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옥이 - 이원수 동화집 창비아동문고 1
이원수 지음, 이만익 그림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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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31 어린이 사랑



《꼬마 옥이》

이원수

창작과비평사

1977.02.20.



어제 ‘이원수 글숲(문학관)’에 갔다. 언덕으로 버스가 올라가지 못해 삼백 미터쯤 걸었다. 다친 발가락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절룩거렸다. 글숲에 들어서자 꽃대궐 작은 책이 먼저 눈에 띈다. 신문종이를 반 크기로 네 번 접었다. 첫 쪽에 이원수 님 동시가 실리고, 뒤편 윗줄에 이원수 수필이 실리고, 밑에 문학관 이야기로 이원수 님을 주제로 쓴 글이 실리고, 이 옆에 어린이 ‘시마을 칸’에 아이들이 지은 동시를 실었다. 작은 책을 알차게 꾸렸다.


글숲에는 첫 유리칸에 이원수 님 호적이 있다. 이원수 님이 남긴 살림을 둔 칸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적은 수첩이 있다. 내가 아는 어느 이웃도 저렇게 깨알같은 글씨로 작은 공책에 적는다. 늘 생각하고 글을 적어 동시로 동화로 태어났을 테지.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동시를 나란히 세워 놓았다. 대구에서 어린이가 많이 온다던데, 이곳을 다녀간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마음에 담으려나 헤아려 본다. 


집으로 돌아와서 《꼬마 옥이》를 읽어 본다. 여러 글 가운데 <불새의 춤>와 <꼬마 옥이>에 한참 머문다. <불새의 춤>은 두루미 무용원에서 두루미가 춤을 추면 원장이 돈을 번다는 줄거리로 연다. 겨울이면 철 따라 떠나야 하는데, 그만 두루미는 꼼짝없이 한 곳에 갇혀서 춤을 춘다. 배가 고파 먹이를 더 달라고 해도 부질없고, 춤을 잘 추어도 먹이는 더 주지 않고, 오히려 하나를 줄인단다. 가장 춤을 잘 추는 28번 두루미 무용수가 미꾸라지 두 마리를 먹지 않고 입에 물고 기름(석유)을 묻혔다. 무대에 구경하러 온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버린 성냥개비를 찾아 제 몸에 불을 붙여 날면서 춤을 추면서 “얼음 같은 심장을 녹이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외친다. 이 이야기는 전태일 님이 몸을 불사른 일을 1970년에 신문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쓴 동화라고 한다. 군사독재가 서슬퍼런 때라 차마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못 했다지만, 두루미로 빗대어 쓴 동화라고 한다. 


《꼬마 옥이》는 짧은 동화를 일곱 꼭지 실었다. 피난길에 어버이를 잃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가 병들어 죽은 아이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털옷 주머니에 남은 인형을 주웠다지. 이 글은 이 옥이 인형이 들려주는 얼거리이다. 몸에서 나온 그림자가 주고받는 말하고, 자장노래 이야기하고, 하늘나라와 별나라를 구경한 이야기하고, 삼월 춤마당과 복사꽃이 피는 저녁 이야기를 들려준다. 옥이는 자라지 않고 늘 작기에, 이 인형을 처녀로 여겨 주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 옥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꿈속에서 본 옥이하고 헤어진 딸하고 맞물린다. 한겨레가 남북으로 갈려서 싸우던 무렵, 폭탄이 떨어져 죽은 어린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그린 듯하다. 나도 이 비슷한 꿈을 꾼 일이 있다.


큰딸이 태어나기 앞서 아이를 지웠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자꾸 이 아이가 떠올랐다. 지우지 않았더라면 이제 잘 자라서 몇 살일 텐데 하면서 어림잡다가, 큰딸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꿈에서 다시 만났다. 오빠와 여동생으로 짓궂고 때론 소름 돋게 놀라게 했지만, 낯빛이 밝았다. 나는 처음으로 서른 몇 해 만에 두 아이를 꿈에서라도 만난 셈이고, 두 아이는 다 큰 얼굴을 내게 보여주고 떠나갔다고 느꼈다. 그날 꿈에서 본 뒤로 두 아이한테 미안하던 마음이 사라지더라.


