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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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희생자를 위한 바자회와 문화제가 5월 11일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영화감독 변영주의 사회도 좋았고 허클베리핀이라는 밴드의 공연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날 네 명의 시인이 심보선시인의 ‘스물세 번째 인간’이라는 시를 함께 낭송했을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시인들 중 김선우의 목소리가 가장 낭랑하게 느껴졌고 오래 여운이 남았다. 아마도 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집의 대표작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기억하는 같은 제목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이다. 정말 좋은 시지만 이곳에 싣기에는 너무 길므로 꼭 시집을 사서 전문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다른 시를 소개한다.


어떤 비오는 날
김선우

-김수영의 방을 생각하는 빈방에서

1
가지고 있던 게 떠났으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꿈 없이 사는 일이
아주 무거워
꿈이 떠나서
몸이 무거워

2
세상의 물방울들아 쪼개진 것들아 쪼개져서도 흐르는 덜 자란 혁명의 격렬한 불면증들아 빙하에서 풀려난 물방울이 더러워진 허공의 상주(喪主)가 되는 비애를 생각한다 빈방을 마저 비운 창백한 몸들아 물방울 하나씩에 사금파리처럼 꽂힌 핏물을 보게 된 오늘의 내 시력이 무겁구나 눈 속은 뜨겁고 빈방은 무거우니 오늘의 숙박부에 나는 이렇게 쓰련다
닥치시오. 나는 다만 물방울만한 방을 원하오.

2012년에 각별한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나는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절망했다. 쌍용이 강정이 언론파업이 더욱더 힘든 시험을 받게 될 것이 안타까웠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허탈했다. 꿈이 떠나서 몸이 무겁고, 덜 자란 혁명이 주는 불면증과 핏물이 된 물방울들에 깊이 공감했다.

부재로 붙은 ‘김수영의 방’을 검색해 보았다. 두 시가 다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딛고 나아가는 새로운 결연함이나 희망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번갈아 읽어 보시길...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선우는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이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연애시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 시를 소개한다.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김선우

그러니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별안간
젖꼭지처럼 보인 날이다
하늘을 쳐다보다 입안에 단침이 고인 날이다
거기에 입술을 대고 싶어
배꼽 밑이 찌르르해진 날이다

그러니까 오리온이라는 힘센 사나이의 중심
움푹 팬 상처처럼 고인 허공에서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느낀 날이다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시선으로
살맛 달큰한 비린내가 초유처럼 흘러든 날이다

은하는 깊은 곳으로 찔린 듯 쏟아지고
지구인 내 취향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인지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너의 별자리들마다
모조리 양성구유인 소한(小寒) 날이다


배꼽 밑이 찌르르해지도록 섹시한 힘센 사나이 오리온이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가지고 있단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벽을 허무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지 않을까?

이 시와 대비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지만 검색하면서 발견한 김수영의 지독한 사랑시도 하나 소개한다. 남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느껴지는 시다. 하지만 자신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이 시인과 독자 사이의 벽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性(성)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튼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恍惚(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던 날 뒤풀이에서 김선우의 시를 읽어 주었다. 이 날 북카페에 시집도 소개해달라는 김선생의 요청에 용기를 내어 보았다. 나의 사족들은 무시하고 시들만 반복해서 읽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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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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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거나 부모가 될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 (전민용의 북카페)

 

아이들이 아프다

“너 이러면 정상으로 못 살아!” “안 그럼, 엄마는 날 죽일 거야.” 성적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를 죽인 고3 남학생이 엄마와 나눈 마지막 말이다. 너무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부모와 아이들이 놓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고, 나는 그런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지만 부모들은 그 사건이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안다. 성적과 공부 말고는 관심도 할 말도 없는 부모에게 아이들은 절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면 적어도 한두 가지 정신병리적 증상을 나타낸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정신적 긴장과 고통에 짓눌려 있다. 부모에게 호소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아이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선택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가출하고 급기야 살인사건까지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원형탈모나 틱, 복통과 두통, 손바닥 다한증, 수면장애나 우울증 등의 학업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 더 다양해지고 발병 연령도 매우 낮아지고 있다. 고3 수험생의 불안 증상들을 초3 정도부터 겪는 경우가 늘고 있다.

