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옥이 - 이원수 동화집 창비아동문고 1
이원수 지음, 이만익 그림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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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31 어린이 사랑



《꼬마 옥이》

이원수

창작과비평사

1977.02.20.



어제 ‘이원수 글숲(문학관)’에 갔다. 언덕으로 버스가 올라가지 못해 삼백 미터쯤 걸었다. 다친 발가락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절룩거렸다. 글숲에 들어서자 꽃대궐 작은 책이 먼저 눈에 띈다. 신문종이를 반 크기로 네 번 접었다. 첫 쪽에 이원수 님 동시가 실리고, 뒤편 윗줄에 이원수 수필이 실리고, 밑에 문학관 이야기로 이원수 님을 주제로 쓴 글이 실리고, 이 옆에 어린이 ‘시마을 칸’에 아이들이 지은 동시를 실었다. 작은 책을 알차게 꾸렸다.


글숲에는 첫 유리칸에 이원수 님 호적이 있다. 이원수 님이 남긴 살림을 둔 칸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적은 수첩이 있다. 내가 아는 어느 이웃도 저렇게 깨알같은 글씨로 작은 공책에 적는다. 늘 생각하고 글을 적어 동시로 동화로 태어났을 테지.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동시를 나란히 세워 놓았다. 대구에서 어린이가 많이 온다던데, 이곳을 다녀간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마음에 담으려나 헤아려 본다. 


집으로 돌아와서 《꼬마 옥이》를 읽어 본다. 여러 글 가운데 <불새의 춤>와 <꼬마 옥이>에 한참 머문다. <불새의 춤>은 두루미 무용원에서 두루미가 춤을 추면 원장이 돈을 번다는 줄거리로 연다. 겨울이면 철 따라 떠나야 하는데, 그만 두루미는 꼼짝없이 한 곳에 갇혀서 춤을 춘다. 배가 고파 먹이를 더 달라고 해도 부질없고, 춤을 잘 추어도 먹이는 더 주지 않고, 오히려 하나를 줄인단다. 가장 춤을 잘 추는 28번 두루미 무용수가 미꾸라지 두 마리를 먹지 않고 입에 물고 기름(석유)을 묻혔다. 무대에 구경하러 온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버린 성냥개비를 찾아 제 몸에 불을 붙여 날면서 춤을 추면서 “얼음 같은 심장을 녹이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외친다. 이 이야기는 전태일 님이 몸을 불사른 일을 1970년에 신문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쓴 동화라고 한다. 군사독재가 서슬퍼런 때라 차마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못 했다지만, 두루미로 빗대어 쓴 동화라고 한다. 


《꼬마 옥이》는 짧은 동화를 일곱 꼭지 실었다. 피난길에 어버이를 잃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가 병들어 죽은 아이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털옷 주머니에 남은 인형을 주웠다지. 이 글은 이 옥이 인형이 들려주는 얼거리이다. 몸에서 나온 그림자가 주고받는 말하고, 자장노래 이야기하고, 하늘나라와 별나라를 구경한 이야기하고, 삼월 춤마당과 복사꽃이 피는 저녁 이야기를 들려준다. 옥이는 자라지 않고 늘 작기에, 이 인형을 처녀로 여겨 주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 옥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꿈속에서 본 옥이하고 헤어진 딸하고 맞물린다. 한겨레가 남북으로 갈려서 싸우던 무렵, 폭탄이 떨어져 죽은 어린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그린 듯하다. 나도 이 비슷한 꿈을 꾼 일이 있다.


큰딸이 태어나기 앞서 아이를 지웠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자꾸 이 아이가 떠올랐다. 지우지 않았더라면 이제 잘 자라서 몇 살일 텐데 하면서 어림잡다가, 큰딸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꿈에서 다시 만났다. 오빠와 여동생으로 짓궂고 때론 소름 돋게 놀라게 했지만, 낯빛이 밝았다. 나는 처음으로 서른 몇 해 만에 두 아이를 꿈에서라도 만난 셈이고, 두 아이는 다 큰 얼굴을 내게 보여주고 떠나갔다고 느꼈다. 그날 꿈에서 본 뒤로 두 아이한테 미안하던 마음이 사라지더라.


이원수 님은 눈앞에 보이는 슬프고 아픈 온갖 사회 이야기를 동화로 아름답게 돌려서 풀어내었다. 이분 글은 언제나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어린이를 알뜰히 생각하던 이원수 님은 왜 친일이라는 딱지가 붙었을까. ‘이원수 글숲(문학관)’에는, 다섯 가지 시와 글이 말썽이 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이원수 님은 일을 다니던 곳 주간지에 친일 글을 내놓았다는데, 징병을 살다 나온 뒤 일본이 쥐락펴락하는 북새통에서 몸을 사리고 아이들을 돌보려면 그 일터 윗사람 말을 따라야 했다고 한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살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일터를 다니던 1980∼90년대는, 일터에서 윗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시켜도 억지로 따라야만 했다. 까딱하다간 나를 ‘신원보증’해 준 사람까지 궂은 일을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하자면, 그나마 우리는 우리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낼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원수 님이 살던 때하고는 반세기가 넘는 틈이 있다. 그리고 일본이 사이에 있다. 어떤 흐름에 누구라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을 때였을 텐데, 이원수 님은 스스로 저지르고 만 얼룩을 나중에는 씻어내려고, 오래도록 아이들 가슴을 따뜻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글을 써 왔구나 하고,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아본다. 지난날 얼룩을 잊지 않았기에, 1970년 그 서슬퍼런 때에 전태일 이야기를 동화로 쓰지 않았겠는가.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북돋우는 동화를 쓴 마음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원수 글숲에서 ‘고향의 봄’이라고 새긴 잔을 샀다. 처음 내셨다는 《종달새》라는 동시집 겉에 나오는 그림을 잔에 담았더라. 뒤에는 여자아이 넷이 꽃을 든 모습이 있다. 둘째와 넷째 아이가 덧옷을 쓰고 머리에 수건을 썼다. 어깨에 얹거나 손에 든 꽃이 빨갛다. 두 아이를 잃어서 같은 아이를 넣었는지, 둘째를 찾아서 둘이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네 딸을 말하는 그림이지 않을까. 그곳에서 반팔옷도 두 벌 샀다. 입을 사람이 없을 수 있지만, 이원수 님이 열네 살에 쓴 <고향의 봄>이라는 동시가 적힌 옷을 입으면 시를 한결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2023.09.1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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