이원수 님은 눈앞에 보이는 슬프고 아픈 온갖 사회 이야기를 동화로 아름답게 돌려서 풀어내었다. 이분 글은 언제나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어린이를 알뜰히 생각하던 이원수 님은 왜 친일이라는 딱지가 붙었을까. ‘이원수 글숲(문학관)’에는, 다섯 가지 시와 글이 말썽이 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이원수 님은 일을 다니던 곳 주간지에 친일 글을 내놓았다는데, 징병을 살다 나온 뒤 일본이 쥐락펴락하는 북새통에서 몸을 사리고 아이들을 돌보려면 그 일터 윗사람 말을 따라야 했다고 한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살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일터를 다니던 1980∼90년대는, 일터에서 윗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시켜도 억지로 따라야만 했다. 까딱하다간 나를 ‘신원보증’해 준 사람까지 궂은 일을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하자면, 그나마 우리는 우리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낼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원수 님이 살던 때하고는 반세기가 넘는 틈이 있다. 그리고 일본이 사이에 있다. 어떤 흐름에 누구라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을 때였을 텐데, 이원수 님은 스스로 저지르고 만 얼룩을 나중에는 씻어내려고, 오래도록 아이들 가슴을 따뜻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글을 써 왔구나 하고,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아본다. 지난날 얼룩을 잊지 않았기에, 1970년 그 서슬퍼런 때에 전태일 이야기를 동화로 쓰지 않았겠는가.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북돋우는 동화를 쓴 마음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원수 글숲에서 ‘고향의 봄’이라고 새긴 잔을 샀다. 처음 내셨다는 《종달새》라는 동시집 겉에 나오는 그림을 잔에 담았더라. 뒤에는 여자아이 넷이 꽃을 든 모습이 있다. 둘째와 넷째 아이가 덧옷을 쓰고 머리에 수건을 썼다. 어깨에 얹거나 손에 든 꽃이 빨갛다. 두 아이를 잃어서 같은 아이를 넣었는지, 둘째를 찾아서 둘이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네 딸을 말하는 그림이지 않을까. 그곳에서 반팔옷도 두 벌 샀다. 입을 사람이 없을 수 있지만, 이원수 님이 열네 살에 쓴 <고향의 봄>이라는 동시가 적힌 옷을 입으면 시를 한결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2023.09.1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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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이야기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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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30 끈



《인연이야기》

법정

문학의숲

2009.7.5.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시끄러워서 읽던 책을 덮는다. 다른 책을 펼쳤다가 또 덮고 《인연 이야기》를 집는다. 열세 해 앞서 만난 이 책은 다시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을 쉴 수 있다. 아까까지는 책을 읽어도 글씨가 튕겨나가는 듯하더니 어느새 술술 익힌다. 첫째 글인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와 ‘시 반 구절과 바꾼 목숨’을 읽는다. 여태 시끄럽던 마음을 살살 다독인다. 


대구에서 가게를 열기 앞서 점집에 가서 물은 적이 있다. 점집에는 아들 낳으려고 답답한 마음에 처음 가고 더 안 갔는데, 짝하고 둘이서 우리 가게를 내려고 한참 헤맬 적에 다시 가 보았다. 가게를 어느 날에 열어야 할지 묻고 싶어서 가 보았다.


점집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 좋게 나왔다. 나는 점을 보는 사람한테 내가 예전에 어떤 일을 하는 삶이었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점집지기는 태어난 날을 묻는다. 이래저래 헤아리는 듯하더니, 내가 예전에는 서당에서 가르친 사람이었다고 알려준다. 그런가?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음이 한결 차분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 예전에 뿌린 씨앗이 그대로 돌아온다고 한다. ‘자신이 뿌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고스란히 거두게 된다는 것이 우주의 질서이다.’라는 글월을 되읽으면서 지난날 내 몸을 되새겨 본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여린 몸으로 자주 앓았다. 쉰 해 가까이 나를 괴롭히던 응어리를 문득 느끼고는, 이 응어리를 붙잡느라 그동안 놓치거나 잃은 나날을 돌아본다. 응어리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후련한 오늘을 돌려받는 듯하다.