초5 세환이는 과학만화책을 좋아하고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저학년 때부터 집에서 이런저런 실험하는 것을 지켜보던 엄마는 세환이를 영재학원에 보냈다. 몇 달 후 아이는 아예 과학에 흥미를 잃어 갔고 학원에서 내주는 창의력 숙제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급기야 아이는 복통과 틱 증상이 심해져 상담실을 찾았다.

고3 민선이는 시험불안이다. 오른손이 불에 덴 것처럼 아픈 통증 때문에 연필도 잡지 못한다. 가끔 격심한 두통도 나타난다. 병원에서는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증상은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성적이 더 이상 오르지 않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증이 생기면서 악몽, 설사, 귀가 멍한 증상 등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의 증상은 한 증상을 또 다른 증상으로 덮으면서 악화되고 있었다.

고2 재혁이는 밤에 혼자 공부하다보면 ‘히히히’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떤 날엔 누군가 자신을 문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에게 무서움을 호소했지만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 자꾸 그런 공상이 생기는 거라고 했다. 이런 증상은 고1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이 크게 떨어진 후에 시작됐다. 급기야 시험 시간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병원에 가게 되었다, 환청과 환시로 약물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으러 왔다. 재혁이는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인 것 같고, 엄마를 나쁜 사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있었다. 아이는 이런 분노를 느낄수록 죄책감도 드러냈다.

견뎌내기 위한 청소년 일탈행위

살아남기 위해 병드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일탈행위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 여중생이 임신을 했다. 엄마는 아이의 거의 모든 일과를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격이 컸다. 아이는 학원옥상에 올라가 남학생과 성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또 다른 여학생은 시험 전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남자친구와 노래방에 가 휴대폰을 꺼 놓고 놀다가 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미친 년’이라고 욕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다음날 아이가 세 과목에서 한 개만 틀리는 좋은 성적을 받자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는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놀면 문제가 없지”라며 기뻐했다.

다른 여학생 역시 지금까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기력감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노래방에서 종종 성관계를 맺었고, 그를 정말 사랑했지만 헤어지게 되어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냐고 묻자 성적이 떨어지면 엄마가 더 캐묻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에 맘껏 우울해 하거나 괴로워 할 수도 없어 더 힘들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들에게는 재미도 의미도 없는 그런 공부를 ‘해내고’ ‘해드리기’ 위해 아이들은 일탈이 필요하다.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면서 힘든 삶을 견뎌낸다. “열심히 하면 진짜 편하게 놀 수 있으니까 참죠.”라고 말하는 아이들. 위태로운 일탈이지만 그 덕분에 숨통을 트인다. 처음에는 증상을 계기로 부모의 관심을 끌려했던 아이들도 나중에는 더 이상 어른들께 호소 안한다. 결국은 공부를 더 잘하도록 만들기 위한 다독거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홀로 망가져간다.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의 1위가 자살이다. 2010년 우울증조사에서 서울시내 중고생 중 17.2%가 우울감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0년 학교를 그만 둔 아이들이 7만 명이 넘고 집 나와 떠도는 아이들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 문제 중에는 ‘무기력’을 빼놓을 수 없다. 제법 많은 아이들이 먹고 잠만 자는 개가 부럽다고 한다. 정희의 경우에도 엄마와 같이 싸우고 화내고 울고 하는 것은 많이 해 보았지만 서로 힘들기만 할 뿐 같은 상황만 반복되어 결국 택한 방법이 무기력이었다. 아이는 초6 때 야단맞고 울다가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고 했다. 엄마 따라 상담실에 온 이유는 상담까지 받아도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성적이 좋아도 나빠도 아이들은 병들고 있다

