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36. 이승엽
이승엽 지음 / 김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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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는 팀이 달라도 언제 어디서든 응원하게 되는 선수!
 

 야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응원하는 팀이 있든 없든 언제 어디서든 응원하게 되는 선수가 바로 삼성 라이온즈. 36번. 선수 이승엽이다. 팀에 대한 충성심 보다는 좋아하는 선수가 어디에 몸담고 있는지에 따라 응원을 하다보니 매 시즌마다 응원하는 팀이 바뀌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랫동안 응원하던 특정 팀이 있었지만 초반에 잘 하다가 5월을 넘어 6월이 넘어가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던 팀이 내리막을 가고, 매번 후반부로 갈수록 스코어가 뒤집혀 속이 뒤집어지곤 했다. 그렇게 몇 해 시즌을 응원하다가 좋아하는 선수가 하나 둘 은퇴를 하다보니 열렬한 응원을 안하게 되었고, 간혹 마음이 가는 선수나 감독님이 계시는 곳으로 응원을 한다.


내가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즐거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지금도 야구할 때 가장 좋고 행복하다 - p.14


<나. 36. 이승엽>은 딱 야구선수 이승엽 다운 글로 쓰여진 책이다. 화려한 미사여구 보다는 묵묵하게 단문으로 쓰여진 글들이 때론 투박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절로 마음이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할 수 있다면 며칠을 밥을 굶을 수 있고, 야구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엄격한 아버지,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서포터인 어머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지탱하고 이끌어준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구선수 이승엽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야구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가 현역 선수로서 생활하면서 나쁜 일에 오르내리는 일을 뉴스로 접해보지 않았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야구선수로서 본보기가 좋았던 야구인으로 기억된다.


나는 "오늘 걸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명언을 좋아한다. 당장 힘들다고 놓아버린다면 내일은 더욱 힘들기에, 오늘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기 싫거나 힘든 것도 한 순간일 뿐이다. - p.35


어떤 종목의 선수이든지 멘탈이 좋아야 하고, 매 시즌때마다 허투루하지 않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스포츠 선수라면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많은 선수들이 자신이 받는 몸값을 하지 못하거나 운동이 아닌 다른 행동들로 인해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를 향한, 그가 몸담고 있는 팀에 대한 실망이 크곤 했는데 그는 그런 점에 있어서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야구만을 생각하며 몸을 만들어 나갔다. 그에게 있어 부모님, 아내, 아이들이 그의 인생에 있어 보물이고, 그를 지탱해준 사람들이다. 더불어 그가 운동을 하면서 멘탈이 흔들리거나 막다른 고비에 다다랐을 때, 일본에 가서 힘들었을 때 다잡아 주었던 스승들이야 말로 그를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잡아준 사람들이다. 백인천 감독, 박흥식 감독, 김성근 감독, 요시히코 코치,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이 그를 야구인의 자세를 바로 잡게 해준 팀이기도 하다.


스포츠 선수들은 경쟁과 전쟁의 연속이다. 단 한순간도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오늘 뛰었다고 내일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뛰어야 한다. 순간의 여유가 끝 모를 추락의 시발점이 된다. 상대를 꺾지 못한다면 내가 꺾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그게 바로 전쟁이다. 일본 무대에서 뛰면서 상대를 뛰어넘지 못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똑똑히 느꼈다. - p.38


우리나라에서 잘 했기에 그 역시 자신만만하게 메이저리그를 가기를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우회하여 일본으로 갔으나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다. 그는 일본에서 잘 하면 메이저리그에서 그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고 갔으나 생각과 달리 일본 야구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2군에서의 생활이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선수 개인으로서도 응원하는 팬으로서도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그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국내로 복귀한다.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안타와 홈런으로 기량을 뽐냈으나 그는 은퇴 시점을 예고했고, KBO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를 하며 야구 인생 1막을 내리며 무대로 내려왔다.