남이 무어라 하기 앞서, 내가 나를 어둡게 보고 느낀 일이 언제나 나를 괴롭힌 셈이다. 내가 보는 그림이 좋든 나쁘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앞날에 스스로 뿌리고 거두는 셈이다. 여태 이런 일을 되풀이한 셈이다.


끈을 놓아야 할 때 놓지 않고 더 끌기에 그만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구나 싶었다. 스스로 아니라고 느꼈어도 멈추지 않고, 그래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냥 나아가려 할 적에 오히려 더 나쁘게 씨앗을 심고 마는 이웃을 본 적이 있다. 《인연 이야기》를 보면, ‘물질 보시는 사라질 때가 있지만 법의 보시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라는 시가 나온다. 


무엇에 목숨을 거는 하루였을까? 나도 다른 이웃도, 어떤 마음으로 무엇에 목숨을 걸면서 오늘을 살아왔을까? 무엇 때문일까? 어느 때에 사뭇 다른 얼굴을 보았을까? 그저 곱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인데, 그만 함부로 휘두르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엄마아빠한테 맡겨 놓았다는 듯이 마냥 해 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린 길은 아닐까?


사람이든 무엇이든,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게 마련이다.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는 동안 숱한 나날을 괴롭게 시달린다. 끈을 더 잡으려 하니 괴롭다. 끈을 놓으면 홀가분한데, 안 놓으니 시달린다. 끈을 붙잡지 말고, 새롭게 나아갈 꿈씨앗을 심으면 되는데, 나부터 꿈씨앗보다는 자꾸 다른 끈에 매달려 왔지 싶다. 바로 내가 나를 갉아먹으면서 살았다. 쓴맛을 등돌렸다.



2023.09.1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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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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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29 느끼는 몸을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작가정신

2004.07.20



다섯 해 앞서 벚꽃이 필 무렵에 송해공원 옥연못을 걸었다. 그날 나란히 걷던 분이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책을 읽으면 글쓰기에 이바지할 만하다고 얘기했다. 그날 덥석 이 책을 장만했다.


이 책에는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 공감각’이 나온다. 하나마다 여러 이야기를 담는다. 한 꼭지에도 온갖 이야기가 흐른다. 숱한 사람들이 여러 느낌(감각)을 놓고서 쓴 글을 꽤 많이 따서 실었다.


냄새(후각)를 떠올려 본다. 맡기 싫으면 숨을 살짝 멈춘다. 우리 일터 지하실에 들어가야 할 적에는 숨을 훅 참지만, 오 초만 지나도 숨을 쉬어야 한다. 땅밑에 고인 여러 냄새로 어질어질하다. 나이든 어머니한테서 나온 지린내도 떠오른다. 나이든 어머니가 오줌을 조금씩 지리셨는데, 옷에도 몸에도 집안에도 가득한 적이 있다. 옷을 갈아입히고 씻기고 문을 다 열자고 말했더니 갑자기 집안이 싸늘했다.


만지고 맛보고 듣고 보는 일은 혼자서 느끼면 그만이지만, 냄새는 숨을 쉬듯 마신다. 우리 몸은 움직이는 작은 바다인데, 맡기 싫은 냄새도 바다에서 나오는 냄새일 텐데, 냄새가 있는 그대로 퍼지면 어쩐지 힘겹다.


뿌연 마음에 향긋한 마음을 보탤 수 있을까. 뿌연 글에 향긋한 글을 보탤 수 있는가.


살갗(촉각)을 떠올려 본다. 두 아이한테 젖을 세이레만 먹였다. 셋째는 서너 달쯤 먹인 듯한데, 세 아이 모두 젖을 일찍 끊었다. 밥벌이로 하는 일이 언제나 먼저가 되어야 하고, 이 틀에 우리 아이를 맞추었다. 젖을 떼자 바로 떨어져 지냈다. 아이랑 가장 많이 만나고 품어야 할 무렵에 일을 너무 크게 여겼다. 지난날 내가 아이를 좀더 품었더라면 더 살가이 지내왔을까. 일은 일대로 하느라 고단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늘 미안하다.


글을 어떻게 써야 촉촉할까. 마음이 촉촉하면 글도 저절로 촉촉하려나.