성적이 떨어져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도 있지만 성적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오는 애들도 많다. 부모의 학력이나 소득이 비교적 높은 것도 특징이다. 더 큰 문제는 공부를 잘하려면 마음의 병 한 두가지 증상은 병으로 여기지도 않고 당연시 해버린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 그런 증상 하나쯤 있어도 되니 공부 잘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부모들도 있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비리그에 진출한 아이들 상담이 급증한다. 민수의 경우에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니며 공부는 잘 했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해 외로움이 쌓이고 허무감이 덮쳐 무너져 버렸다. 특목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민규도 취직한 직장에서 융통성 없고 이기적이라는 계속되는 꾸지람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모멸감과 열등감에 분노가 치솟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아이들이 겪는 이런 어려움은 ‘정서적 발달지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거나 상대의 정서에 이입해보는 일 같은 것이 너무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부모가 될 것을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부모안티카페’에 들어가 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느끼는 분노가 너무 적나라해 섬뜩하다. 공부만 강요하는 엄마를 ‘미친년’ ‘개 같은 년’ ‘씨발년’ ‘개창년’ 이라 부른다. 아버지는 ‘개새끼’ ‘씹새끼’ ‘씨발놈’ ‘좆같은 새끼’ ‘찌질이’ 등이다. 아이들의 적의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엄마에 대한 분노, 공부 못한다고 성적 떨어졌다고 멸시당하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부와 연결시켜 공부라는 말을 통해서만 아이와 만나는 천박한 부모에 대한 분노이다.

성공하면 부모와 연을 끊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고 실제 사례도 많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 가족을 버리고 학교를 버리고 아예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고도 한다. 가스통을 가져가 학교를 폭파해버리고, 불을 지르거나 급식에 독극물을 넣어 다 죽인 뒤 자신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도 있다.

부모실종 시대

부모실종시대의 사례. 대기업 이사, 어머니는 전업주부, 아이는 둘. 아이 교육문제로 늘 부부는 다퉜다. 사교육비로 살림은 쪼들렸지만 단호한 아내의 태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이 되자 엄마의 공부 강요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엄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아들하고 크게 한 판 붙은 날이면 퇴근해 온 남편에게 화를 퍼부었다. 어느 날 아들이 정말 미워서가 아니라 이런 상황 자체가 다 싫어져서 이성을 잃고 아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이는 마음을 닫았고, 몇 번 반복되자 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집을 나갔다.

가끔 자취방에 가보면 게임하고 있거나 술에 취해 자고 있거나 아예 집에 오지를 않는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는 상담실에 전화로 호소했다. 자기 탓도 있지만 아내 탓도 큰 것 같아 원망스럽고 상황이 절망스러운데 부모 말은 들을 생각을 안 하니 선생님이 상담을 권해달라는 얘기였다. 아이에게 전화했지만 아이는 “씨발놈이 이제 별지랄을 다 하네. 아저씨, 그 새끼한테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니들이나 잘하라고 그러세요.” 말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전권은 엄마가 행사한다. 아버지는 그저 돈이나 벌어오고 엉뚱한 소리나 안 하면 다행인 엑스트라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엄마는 아버지를 교육에 끌어들인다. 역할은 아이들을 휘어잡는 군기반장이다. 그러나 그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해 아버지들은 좌절한다. 물론 아버지 중에는 아이들이 더 많이 놀고 더 여유 있게 커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설득할 여유도 영향력도 없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뒷바라지하는 엄마들의 숨겨진 불안과 욕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엄마로서의 존재감은 아이들이 좋은 대학가고 성공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자기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엄마와 멀어지려고 하면 엄마들의 불안과 공포는 광적인 집착으로 변한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 같은 공포 때문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돕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점잖은 엄마들도 사실 더 교묘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아이들을 집어삼키려고 한다.

아이를 포식하는 것이 반드시 쥐고 흔들고 통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철난’ 아이, 성적 떨어지면 슬퍼하는 엄마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효자’ 아이, 부모의 인정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아이, 엄마의 유일한 기쁨이 되려는 ‘속 깊은’ 아이, 이런 아이들로 만드는 것도 모두 아이들을 포식하는 것이다.

요즘 아버지들은 자신이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들과 장 보러 다니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외식이나 여행도 한다. 때로 아이들에게 고민거리도 물어보고, 밥상에서 썰렁한 농담도 던져본다. 이런 것을 아버지 자신들은 대단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깨인 아버지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맞다. 깨인 아버지가. 다만 아버지의 윗세대에 비해 깨인 분들이다.

2010년 고민이 있을 때 누구와 상담하겠냐는 질문에 오직 0.9% 아이들만이 아빠와 상담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들의 60%는 아이들이 자기를 대화상대로 생각한다고 믿는다.

