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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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속내를 펼칠 수 없는 곡진한 이야기.


시적인 문장과 사부작 사부작 걸어가는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묘함이 돋보이는 단편집인 <환상의 빛>(2014, 바다출판사)에 매료되어 다시 한번 그의 서정적인 문학에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다. 표지도 제목도 미야모토 테루가 나타내는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어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이 컸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나의 기대와 달리 전작인 <환상의 빛>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이 짧은 호흡으로 네 편의 단편으로 색채를 드러냈다면, 이번 작품은 긴 호흡의 장편소설이나 어딘가 모르게 결이 고운 문장 보다는 서먹하고, 서걱거리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지도 않고, 문장 자체도 고운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트는 것처럼 주변의 묘사가 세밀할 뿐,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와 연고도 없이 로스엔젤레스에서 혼자 살고 있던 고모 기쿠에가 갑작스럽게 온천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겐야는 고모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고모가 생전에 변호사에게 남겨놓은 유언장을 듣게되고, 고모가 남겨놓은 전재산인 400억원의 유산 상속인이 자신 인 것을 알게 된다. 유언장에는 겐야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한다는 서명이 되어 있지만 5줄 정도 지운 흔적이 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고모의 딸인 레일라가 6살 때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지만 사실, 유괴되어 사라졌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된다면 재산의 70%를 그녀에게 상속되었으면 좋겠고, 만약 찾지 못한다면 찾을 수 있는 재단에 재산의 일부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실려 있었다.

겐야는 자신의 아버지 조차 자신의 동생인 기쿠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몰랐고, 그가 대학원에 진학 했을 때 고모는 기꺼이 가족들의 반대에도 그의 진학을 도왔다. 그는 고모와의 추억을 되짚으며 고모가 그토록 찾으려고 한 레일라의 흔적을 사립탐정을 고용해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하는데...고모부는 병으로 죽고, 고모 혼자 살아가던 대 저택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풀꽃들이 가득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집 주인은 사라졌지만 정원사와 가사도우미는 여전히 있고, 그녀가 만든 스프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고모가 사용한 핸드폰을 비롯해 숨겨둔 비밀의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본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들켜서는 안되는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겐야는 젖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의자에서 일어나 짙은 오렌지색 거베라의 꽃잎을 만졌다. 도라지의 줄기에 가까운 부푼 부분도 살짝 만졌다. 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아주 어렸을 때가 몇 살 때쯤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가르쳐준 비밀 의식은 너무나 풀꽃들에게 말을 걸어 칭찬하고, 칭찬하고, 또 칭찬해주면 나무도 풀꽃들도 답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으니까. - p.158~159


자카란다 거목을 비롯해 많은 풀꽃들과 허브들이 즐비한 공간. 그곳에서 겐야는 할머니가 배운 비밀의식을 행하며 그들에게 조용히 마음을 읊조리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곡진한 마음을 기쿠에는 자신의 공간에 마음을 다해 공간을 채워나갔다. 누군가와의 편지를 돌리고, 돌려 누군가가 확인하지 못하도록 꼭.꼭 싸매어 놓은 한 여자의 진심은 애절했다. 비로소 그녀가 죽은 뒤에야 그녀가 그토록 지켜주고 싶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열어놓을 수 없었던 것도 한 사람의 삐뚤어진 욕망 때문이었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그 운명을 바꿔놓고 스스로 생채기를 냈던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그의 문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자그맣게 호흡을 하며 드러내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어 문장 하나하나까지도 주인공의 심리를 정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가 드러나는 진실에 허탈하기도 했지만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성정을 일본인 특유의 특질로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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