맛(미각)을 헤아려 본다. 《감각의 박물학》은 “미각은 사회적 감각”이라고 들려준다. 다른 마음은 혼자서 즐긴다면 맛은 밥으로 끈을 잇는다. 우리가 먹는 밥은, 알고 보면 풀이나 짐승 살점이다. 밥맛을 너무 찾다가는, 자칫 굶주린 이빨을 드러내고야 만다. 기쁨이 아닌 ‘쾌락’은 혀끝에 너무 사로잡힐 적에 불거지지 싶다.


단맛도 짠맛도 아닌, 신맛도 있고 수수하거나 포근하거나 아름다운 맛이란 무엇일까. 글맛을 더하는 길이란 무엇일까.


요즘 나는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물고기나 귀뚜라미처럼 나도 귀로만 듣는 소리가 아닌,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초음파나 주파수를 느끼는 듯하다. 이 책을 읽기 앞서는 내 몸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다른 소리로 여기면서 이겨내려고만 했다.


눈은 빛을 모으는 일을 한다고 한다. 눈에 보인다고 여기지만, 정작 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머리에서 이루어진 모습을 그려낼 뿐이라고 한다. 얼핏 바라보면 하늘은 텅 비어 보이지만, 내가 못 보거나 못 느끼는 숨결이 가득하다고 한다.


두툼한 《감각의 박물학》에 실린 여러 따온 글 가운데, ‘돈키호테’에 나온 말이라는 “펜은 마음의 혀”라는 대목을 곱씹는다. 나는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내 몸하고 마음은 고스란히 박물관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박물관일 수 있다. 나라는 박물관에는 어떤 하루를 담을 수 있을까? 오늘 나는 어떤 글을 쓰고 그려서 노래할 수 있을까?



2023.9.1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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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1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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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28 이웃한테



《우리 마을 이야기 1》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길찾기

2012.03.20.



‘코로나19’라는 돌림앓이에 걸리고 낫던 하루가 한참 오래된 이야기 같다. 처음 《우리 마을 이야기 1》를 읽던 즈음에는 드디어 돌림앓이가 나았다고 여겨서 풀려났다. 막내아들하고 끙끙거리듯 서로 갇혀서 힘겹게 혼자 지내야 했는데, 그때 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일본에서 ‘나리타 공항’을 닦으려 하면서, 일본 정부가 ‘나리타 시골마을’을 어떻게 갈라놓으면서 사람들끼리 다투도록 불씨를 심다가 땅을 빼앗았는가 하는 줄거리를 들려준다. 우리는 쌀밥을 먹고, 무와 배추를 먹고, 수박과 참외를 먹는다. 모든 먹을거리는 땅한테서 얻는다. ‘땅’이라고 했지만, 그냥 땅이 아닌 ‘논밭’이다. 논밭이 있기에 우리가 서울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밥을 먹고 몸을 살찌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일본에 공항을 늘려야 한다면서 ‘경제발전’과 ‘관광수입’을 내세워 갑작스레 시골마을을 큼지막하게 통째로 밀어서 없애려 했단다. ‘나리타 공항’을 일본 정부가 마구잡이로 지으려 할 적에 시골사람이 어떻게 맞서고 부딪혔는지, 그때 시골 아이들하고 어른들이 무엇을 했는지 낱낱이 들려주는 《우리 마을 이야기》를 두근두근하면서 읽었다.


내가 나고자란 시골인 경북 의성에도 공항이 들어선다며 시끄럽다. 왜 의성 같은 깊은 멧골에까지 공항을 세워야 할까? 우리는 비행기를 그렇게 많이 타야 할까? 이미 있는 공항도 많은데, 왜 자꾸 공항을 세운다고 할까?


일본 나리타 산리즈카 시골마을에 공항을 밀어붙이려고 하던 즈음은, 우리 집은 오빠가 태어난 해이다. 내가 태어나기 두 해 앞서이다. 산리즈카 시골마을 사람들은 맨손으로 돌을 고르고 거름을 내어 드디어 기름진 논밭을 얻었고, 논밭에서 거두는 푸성귀와 쌀과 남새로 오순도순 살아왔다고 한다. 아주 넉넉하지는 않으나, 아이들이 자라면 큰고장 대학교에 보낼 돈을 이럭저럭 마련할 수 있을 만한 논밭살림이었단다.