규형씨 회사는 거의 전쟁터다. 전에는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언젠가부터 서로를 비난하고 아부가 난무한다. 난리통에 유탄을 맞고 쓰러진 이야기, 백병전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이야기, 심리전으로 속여 넘긴 무용담이 술자리 안주다. 이사 진급이냐 낙오냐 기로에 있는 규형씨 같은 부장급이 가장 위태로운 목숨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와의 잠자리도 일 년에 두어 번 할까 말까고, 아내는 침대에서 규형씨는 바닥에서 자는 ‘각층 부부’가 되었다. 동기들 중에는 각방 부부도 제법 된다. 가족은 밥 먹는 입이라는 뜻인 식구가 되었다. 가족은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고 그 요구의 대부분은 투자에 비해 보장은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이라는 허울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한국판 타이타닉

한국판 타이타닉. 난파되고 있는 배에서 구명조끼 몇 개가 던져진다. 사람들은 구명조끼 하나라도 잡기위해 필사적이다. 99%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튼튼한 구명조끼를 잡기위해 이전투구 하는 동안 잘 차려입은 몇몇 사람들은 쾌속선을 타고 사라진다. 난파하는 배는 우리 사회고 가정이다. 구명조끼는 대학이다. 쾌속선은 학력, 재산, 인맥으로 짜인 그들만의 리그다. 한국의 부모들은 부모 자식 사이가 원수가 되고 가정이 무너져도 대학을 구명조끼라고 믿고 모든 것을 걸고 올인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사실은 대학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번 속고 있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초,중,고 12년 동안 대학 가느라 잠을 못자고, 대학 가서는 취업 준비하느라 잠을 못 자는데 언제 잠을 자나?” 외국인 친구의 물음에 “걱정마라. 대학 졸업하면 백수가 된다. 그 때 실컷 잔다.”고 대답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정규직에 취직하는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투자에 비해 터무니없는 결과만 가져다주는 대학에 왜 부모들은 모든 것을 거는 걸까? 심지어 아이 교육비 때문에 야간 대리운전을 하고 노래방 도우미를 불사하면서.

학교라는 제도가 주는 혜택은 불확실하지만 거기서 벗어났을 때 닥칠 어려움은 더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낙오자가 되느니 제도 안에서 의무와 폭력을 견디는 것이 낫다. 비빌 언덕이 없는 한국의 부모들에게 교육은 생계형 보험이다.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한 교두보가 아니라 신분 하락을 막아줄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그나마 잡지 않으면 아무런 미래도 없을 것 같아 대학이라는 보험을, 구명조끼를 놓지 못한다.

누군가는 한국교육은 판돈이 크게 걸린 아슬아슬한 도박이라고 말한다. 제도나 시스템이 허울이나 연막뿐이라는 것을 알고 돈과 빽에 다가갈 동아줄을 잡는 일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올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외면하고는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막막함이 심각한 고통이 될 때 부모들은 전문가를 찾는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 감정코칭, 아이메시지 대화법, 자기주도학습, 자존감 향상, 청소년 심리, 창의성 교육 등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기법과 매뉴얼을 익히는 것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자칭 전문가들이 교육시장의 하이에나들이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치열한 토론을 바탕으로 해법과 대안을 모색한다. 연대의식, 정신적인 삶, 공동체 배려 등을 논한다. 유럽, 뉴질랜드, 캐나다에서 가능한 교육을 대한민국에서도 실현하기 위한 22가지를 제안 한다. 핵심은 대안 22가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교육 현실에 대한 공감과 원인 파악과 탈출구를 찾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절절한 부분이 많았다. 글쓴이들의 자기 경험과 반성적 성찰도 공감이 되었다. 대한민국 부모 누구도 이런 성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발상 전환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제도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면적 교육 혁명을 의제화하고 실현시켜나갈 대선 후보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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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의자놀이
공지영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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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생각’과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가히 공안정국이다. ‘안철수의 생각’이 잘 정리된 정답지라면 ‘의자놀이’는 우리사회에 대한 전 과목 문제집이다. 쌍용자동차 이야기에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구조의 모든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2명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심각한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다.