2막을 시작한 그는 야구 장학재단도 만들고, 은혁이와 은준이의 아빠로, 다정한 남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때로는 그에게 무뚝뚝하면서도 혹독하게 대했던 그의 아버지도 이제는 내 아들이 최고라며 그에게 엄지를 치켜 세우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로서 그는 가족사랑과 더불어 야구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았다. 국가대표로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으면서도 언제든 해결사 노릇을 해왔던 그를 이제는 어느 경기장에서건 볼 수 없지만 좋은 야구 선수 였던 만큼 새로운 2막 인생도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뚝심. 노력이 지금의 이승엽을 만들었고, 한 길만을 파고, 또 하며 그 길만을 정진해온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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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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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나 깊이 알지 못했던 추사의 삶과 예술


 알쓸신잡 2에서 나왔던 제주도편에서 추사 선생의 세한도를 본따서 만든 제주추사관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유시민 작가가 들어가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한 소개와 함께 세한도에 관한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제주도의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멋진 기념관이 있는지 몰랐다. 다음에 제주도를 가본다면 꼭 들러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으나 왜 제주도에 추사를 기념하는 공간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교과서를 통해 그의 이름과 호, 그의 글씨들, 그림으로 남겨 놓은 저작들을 몇 작품 알고 있으나 그가 언제적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추사 김정희로 알고 있었기에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이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저 다른 인물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알고 있으나 깊이 알지 못했던 추사의 이야기를 유홍준 교수는 <추사 김정희>를 통해 이전에 출간되었던 <완당평전>의 오류를 바로 잡고 한 권의 책으로 다시 출간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깊이 알지 못했던 한 선비이자 예술가의 이야기는 산과 바다에 비유한 것처럼 높고 깊다.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서로 지낸 김노경이고 어머니는 김제군수를 지낸 유준주의 딸인 기계 유씨다. 그의 집안은 순조 시대때 세도정치에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풍산 홍씨와 더불어 가세를 자랑했는데 추사의 고조 할아버지가 영의정, 증조 할아버지가 영조 대왕의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했기에 대대로 권력과 부를 축척했던 이유가 아닌가 싶다. 더불어 영조의 비였던 정순왕후 역시 경주 김씨의 사람이였기에 그의 탄탄한 입신양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귀한 집 종손으로 한껏 귀여움을 받았으나 열살을 넘어서는 대들보였던 양아버지, 할아버지가 타계하게 된다. 그의 삶에 있어서 예술과 학문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이 쭉쭉 뻗어갔지만 그의 식솔들은 그가 깊이 뿌리를 내린만큼 명을 다하지 못한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 뿐만 아니라 스승, 벗의 죽음까지도 그의 삶에 깊숙히 파고든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글을 통해 그를 기리게 되지만, 그가 제주도로 위리안치라는 형을 받아 그곳에 머물렀을 때도 그는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의 탄탄한 집안을 뒤로하고 그가 영향을 받고 인연을 이어갔던 이들 중에서는 스승 박제가와 다산 선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의외의 사제지간이었던 추사 김정희와 박제가의 만남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위치적으로 추사는 귀한 대갓집 자제였고, 박제가는 서출 출신이었으나 청년 김정희는 그를 잘 따랐다. 훗날 박제가가 죽은 뒤에 그의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 연경에 간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는지 그와 박제가는 서로를 존중하며 서신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책은 그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삶과 예술, 학문에 관한 이야기가 잘 그려져 있으나 그가 때때로 써내려간 글귀가 때때로 정갈하기도 하고 힘이 느껴지기도 하다가 때론 일부러 흘려쓴 글씨를 마주 하기도 한다. 글씨에 대한 평가는 내릴 수 없음으로 그가 써내려간 작품들을 알아가듯 페이지마다 정성가득한 그의 글씨와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가득한 책이었다.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세월이 흘러 변해가는 그의 글씨체를 보는 재미를 준다.


너는 열심히 읽고 가르침에 따르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한즉 사람의 도에 이를 것이니 열심히 공부할지어다. 때는 경진년(1820) 5월 초승달이 뜬 지 사흘이 지난 날(6일) 아비가 쓰다.