아직 의성 시골마을을 통째로 갈아엎지는 않았지만, 이 만화책을 보면서 우리 옛마을이 이렇게 통째로 사라지겠구나 하고 느끼니 가슴이 시리다. 늙은 할머니인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처럼 늙은 할머니인 이웃은, 이제 흙으로 돌아간 우리 아버지이지만 우리 아버지 같은 늙은 할아버지인 이웃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만화책에서도 말하는데, 나리타 산리즈카 시골마을 사람들은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탈 일이 없다. 내가 나고자란 의성 멧골마을 이웃들도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탈 일이 없지 않을까? 나는 이제 대구로 나와서 살아가고, 어쩌면 앞으로 공항에 가서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다닐는지 모르나, 난 아직 비행기를 타고 일본이나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가 본 적은 없다.


‘공항은 공항으로 세울 곳에 땅을 내주어야 하는 사람들은 쓸 수 없는 시설이라면, 공항을 왜 시골에 지어야 할까?’


들과 밭에서만 살던 우리 아버지가 몸을 내려놓자, 우리 엄마는 논밭을 일구는 일을 줄였다. 흙을 일구기에는 이제 엄마 나이에 벅차다. 나리타 공항을 반대하는 마을과 달리, 내가 태어난 의성에서는 마을마다 서로 공항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좀더 욕심을 부린다고 할까.


《우리 마을 이야기 1》를 읽다가, “땅은 말이여 원래 누구 것도 아니란다. 이 땅은 우리 것도 공항 것도 아니여. 옛날부터 그저 여기 있었을 뿐, 하지만 누구 것도 아닌 땅을 일구고 갈고 씨앗 뿌려서 비옥한 흙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나여. 그냥 땅바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이 흙은 우리가 만들어 내고 매일 이 흙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온 게, 만져 봐라, 흙은 참말로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건 그냥 땅바닥이 아니여.” 같은 시골 할아버지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흙을 사랑하지 않고는 마흔 해를 싸울 수가 없겠지. 온몸으로 흙하고 하나가 되어 살아왔기에, 공항이 아닌 시골과 숲과 흙을 말할 수 있겠지.


의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흙으로 돌아간 우리 아버지뿐 아니라, 이제 의성 멧골이나 시골에는 순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다들 곧 흙으로 돌아간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시골에 공항이 들어선다고 하면, 땅값이며 집값이 올라갈 꿈을 꾸는 젊은이가 있을 만하다. 마을마다 서로 공항을 받아들이겠다고 다툴 만큼, 하루아침에 목돈을 거머쥐면서 마을을 살릴 수 있겠다는 꿈을, 아니 욕심을, 헛바람을 품을 수 있으리라.


땅이 팔리면 나무는 어떻게 될까? 주머니에 돈을 두둑히 채워 주고 자취를 감출까? 아직 흙을 일구는 어른들 마음은 어떨까?


파리가 날린다는 새 공항이 나라 곳곳에 많다는데, 의성에 짓는다는 공항은 어떨까? 우리는 비행기를 띄우고 내려야 돈을 잘 벌까? 쌀을 거두고, 마늘을 거두고, 수박과 참외를 거두고, 감과 능금을 거두어서는 돈을 못 벌까? 눈물이 난다.



2023.09.09.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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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맛 -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
알랭 코르뱅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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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27 책이름에 낚였지만



《날씨의 맛》

알랭 코르뱅 외

김혜연 옮김

책세상

2016.3.30.



《날씨의 맛》을 장만해서 읽던, 세 해 앞서 겨울을 떠올린다. 2020년 겨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덮으면서도 머리가 휑했다. 마음도 휑했다. 글밭(문장)을 넓히려고 온누리(우주)를 알고 싶었다. 날씨가 내 마음을 어떻게 열어 줄까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2023년 가을에 이 책을 다시 읽자니 아무래도 책이름(제목)에 낚였구나 싶다. 책이름에 이끌려서 책을 산 지난날이란, 허울이 좋아 보이면 덥석 집어무는 어리석은 마음이리라. 