공지영이 쌍용차 문제를 처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3번 째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부터다. 무급휴직자 임성준은 빨리 집으로 와 달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한다. 그는 옷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내 서미영은 무심한 걸음걸이로 베란다로 나가 그대로 밖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베란다로 나가는 엄마를 빤히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해고된 지 1년이 흐른 후였다. 다시 1년이 채 안 되어 임 씨가 자살했다. 열일곱, 열여섯 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도 평택으로 달려갔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에 현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빠들은 수시로 자신에 대한 통제가 잘 안 되는 고충을 털어놨다. 헬기에 위협을 당했던 아이들은 지금도 선풍기 소리나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못 견딘다고 한다. 회사에서 쫓겨난 2646명 중 1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가 고도 우울증, 30%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심각한 부분적 기억 장애 등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보여 주었다.

정혜신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단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얻는 심리적 내상이다. 그들은 단순히 해고되고 실직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전쟁터 같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관련된 기억이나 이야기를 하려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통증이 오고 악몽을 꾼다. 서로를 피하게 되고 치료도 쉽지 않다. 이전에 아무리 낙천적이고 심리적으로 튼튼하더라도 예외 없이 걸린다. 자살률도 가장 높다.

1986년 쌍용그룹은 동아자동차를 인수하고 1988년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한다. 1998년 외환위기로 쌍용그룹의 사정이 악화되자 대우자동차에 매각된다. 2000년 대우그룹이 해체되자 쌍용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후 2002년에 흑자를 내고 2003년에는 당기 순이익 5897억 원을 올린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 회사에 대해 정부와 관료들은 신자유주의와 민영화 만능론에 홀려 회사를 팔아야 한다고 굳게 생각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2004년 10월 노조와 금속노조연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하이차에 매각한다. 1조 2천억 원에 이르는 쌍용차를 5909억 원에 파는데 상하이차가 실제 지불한 돈은 1200억 원에 불과했다. 상하이차가 네 번에 걸쳐 합의했던 투자는 단 한 건도 지켜지지 않았다. 노조는 상하이차가 기술만 빼돌리고 경영에는 관심이 없다는 진정과 고발을 계속 했지만 묵살된다. 결국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오자 사측은 일방적인 구조조정 준비에 들어간다.

2009년 1월 8일 상하이차는 쌍용차의 법정관리 신청을 의결한다. 이 법정관리 신청은 이상한 점이 많다고 한다. 별다른 개선 노력도 없었고, 부도 위기도 없었고, 재무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정리해고 과정이 불법이라는 혐의도 있는 것은 안진회계법인의 쌍용차 자산평가액이 1년 만에 5177억 원이나 감액된 사실이다. 이 회계보고서 때문에 168%에 불과했던 부채비율이 갑자기 561%로 증가하고 980억 원의 당기 순손실 역시 3개월 만에 7100억 원으로 계산된다.

쌍용차의 의뢰를 받아 삼정 KPMG는 안진회계법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2646명을 감원해야 한다는 결과를 내 놓는다. 둘 다 우리나라 최대의 회계법인들이다. 이른바 론스타의 ‘먹튀’를 도왔던 삼정 KPMG는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팔 때 주간사가 된다. 이 주간사 중에는 이상득 전의원의 큰 아들이 몸 담았던 맥쿼리 증권의 이름도 보인다. 회계조작을 권장 또는 주도한 혐의가 짙은 안진회계법인은 쌍용차를 매입하는 인도 마힌드라사의 주간사로 다시 변신하고, 현재까지 마힌드라사의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가 막힌 이익의 관계망이다.

새로 출범한 한상균 노조가 노동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자구안을 내 놓았지만 무시하고 회사는 정리 해고를 단행한다. 해고하려는 2646명은 전체 노동자의 37%, 현장직의 43%에 달하는 숫자였다. 정리해고에 대한 기준도 모호했다. 공지영은 정리해고 과정을 보면서 의자를 사람 수 보다 적게 놓고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밀어버리고 내가 앉아야 하는 의자놀이가 생각났다고 한다.

정리해고 확정 발표 20일 후인 5월 13일, 조합간부 세 사람이 30층 건물 높이인 70미터 굴뚝으로 올라간다. 이들은 파업 투쟁이 끝날 때까지 86일 간 거기 머문다. 5월 22일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고, 한 때 1500명 까지 숫자가 늘어나기도 하였다.

회사는 해고 안 된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비인간적인 노노갈등을 부추겼다. “동료가 살겠다고 데모하는데 내가 그들을 욕하는 구호를 외치니 사람이 할 짓인가”며 한탄하던 한 조합원은 관제데모 후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 그 이틀 후에도 희망퇴직자 중 한 명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다. 해고 시작되고 한 달 만에 다섯 명의 희생자가 나온다.