자식에게 줄 교과서로 쓴 것이기 때문에 그 글씨를 보면 아주 모범적인 해서체로, 필획마다 강철을 오려놓은 것 같은 굳센 힘이 느껴진다. 자신은 개성을 추구하지만 자식은 정도로 가기를 희망하는 아비의 마음이 그렇게 서려있다. - p.149


더불어 그의 본처가 죽고 다시 얻은 부인에게 자식이 없어 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상우가 태어난 것이 반갑고 기뻤는지 그는 유려한 글씨로 아들을 위해 <동몽선습>을 직접 필사한다. 예전에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가 아들인 문효세자의 공부를 돕기 위해 직접 필사를 했다며 의빈 성씨에게 건네는 장면이 나오는데 추사 역시 직접 필사를 해서 묵은 책 뒤에 아비의 마음을 담아 글을 몇 자 적어 놓았다. 후세에 남길 정도로 대단한 작품도 좋았지만 아들에게, 벗에게 남긴 편지들을 통해 당시의 추사의 마음을 알아갈 수 있어서 그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눈길을 사로 잡았다. 


이를 보면 추사는 인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 박제가를 만난 것, 연경에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것, 벗 조인영이 죽음에서 그를 구원한 것, 초의와 권돈인 같은 평생의 지우를 얻은 것 모두가 큰 인복이 아닐 수 없다. 복은 덕으로 인해 받는다고 했으니 추사의 인덕이 인복으로 내린 것이리라. - p.257


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그를 도와주지만 그가 어렸을 적 예지적으로 예언을 했던 채제공의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앞을 내다본 그는 추사의 평탄하지 못한 삶을 알았던 것처럼 추사 김정희는 두 번의 유배길에 오른다. 척박했던 제주도에서의 유배는 그의 삶을 압박했지만 알고자 하는 학자로서의 삶은 꺾지 못했다. 때때로 까다로운 입맛을 자랑하는 그의 편지가 식솔들에게 전해져 그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주변에서 식재료를 구할 수 없기에 식솔들에게 당부와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려보내라는 전갈이 전해진다.


후에 그의 연구를 우리의 학자가 아닌 조선 북학파를 깊이 연구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그의 아들인 아키나오가 이어 받아 청나라 학술 연구를 비롯 추사 연구에 힘썼다. 청조학 연구의 일인자였던 그는 추사 김정희가 학문의 핵심이라고 했을 정도로 추사의 학문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연구하면서 모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업적과 귀한 작품 역시 그의 손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 역시 책의 중반부에 세한도를 얻는 과정이 세세하게 나온다. 우리가 훗날 이 작품을 볼 수 있었던 과정은 드라마틱했으며, 한 사람의 열정이 가져다 준 효과는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이토록 다양하고 다채로운 추사의 예술과 학문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다변적으로 느껴졌다. 한 권의 압축된 액기스는 두고두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추사 김정희를 말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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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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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속내를 펼칠 수 없는 곡진한 이야기.


시적인 문장과 사부작 사부작 걸어가는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묘함이 돋보이는 단편집인 <환상의 빛>(2014, 바다출판사)에 매료되어 다시 한번 그의 서정적인 문학에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다. 표지도 제목도 미야모토 테루가 나타내는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어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이 컸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나의 기대와 달리 전작인 <환상의 빛>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이 짧은 호흡으로 네 편의 단편으로 색채를 드러냈다면, 이번 작품은 긴 호흡의 장편소설이나 어딘가 모르게 결이 고운 문장 보다는 서먹하고, 서걱거리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지도 않고, 문장 자체도 고운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트는 것처럼 주변의 묘사가 세밀할 뿐,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와 연고도 없이 로스엔젤레스에서 혼자 살고 있던 고모 기쿠에가 갑작스럽게 온천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겐야는 고모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고모가 생전에 변호사에게 남겨놓은 유언장을 듣게되고, 고모가 남겨놓은 전재산인 400억원의 유산 상속인이 자신 인 것을 알게 된다. 유언장에는 겐야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한다는 서명이 되어 있지만 5줄 정도 지운 흔적이 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고모의 딸인 레일라가 6살 때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지만 사실, 유괴되어 사라졌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된다면 재산의 70%를 그녀에게 상속되었으면 좋겠고, 만약 찾지 못한다면 찾을 수 있는 재단에 재산의 일부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실려 있었다.