하늘을 다스리는 해와 비와 바람과 눈과 안개와 천둥 번개를 한 갈래씩 다루면 꽉 찰 듯한데, 《날씨의 맛》은 역사학자 같은 분들이 쓴 글을 모았다. “영원히 내릴 것처럼 계속되는 질척하고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비” 같은 대목을 읽다가 놀랐다. 스탕달이 쓴 글에서 뽑았다는데, 비를 싫어하며 이렇게 적었단다. 《날씨의 맛》을 엮은 사람은 스스로 해나 비나 바람을 느낀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자꾸자꾸 다른 이름난 사람들 말을 따온다. 


해를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들 건강이나 열정이나 기질과 만족감을 결정짓는 것은 기후와 장소 대기와 물의 특성이다” 같은 대목은 마음에 들었다. 다만, 글을 왜 이렇게 어렵게 꾸며서 쓸까? 사람은 날씨와 바람과 물에 따라 삶과 숨결이 다르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쉽게 쓰면 글이 아니고, 어렵게 써야 글이 될까?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쓰는 글로는 책을 엮지 못 할까?


“넓고 습한 고장에서는 늘 사람이 무르고 햇빛에 많이 노출될수록 다혈질이고 잔인하여 열정적이고 풍습이 거칠고, 햇빛에 덜 노출될수록 침울하고 자신들의 열정을 제어할 줄 안다” 같은 대목을 곱씹는다. 숲이 있고 해를 고스란히 누려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 수 있다면, 숲이 없는 잿빛(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은 무척 사납고 메마르겠지.


내가 어릴 적을 떠올린다. 경북 의성 멧골에서 자라던 어린 날에는, 추우면 바람을 막아주는 멧비탈에서 햇볕을 쬐었다. 참 포근했다. 하루글(일기)을 쓰면 날씨를 빠트리지 않고 넣었다. 우리 집 세 아이 일기장에도 그날 날씨가 꼬박꼬박 적혔다. 날씨를 비, 맑음, 흐림으로만 적어도 그날을 쉽게 그릴 수 있고, 그날 하루가 왜 그랬는지 날씨를 거슬러서 어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 글(수필과 문학)을 배우려고 도서관에 가서 문학강좌를 들을 적에는, 내가 쓰는 글에 날씨를 쓰지 말라고 하더라. 


해 비 바람 안개 구름 눈 번개 천둥에서 태어난 말이 꼬리를 문다. 내 몸에는 저 날씨가 흐른다. 나는 날씨를 품으면서 살아간다. 해처럼 환하고 따뜻하게, 비처럼 차분하게, 바람처럼 개구지게, 안개처럼 슬쩍 감추고, 구름처럼 놀고 노래하는 마음이 자란다. 한 톨 밥알을 먹으면 볍씨를 논에 뿌리고 해바람비에 싹을 틔워 키우던 마음결이 나한테 스민다. 능금이 천둥 번개를 견디던 마음도 능금을 먹으면서 고스란히 떨리듯 스민다.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에 저 날씨가 양념으로 섞이는 셈이다. 


참외를 먹으면 참외 씨앗이 고스란히 똥으로 나오듯이 먹은 대로 나온다. 해 비 바람 안개 구름 번개 천둥을 먹고 살아가니, 늘 새로운 날씨를 빼다 닮는다. 땅에 깃든 모두를 고르게 비추고 보듬는 해처럼, 모든 숨결을 낳고 촉촉이 적시는 비처럼, 숨으로 입김을 불어넣는 바람처럼, 하늘이 느끼는 마음을 우리 몸에 담다가 부싯돌이 일어나면 온갖 이야기가 드러난다.


말로 글로 몸짓으로. 우리는 성을 내어도 땅을 다스리는 하늘은 눈처럼 모두 덮으면서 다독이며 키워낸다. 불뚝 고약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나오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불쑥 나오는 날씨 맛을 가다듬으면서 나를 이바지하도록 다스리자. 늘 똑같은 듯 다르게 하늘이 펼치는 날씨가 저를 닮고 따뜻하게 촉촉하게 시원하게 흐르듯 살자. 해바람비랑 눈 안개 구름 번개 천둥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럭무럭 자라자. 나도 더 자라야겠다.



2023.09.08.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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