6월 26일부터 32시간 동안의 첫 충돌이 있었다. 용역깡패와 구사대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격했고 노조는 처음엔 스크럼으로 맞서다 결국 쇠파이프로 대항했다. 90여 명 부상, 23명 연행, 2명이 구속되었다. 본관과 노조방송차도 빼앗겼지만 충돌 과정에서 노노간에 되돌리기 힘든 적개심이 생긴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공지영은 유신 시절에 학생 둘을 세워놓고 따귀 때리기를 시키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다. 장난스레 건드리다 선생이 한 아이를 냅다 갈기며 엄포를 놓으면 결국 서로 독이 올라 있는 힘껏 때리게 되는 잔인한 장면을.

경찰이 투입되고 공장을 전면 봉쇄하기 시작한다. 단수와 단전에 의료진의 출입도 막는다. 인권단체들과 민주노총의 강력한 항의와 요구, 물만이라도 들여보내라는 호소에 사측은 답변한다. “물 먹고 싶으면 나와서 먹어라.” 그 와중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걸리면 집도 다 빼앗긴다는 협박을 받아온 노조 정책부장의 서른 살 아내가 두 아이를 두고 자살한다.

새총으로 쏜 손가락 두 마디만한 볼트가 수시로 날았다. 순간적으로 5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테이저건과 고무로 된 총알을 쏘는 고무총도 사용되었다. 사람을 위협하는 헬기와 거기서 뿌려대는 최루액, 밤새 계속되던 선무방송도 조합원을 괴롭혔다. 그들은 에어컨 냉각수로 하루 한 끼의 밥을 해 먹고 수증기를 다시 모아 마셨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 있는 비상발전기를 도료가 굳지 않게 하는데 사용했고 공장을 정성껏 관리했다. 그들은 다시 일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8월 5일 최후의 전투와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었다.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를 타고 투입되었고 무차별 구타와 연행이 이어졌다. 다목적 발사기라는 신무기도 사용되었다. 경찰들은 넘어지거나 쓰러져 있는 노조원들도 방패와 곤봉으로 집단 구타했다. 영상으로 잡힌 장면들도 끔찍한데 노동자들은 영상은 실제 당한 것의 1/10도 안 된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8월 6일 노사 합의가 이루어지고 파업은 끝난다. 이 날 합의된 약속들은 이후 단 한 건도 지켜지지 않는다. 96명이 연행되어 2009년 말까지 66명이 구속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평탄한 중류층으로 살던 가족들도 평생 처음 보는 공권력의 횡포 앞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받았다. 경제적 고통도 매우 컸다. 부상자들의 보험급여는 환수되었고, 가압류와 손배소에 쌍용차 출신은 취직도 안 되었다. 보수언론은 이들을 “회사가 죽든 살든 자기들만 살려는 이기적인 집단, 빨갱이”로 매도했다.

처음 쌍용차 희생자들은 자살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심근 경색 및 뇌출혈로 스러져갔다. 초기의 몇 건의 자살 기도들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가 복직을 약속한 일 년이 지난 시점부터 자살자는 급증하고 그 방법도 극단적으로 변한다.

정리해고법에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해고 회피 노력, 공정한 기준, 성실한 협의 등 다섯 가지 단서조항이 달려있다. 처음에는 이 조항들이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나 최근 3년 동안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이 단서가 관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리해고와 관련된 모든 파업은 불법이고 노동자들은 금전적 손해까지 물어야 한다. 유연화라는 명분 아래 해고의 유연화, 빈곤의 유연화, 살인의 유연화, 살인 은폐의 유연화, 인간 경시의 유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은 잘나가던 쌍용차를 헐값에 매각한 노무현 정부의 경제 관료들과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조작 의혹이 짙은 상하이차의 ‘먹튀’를 방조한 이명박 정권은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회계 법인들, 전 경기도 경찰청장 조현오, 쌍용차의 노무 관리팀, 보수 언론들도 마찬가지로 이에 답하라고 말한다.

