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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부러우면 지는거다!
오랜만에 그의 책을 받아들고 보니 반가움이 왈칵 앞섰다. 마치 오랜만에 해후하는 친구처럼 그의 그림을 보니 익숙하면서도 정겨움이 가득하다.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 이야기>(2003, 마음산책)을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호쾌한 말빨과 함께 책 속에 그려진 그의 그림을 보며 즐겁게 읽었다. 그 후에 김영하 작가의 책 <오빠가 돌아왔다>(2004,창비)의 표지도 그가 그렸다. 개인적으로 그가 그린 표지의 책을 더 좋아한다. 익살맞은 모습이 책과 더 어울려서 그런지 바뀐 표지는 적응이 잘 안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접했던 작품들은 그가 만화가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만 결과물만 봤지 실제로 그의 글을 접하지 못했다.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은 그가 2015년에서 2017년까지 2년간 미국의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인 '포틀랜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와그의 아내, 딸 은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시에 작은 도시 포틀랜드(줄여서 퐅랜이라고 함)의 곳곳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매일 같이 비가 오는 도시이지만 잦은 비 때문인지 퐅랜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그의 푸념이 쏟아지는 가 하면 , 어느새 그들과 함께 우산은 쓰지 않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퐅랜의 사람들은 각종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수염의 모양 뿐만 아니라 푸른 수염을 한 사람의 인상착의나 수염을 기르는 과정이나 잔디처럼 잘 깎아줘야 폼이 난단다. 귀걸이나 목걸이처럼 타투를 패션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음악, 패션, 빈티지 가게, 음식, 각종 페스티벌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많은 축제의 현장을 다녀온 그의 이야기는 때론 시트콤 처럼 읽히기도 하고, 때론 빠른 행동에 손해 보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그런 센세이션한 정보를 늦게 알아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각종 페스티벌 체험기를 읽으며 슬며시 미소 짓기도 하고, 때론 기대에 못미치는 축제의 아쉬움의 기분을 함께 느꼈기도 했다.
그와 그의 아내 모두 책을 만들기도 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프리랜서여서 그런지 딸 은서와 함께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특히 딸 아이와 함께 누드 크로키 수업을 받으러 간다거나,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책으로 엮어 처음으로 서점에 판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빠로서의 만화가 이우일의 모습과 뒤늦게 테이프 수집을 하는 수집가로서의 면모를 뽐내는 수집벽(?)이 있는 그의 모습에 공감을 하면서도 이삿짐을 쌀 때 각종 잡동사니의 무게에 허덕이는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 또한 한 번 산 물건이나 갖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버리는 것이 아까워 늘 옆에 두다 보니 요즘 한창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심플 라이프' 를 꿈도 못 꾸고 있다.
그의 담백하고 유쾌한 이야기와 함께 곁들여진 일러스트를 통해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소도시 포틀랜드를 진솔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 이우일 만화가의 퐅랜의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도 좋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느꼈던 소소한 일상들과 생각의 편린들이 깊게 다가왔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점점 대도시의 풍경 보다는 소도시에 살고픈 마음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무엇을 잃어버리고, 어떤 것을아끼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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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서울이다. 하지만 내가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태어나 살아온 도시지만 나는 서울의 부분적이고 특정한 것들만을 마음 내키는 대로 기억할 뿐이다. 어디 살든 자기가 속한 도시에서의 삶은 각자의 것이다. 서울에 백 명이 산다면, 백 개의 서울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내가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를 선택해 살게 되면, 나만의 서울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만의 어떤 도시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도시가 다 비슷해 보일지라도 지구 위 사람들은 각각의 도시를 모두 다른 도시로 기억한다. - p.10
비를 사랑하게 되니 이따금 구름 사이로 비추는 은빛 햇살이 고마웠다. 계속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이 한없이 고마웠다. 계속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이 아름다웠다. 비가 그치고 등장하는 촌스럽게 거대한 무지개도 좋았다. 아마 해의 따스함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퐅랜의 비와도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은 정말로 궁합이 잘 맞아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 p.16
책으로 쌓은 미로의 성 같은 그곳은 정말로 그 이름을 자판에 두드리는 순간 당장 달려가고 싶어지는 그런 책방이다. 파월 북스와 함께 살아가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가. - p.101
카프카의 파란 눈 속에 내가 있고, 내 눈 속에 그가 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있을때. 오직 남은 것이라곤 기억밖에 없게 되었을 때. 퐅랜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이 결국 흐릿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되었을 때에도, 우리 넷이 함께했던 기억은 남아 있기를. - p.140
수영장에 누워 있으면 거대한 포플러 나뭇잎들과 오래된 아파트의 그림자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눈부시다. 길 쪽으로 난 낮은담 너머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스트리트카의 윗부분이 보인다. 딸랑딸랑 전차의 방울소리가 정겹다. 그렇게 그곳에 누워 있으면 깨어 있지만 꿈을 꾸는 것 같다.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나무들 사이로 솔솔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감고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기에 그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 p.171
사람이든 나라든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사람이 오래 살았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저절로 현명해지진 않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아무 노력 없이 스스로 발전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대단한 개인이나 국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면 점점 타락하고 추해질 뿐이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썩어 문드러지는 일만 남는다. - p.205
책을 만드는 일만큼,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또 있ㄴ느지 모르겠다. 개인의 작은 역사를 만드는 그 과정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루하루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만들어가며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러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전달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만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 자신만의 이야기를 읽고 깨우친다. 덕분에 삶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 p.2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