갖 종류의 자유가 넘친다. 그 중에서도 이 거리는 상상 속에나 가능한 인간의 모든 욕망들이 현실화 하는 곳이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인 것 같은데도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평범한 세상보다 더 진한 인간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마약과 매춘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거리에서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레오는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 거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이 거리와 플로이를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곤 한다.      

이 소설은 레오의 네 번에 걸친 태국 방문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크리스마스 무렵 태국을 처음 방문한 레오가 플로이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15년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레오가 매춘부 라노를 찾아 네 번째로 태국을 찾는 시점에서 끝난다.

한국인 레오를 내세워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지아, 플로이, 라노로 이어지는 매춘부 여신 3대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물론 그 중 플로이 시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플로이 이전의 여신이었던 지아는 구전과 레오의 꿈과 환상 속에서 나타나고, 매춘부 여신으로의 라노는 미래의 시작으로 마지막에 잠깐 소개될 뿐이다.

거리의 역사와 풍경과 삶의 모습들은 매우 사실적이지만 이 소설에는 상당히 많은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교차한다. 전생, 환생들이 수시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이것이 인물들의 성격을 주요하게 규정하거나 소설 속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도마뱀이나 바퀴벌레가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술잔이 있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과 함께 살아가거나 살로 한 방을 가득 채우는 뚱보 인간이 있는가 하면 진짜 식물이 된 식물인간도 등장하고 갑자기 물이 방안을 덮쳐 사람을 죽여 버리기도 한다. 이런 초현실적인 설정을 매우 사실적인 현실 묘사들과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리게 엮어 낸 것도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를 너무 정형화시켜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사건을 끌고 간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와 플로이 사이의 심리적 갈등이나 공감에 대한 이야기들은 억지스럽고 밋밋하다. 레오나 플로이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에 대한 설명도 너무 미흡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충실한 사실적 묘사와 풍부한 소설적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가진 소설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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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적 자유주의 - 자유, 평등, 상생과 사회발전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2
이근식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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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지식인 사회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공동체적 자유주의 등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담론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 속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큰 틀에서 머리 속을 깔끔하게 정돈해 준다. 자유주의의 기원, 정의부터 자유주의의 한계, ‘상생’적 자유주의이어야 하는 이유와 사회발전의 의미와 방법까지 잘 정리한 책이다. 두 번 읽었지만 가까이 두고 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판단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비꽃을 보고 제비꽃임을 아는 것이 사실판단이고, 제비꽃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것이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은 객관적으로 오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지만 가치판단은 주관적이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저자는 과학은 결국 인간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주므로,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에서도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회적인 존재인 어떤 인간도 개인의 취향이나 인생의 목표 같은 가치관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지만 윤리 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상생적 자유주의, 이근식, 돌베개  
 
그가 생각하는 보편적 인류의 가치관은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기본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건전한 가치관과 편견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냉철한 사실 판단력이 합쳐져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개인이 원치 않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유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자유이고,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사상, 출판, 취업, 결사, 종교의 자유 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유를 말한다. 정치권력, 재벌권력, 언론권력 같은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침해를 받지 않을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생명권과 재산권을 포함하는 인권 전체를 광의의 자유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자유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개인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빈곤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권력의 부당한 침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의 전개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시민사상이며,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시민사회를 건설한 주역인 부르주아(중소상공인)의 건강한 시민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인간관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부족하고 그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품성 면에서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기도 한다. 즉, 인식과 윤리 양면에서 이중적 불완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으므로 사상과 비판의 자유가 필수적이고, 불완전한 권력자의 권력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나 부당한 피해를 막기 위한 공정한 법질서 등이 필요한 것이다.

16-18세기 서양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고전적 자유주의의 중요한 기본 원리들은 만인평등(사회적 평등), 개인주의, 독립심과 자기 책임, 사상과 비판의 자유, 관용 같은 것들 이다.

만인평등사상은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다. 모두 평등하므로 아무도 타인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는 주장이 도출되었다. 이런 사회적 평등은 인격과 인권에서의 평등, 법 앞의 평등, 기회균등이다. 서양의 경우 200-300년, 우리나라의 경우 겨우 60년 전에 인류 역사의 무수한 세월 동안 당연시 했던 인간 차별을 타파하고 만인평등 사회를 실현한 것이 자유주의인 것이다. 만인평등사상 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상이자 근대성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들의 자유주의는 진보성과 수구성(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 반동성은 부르주아의 계급적 한계 때문인데, 시민혁명 후 집권한 부르주아정부들은 선거권을 유산자에게만 주거나,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탄압하거나, 공공교육은 의도적으로 거의 시행하지 않았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을 통해 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부르주아들은 경제 활동의 자유도 요구했다. 시민혁명 전 서구의 중상주의 정책은 정부의 비호를 받는 대상공인들에게 유리했고, 불리한 처지였던 중소상공인들은 정부의 경제 규제를 철폐하는 자유방임 경제를 원했다. 이런 주장을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자유방임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16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합한 것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성립 이래 보편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경제적 자유주의는 19세기 후반 이래 끊임없는 논란이 되어 왔다. 논란의 이유는 자본주의 경제가 장점도 갖고 있지만 분배 편중, 불황과 실업, 독과점화, 공공재 부족 등 시장 실패와 자본주의 실패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자유주의의 반동성은 모두 경제적 자유주의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후자는 19세기 말 사회적 자유주의로 등장한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미에서 널리 공감을 얻었고, 그 결과 자유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말과 혼용되었다. 오늘날 영미에서 리버럴리즘이라는 말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의미로 혼용되는 배경이다.