겐야는 자신의 아버지 조차 자신의 동생인 기쿠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몰랐고, 그가 대학원에 진학 했을 때 고모는 기꺼이 가족들의 반대에도 그의 진학을 도왔다. 그는 고모와의 추억을 되짚으며 고모가 그토록 찾으려고 한 레일라의 흔적을 사립탐정을 고용해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하는데...고모부는 병으로 죽고, 고모 혼자 살아가던 대 저택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풀꽃들이 가득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집 주인은 사라졌지만 정원사와 가사도우미는 여전히 있고, 그녀가 만든 스프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고모가 사용한 핸드폰을 비롯해 숨겨둔 비밀의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본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들켜서는 안되는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겐야는 젖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의자에서 일어나 짙은 오렌지색 거베라의 꽃잎을 만졌다. 도라지의 줄기에 가까운 부푼 부분도 살짝 만졌다. 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아주 어렸을 때가 몇 살 때쯤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가르쳐준 비밀 의식은 너무나 풀꽃들에게 말을 걸어 칭찬하고, 칭찬하고, 또 칭찬해주면 나무도 풀꽃들도 답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으니까. - p.158~159


자카란다 거목을 비롯해 많은 풀꽃들과 허브들이 즐비한 공간. 그곳에서 겐야는 할머니가 배운 비밀의식을 행하며 그들에게 조용히 마음을 읊조리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곡진한 마음을 기쿠에는 자신의 공간에 마음을 다해 공간을 채워나갔다. 누군가와의 편지를 돌리고, 돌려 누군가가 확인하지 못하도록 꼭.꼭 싸매어 놓은 한 여자의 진심은 애절했다. 비로소 그녀가 죽은 뒤에야 그녀가 그토록 지켜주고 싶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열어놓을 수 없었던 것도 한 사람의 삐뚤어진 욕망 때문이었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그 운명을 바꿔놓고 스스로 생채기를 냈던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그의 문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자그맣게 호흡을 하며 드러내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어 문장 하나하나까지도 주인공의 심리를 정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가 드러나는 진실에 허탈하기도 했지만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성정을 일본인 특유의 특질로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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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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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생일에 일어난 일!


 무라카미 하루키와 도이칠란드 루켄발데 출신의 일러스트데이터 카트 멘시크와의 컬래버레이션의 조합으로 탄생된 이야기다. 하루키의 느슨하면서도 이야기의 골짜리로 들어가라는 듯 서서히 입질이 오는 그의 손짓에 이야기 열차에 탑승한다. 이름이 제법 알려진 롯폰기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1년 중 가장 즐겁게 보내야 할 그날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그날따라 비가 왔고, 갑자기 매니저가 아파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었다. 매니저가 할 일을 대신해 8시에 604호실로 식사를 가져다 주는 일을 그녀가 맡았고 그녀는 사장이 매일 먹는 치킨 요리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스무살 생일, 갑작스러운 보직 변동, 그동안 잘 지내오던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하게 되고 그날따라 그녀는 그녀의 생일에 누군가의 축하도, 인사도, 선물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장에게 식사를 건네주게 되고, 그녀는 마술처럼 누군가에게 하나의 소원을 말해보라 말한다. 딱 한가지의 소원만! 과연 그녀는 스무살 생일에 무엇을 빌었을까?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 때 꼭 그는 단 하나의 소원만을 이룰 수 있다 말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무엇을 빌까 고민하게 된다. 몇 가지 소원을 빌라고 하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 희소성의 가치가 떨어질까, 아니면 이야기의 긴장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키의 짧고도 열린결말 때문에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만약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명확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맺었더라면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는 열린결말을 참 싫어했지만 이로써 작가의 의도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었을지.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의 장면 마다 카드 멘시크의 그림이 인상깊게 자리잡고 있는데 붉은 색과 분홍, 흰색의 조합으로 그려진 작품은 한 번씩 하루키가 그려낸 단편의 세계를 더 이상한 나라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마치 이 공간이 롯폰기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아니라 다른 시공간에 있으며, 어디에 들었을짐한 이야기가 이야기가 하루키의 손에 다시금 쥐어졌을 때도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단편의 끝을 맺는다. 그의 단편을 읽고 나는 스무살 생일 때 무엇을 했지?라고 생각을 떠올려보지만 도무지 그 시간이 떠올려지지 않는다. 어제의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몇 십년 전의 일을 어떻게 기억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달력을 받으면 제일 먼저 내 생일을 비롯해 식구들의 생일과 기념일을 적어 놓았다. 외식을 하거나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마치 12월의 마지막 날과 1월 1일의 새해의 경계를 두지 않는 것처럼.