공지영은 재능 기부로 이 책을 썼고, 작가와 출판사의 모든 수익금은 기부된다고 한다. 쌍용차 문제 해결의 중대한 진전의 계기가 될 것이다. 쌍용차 문제의 해결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일자리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일차적이지만 그 이상의 우리 사회 전반의 개혁 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해고가 곧 나락이고 죽음인 현실과 경제 구조와 복지, 정리해고와 정리해고법, 국가 폭력과 인권, 사법 체계, 일자리와 노동, 언론, 대형 회계법인의 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과제로 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22명의 죽음이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제 2의 전태일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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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안철수를 읽는다
김보협 등 5명 / 한겨레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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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 19일 안철수 후보의 출마 선언 후 대선 후보 3인 사이의 지지율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은 출마선언 효과까지 더해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대선이 불확실성이 매우 큰 선거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변화를 몰고 오고 지지율은 파동을 그리므로 앞으로도 계기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를 보일 것이다.

현재의 지지율 추이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번 대선의 역동성은 갑자기 등장한 안철수가 철옹성이던 박근혜 대세론을 깨면서 형성되었다. 안철수의 갑작스런 부상은 ‘안철수 현상’이라는 사회학적 용어까지 만들며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은 물론이고 일선의 기자들조차 정작 안철수 후보를 잘 모르는 기이한 현상도 지속 되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안철수 후보의 언론을 대하는 태도는 박근혜 후보의 ‘복도 발언’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언론에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 기자들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부딪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의식해서인지 안후보는 출마 선언을 하면서 언론과 더 잦은 접촉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이 책은 한겨레 정치부 기자 다섯 명이 안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된다면 잘 할 수 있을지 등을 올해 7월 말과 8월 초에 걸쳐 대담한 기록이다.
저자가 다섯 명이므로 서로 다른 생각들이 많아 일목요연할 수는 없지만 안후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안철수의 생각’이 안후보의 개인사와 정책을 스스로 밝힌 책이라면 이 책은 안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대통령을 잘 할 수 있을지 등 정치인 안후보에 대한 외부의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안후보를 지지하든 아니든 여전히 궁금한 안후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강준만교수는 ‘안철수의 힘’에서 이번 대선에서는 ‘증오의 종언’이 필요하고 기존 정치와 떨어져 있던 안후보가 적임자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많은 논객들은 안철수 대통령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의 주요 논객들, 특히 정치학과 정당정치 전공 학자들이 그렇고 당연히 보수언론의 논객들도 거부감이 크다. 특히 안후보의 정치 경험 부재와 정당 기반이 없는 것은 전문가나 논객들 뿐 아니라 다수 국민들도 걱정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의 기저에는 20-30대의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노무현에게 열광했다가 실패한 경험 등이 있다고 한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고난에 빠진 민중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내는 처절한 소리라고도 했다. 양극화에 대한 반발도 결합되어 특권층에 대한 분노와 성공에 대한 갈망이 응축된, 즉 배고픔과 배아픔이 결합된 것이라고도 본다. 이런 현실에 대해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결부되면서 안철수 현상이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안후보는 대선 출마 선언을 통해 가치나 정책으로 여야 정당을 다 비판하면서 자신이 미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야권 단일화에 대해서는 정치권(사실상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 국민의 동의가 전제 되어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하지만 저자들은 안후보가 독자 무소속 후보로는 당선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야권 단일 후보가 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어떤 방식이든 후보 단일화를 한 뒤 민주당 후보의 틀을 가지고 대선 레이스에 뛰어드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다수였다. 그렇다고 민주당에 쉽게 들어갈 수는 없다. 기존 정당을 불신하는 것이 ‘안철수 현상’이기 때문이다. 야권은 단일화 과정에서 이 딜레마를 잘 풀어야 승리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사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정책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안철수의 생각’에서 정리한 복지, 정의, 평화는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경제 민주화, 한반도 평화와 일치하고, 문후보가 후보 수락 연설에서 발표한 5대 국정 목표인 일자리, 복지, 경제민주화, 새로운 정치, 평화와도 유사하다. 안후보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문후보와 안후보의 단일화는 그 자체로 야권이 주도하는 논쟁적 프레임이다. 여기에는 민주당이 쇄신할 수 있는지, 안철수 현상을 야권이 그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 정치 신인 안철수가 대통령으로 적합할 수 있는지, 단일화 과정이 합리적이고 감동적일 수 있는지, 시대정신에 맞는 가치와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지, 공동정부나 연합정부가 가능하고 순기능을 할 수 있을지, 안철수현상으로 표출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사실상 누가 대변하며 표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단일화 논의가 이슈 블랙홀이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현재 새로운 정치의 키워드로 거론되고 있는 화합의 정치, 복지와 경제 민주화, 평화 등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의제화하여 2-3개의 논쟁적 프레임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일화 과정의 의도적인 속도 조절과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번에는 과정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 이전투구가 되는 것은 최악이며 화합의 진정성을 과정을 통해 실제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객관성과 책임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동안의 야권연대에 역할을 해 온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 같은 시민 단위가 중재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안후보와 문후보가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대한민국을 창조해 가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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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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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껌에는 진짜 인삼 성분이 들어 있을까, 합성 인삼향만 들어 있을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호두과자에는 호두가 있는데 인삼껌은 잘 모르겠다. 소설은 분명 허구(합성)인 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현실의 어떤 모습이 들어 있을 때 더 감동적이다.