평등. 평등의 의미를 본원적 평등, 사회적 평등, 경제적 평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본원적 평등은 자유주의의 핵심인 만인평등사상이다. 사회정의를 사회문제에 관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라 볼 때 만인평등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유일하게 자명한 명제이다. 사회적 평등은 본원적 평등이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법적 평등, 정치적 평등 등이다.
경제적 평등은 출발 선상에서의 기회 균등과 결과로 얻어진 부와 소득의 평등분배를 말한다. 자유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은 경제적 평등뿐이며, 나머지 두 평등은 자유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저자는 분배정의에 대한 중요한 기존 이론들을 소개한다. 공리주의, 클라크의 한계생산력설, 파레토 최적, 롤즈의 분배정의론, 폴리의 자족, 드워킨의 자원의 평등 분배론, 노직의 소유권적 분배정의론 등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분배와 관련된 분쟁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보고, 공리주의와 롤즈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우리 경제의 입장에서 분배 정의의 세 원칙을 제시한다.

1. 생산 기여도에 따른 차등분배(기여도 원칙) : 근면과 창의력으로 생산에 많이 기여한 시람은 많이 받고, 적게 기여한 사람은 적게 받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
2. 기본재 충족의 원칙 : 공공복지제도를 통한 절대빈곤의 퇴치이다. 인간으로서 생활하는데 필수적인 기본재인 의식주, 의료, 교육, 교통 등은 모든 사람에게 공급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최소한의 기본적 인권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이다. 기본재의 수준은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할 것이다.
3. 기회균등의 원칙 : 교육과 상속에서의 기회균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이다. 기여도 원칙은 자유의 정신을 분배에 적용한 것이고, 기회균등은 평등을 적용했고, 기본재 충족은 박애를 적용한 것이다. 또한 단순한 균등분배는 성장을 방해할 것이지만 공정분배는 오히려 성장을 촉진시킨다. 이 세 원칙은 모두 장단기적으로 성장에 친화적이다. 

저자는 개인주의의 한계를 상생의 원리로 극복한 자유주의를 상생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확립,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확립,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살리면서도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시장실패를 시정하는 복지국가형 수정자본주의, 상생의 원리와 실천을 통한 공동의 갈등 문제(분배 갈등, 인간 소외, 윤리 타락, 환경 파괴, 국제 분쟁 등)의 해결, 정부 실패를 예방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 등이 상생적 자유주의의 주요 내용이다. 

적대적 갈등과 상생적 갈등, 삶의 의미, 사회진보의 정의와 이성적 사회 발전의 길 등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도 음미할 만하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 담론에 대한 기본적인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분배정의의 삼원칙을 통해 공정과 복지를 아우르는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고 많은 정책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세계화와 분단 상황 속에 조절시장경제에 대한 더 구체적인 모습과 정책들에 대한 후속 논의들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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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
앤서니 루이스 지음, 박지웅.이지은 옮김 / 간장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 수정헌법 1조 이야기

법체계는 보통 영미식 보통법 체계와 유럽식 대륙법 체계로 나눈다. 대륙법은 1804년의 나폴레옹 법전이 대표적이듯 판사들의 자율성을 최소화하고 모든 법을 문서로 엄격히 규정해 놓는다. 구지배질서에서 교육받은 판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법의 입인 판사들이 법전에 따라 판단한다. 하지만 보통법 체계는 배심재판제도가 핵심이고 법전 보다는 판례가 중요하다. 진실의 판정을 내리는 주체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판사는 재판을 주재하고 배심원들의 올바른 판단을 돕고 이 판단에 비추어 형량을 정할 뿐이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도 법전보다는 과거부터 축적되어 온 판결문들이다. 우리나라는 대륙법체계이지만 최근 국민참여재판을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등 새로운 사법체계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이 책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는 부제로 붙인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다음과 같다. “의회는 국교를 설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을 금지하는, 그리고 의사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또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회동할 수 있는 권리와 불만사항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도 만들 수 없다.” 시민의 자유에 대한 대단한 선언이다. 하지만 1791년에 제정된 수정헌법 1조가 처음부터 잘 작동된 것은 당근 아니다. 불과 7년 후에 대통령을 조롱한 사람들이 투옥 되었고, 1세기 후 조차도 윌슨 대통령의 정책 결정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징역 20년이 선고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어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수정헌법 1조에 대한 시민과 판사들의 인식이 지속적으로 아니 거의 극적으로 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수정헌법 1조를 둘러싼 대표적인 사건들과 대중들의 생각 그리고 판사 특히 대법관들의 판결문들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결코 명문화된 헌법이나 약속만으로는 지켜질 수 없고 다수 국민과 지식인들의 직접적이고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져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책이다.

이 책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는 특히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집중하여 보통법 체계인 미국에서 수정헌법 1조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의 판결문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대법관들이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을 배경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시대를 한발짝 앞서가는 판단을 내리고 이것을 우직스럽게 지켜나가는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나치 옹호나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까지 보장되어야 할지 어떤 지점(예컨대 폭력 호소 같은)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물론 언론의 면책 특권을 어느 정도까지 보장 할 지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와의 대립은 어떻게 조정할 지 많은 의문들은 남는다. 더구나 9.11 테러 이후 미국 언론들이 보여 준 권력에 순종적인 태도는 역사가 거꾸로 갈 수도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여전히 국가보안법 등 사상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고, 국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네티즌이 기소되고, 피디수첩 사건처럼 국가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인을 개인 이메일을 뒤지면서까지 기소하는 우리나라의 저급한 현실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번역자 중 한 사람은 군에서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문제를 제기하다 강제로 군복을 벗게 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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