평범하지도, 우중충한 하루가 되었을 그날에 그녀는 소원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사장과의 만남으로 특별한 하루가 되지 않았을까. 계획이 아닌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진 특별한 순간들이 그렇게 그녀에게 스무살 생일을 기억하는 한 페이지로 기억되었다는 것 만으로 선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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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별의 초야
이영희 지음 / 우신(우신Books)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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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내음이 스며드는 달큼함과 은은함이 맴도는 사랑이야기.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은 영향으로 사랑을 믿지 않는 뇌색남 김도현과 제비꽃읍차에 살고 있는 심술보 가득한 아씨 정율희. 미행어사로 은밀하게 현수와 함께 돌아다니며, 사찰을 하고 다니고 있다. 도현을 모시고 있는 현수는 자신의 동무인 미우가 모시는 아씨의 흉흉한 소문에 도련님인 도현을 이끌게 된다. 정경구 대감은 부친의 오랜 친구이자 덕망이 높은 학자로서 이름을 드높인 분이시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 분의 하나뿐인 여식인 아씨 정율희는 심술보 가득한 몹쓸 처자라 입에 오르내리며 그녀를 손가락질 한다. 아버님 앞에서는 음전한 척 하지만 뒤에서는 어떤 팥쥐보다 더한 심술보로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군다며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의 용모와 영민한 머리를 갖고 있는 뇌색남 김도현에게 많은 처자들이 연모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은 내친다. 그런 그에게 학식이 드높은 정경구 대감에게 해가 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심술보 아씨를 사로잡기로 하는데... 다른 아가씨들은에게는 철벽남이자 눈길 하나도 주지 않는 그가 율희를 처음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게 되고, 그녀가 준비한 차를 음미했던 맛들이 계속해서 맴돌게 된다.


"할머니, 저는 연모의 마음 따위는 절대 가지지 않을 것이에요."

읽어버린 연모의 마음이 자식에게조차 잔인하고 냉정한 것이라면 그런 마음은 알고 싶지가 않았다. 연모를 잃은 마음이 그렇게나 얼어붙은 것이라면 연모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 가지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였다.

" 하지만 도현아, 진정한 연모를 만나게 되면, 진정한 나의 반려를 만나게 되면 그 운명은 밀어낸다고 하여 밀어내지지도,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도 않아." - p.65


그는 쌍태아로 태어나 어미에게 버림받고 할머니에게 아픈 마음을 위로 받았지만 결코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남자였다. 오래 전 그녀의 누이가 혼인을 하고, 다리가 불편한 남자와 결혼 했을 때 많은 염려를 했지만 그녀는 그의 아픈 다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그런 그가 율희를 보게 되고, 만나면서 자꾸만 달리 보이는 그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자꾸만 그이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음전한 아가씨일 뿐이다.


도현이 팔을 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담 곁의 말리꽃 꽃대를 살짝 뒤었다가 놓았다.

말리꽃(쟈스민)의 꽃말은 <연모의 맹세> - p.263~264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에 등장하는 꽃들이 아름다웠고,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는 지명이 낯설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꽃으로 이루어진 나라 화 가야. 나라이름을 비롯하여 마을의 이름, 사람을 부르는 명칭 까지도 꽃들의 이름 가득 베어있다. 화사하면서도 수수한 꽃내음이 절로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름을, 지명을 읊조려 보았다.


연모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을 이제서야 터트리는 걸까? 아니면 임자는 따로 있었던 걸까?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면서 이어지는 마음들을 꽃말로 정의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 둘 쌓여가는 연모의 시작점과 끝점이 만났을 때 과연 두 사람은 이어질지 너무나 궁금했다. 처음 시작은 한 사내가 한 여자의 심술보를 꺾는 일이었지만, 세상일이 과연 그의 마음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그는 알았을까? 정경구 대감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미행어사 도현이 칼을 들었지만 결국에는 그의 마음에 꽃이 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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