1년 반 전 창비를 통해 이 소설을 알았고 한동안 지인들에게 가장 첫 번째로 추천했던 소설이었다. 몇 권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어쩌다보니 나에게 이 책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주문해서 읽었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침이 고인다’는 20대 젊은이들의 삶을 잘 드러내 준다. 피아노를 배우면 피아노 영재가 되고, 공부는 했다하면 우등생이고, 오랜 고생 끝에 고시에 척 합격하는 드라마 같은 삶은 없다. 대신에 돈 때문에 온갖 구차한 삶을 견뎌야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치기공과에 다니는 언니는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피부하고 치아라더라.”고 전한다. 언니는 자기 남자친구의 누르스름하고 고르지 않은 작고 오래된 치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가 있는 반지하 셋방에서 여름 장마에 비가 무릎까지 차오는 상황에서 서울에 온 후 처음 피아노를 치는 나의 이야기인 ‘도도한 생활’.

대표작 ‘침이 고인다’에 묘사되는 한국의 학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흥미롭다. 연봉이 1억이 넘고 심지어 연수입이 수십억에 달한다는 학원 강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원 강사들은 높은 강도의 노동과 많지 않은 수입으로 힘겹다. 아침마다 알람 소리에 갈등하고 몸은 힘들고 돈만 아는 원장, 이사장들의 몰상식에 휘둘린다. 학원 강사인 나의 삶에 거의 20년 묵은 인삼껌을 간직한 대학후배가 그만큼의 사연과 함께 비집고 들어온다.

사귄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애인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연인이 있다. 지나간 크리스마스에는 여자에게 적당한 옷이 없거나 사내에게 돈이 없거나 하는 이유로 따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모텔을 찾아다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하룻밤이 실감나면서 안쓰럽게 그려져 있다.

노량진 학원가를 배경으로 재수생과 취업 준비생 등을 그린 ‘자오선을 지나갈 때’나 신림동 고시촌을 배경으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언니와 계속 실직 상태에서 과외로 살고 있는 나를 등장시킨 ‘기도’도 가슴 뭉클하다.

김애란의 소설에는 직접 겪지 않고는 표현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묘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몇 개만 예로 들면 고시촌 게시판에 있는 “제 지갑 가져가신 분, 죽어버리세요.”, 공무원 시험책을 사러 다니다 서울대 근처 헌책방에는 9급 공무원 시험책은 팔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일, 학원 체육대회 마지막에 자원해서 연단에 오른 버스기사가 노래를 부르자 ‘이상한 불편함’을 느끼는 학원선생들 등이다. 이런 디테일들이 소설에 숨을 불어 넣는다.

이 소설에는 재수생, 등록금이 없는 대학 신입생,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 실직자, 알바생, 혼자 힘으로 학비와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대학생, 힘겨운 학원 강사 등 다양한 20대 무렵의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냥 견뎌내고 있거나 그저 암울한 심정을 표현 할 뿐이다. 시장만능 무한경쟁시대에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설령 “출구”를 찾았다고 해도 별 의미도 없고, 아직도 “그 골목을 헤매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238쪽).       

대한민국 2,30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나갈 새싹은 어디에서 움트고 있는 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대표적인 신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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