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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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1 한 그루 나무



《랩걸》

호프 자런

김희정 옮김

알마

2017.2.16.



지난해 여름에 어느 이웃이 《랩걸》이 좋으니 읽어 보라고 했다. 그분은 하루에 몇 쪽씩 아껴가면서 읽는다고 했다. 참 좋은 책인가 하고 여기다가 다른 이웃한테 《랩걸》을 사서 읽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이 훨씬 낫다고 하더라. 이분 얘기로는, 과학자는 나무를 과학으로 볼 뿐이라서, 나무 마음에 다가서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와 달리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은 나무를 오롯이 나무로 바라보고서 마음으로 다가서려고 하기에 ‘과학자 아닌 사람’이 쓴 책이 나무도 풀꽃도 제대로 풀어내어 들려준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사백 쪽을 웃도는 두꺼운 책에는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고 적혔다. 아무래도 나는 이 말에 낚인 듯하다. 나무도 사랑도 아닌, 나무를 앞세워 ‘여성 과학자’라는 이름을 풀어놓은 줄거리이다. 그래, 글쓴이는 나무를 본 적이 없구나. 실험실에서만 사느라, 나무를 기웃거린 적은 있고, 나무를 뜯은 적은 있어도, 나무가 나무로 살아가는 숲을 품으면서 살아간 적은 없구나.


내가 일하는 가게 모퉁이에 전봇대가 있다. 이 언저리 거님길 틈에 벚나무가 한 뼘 자란다. 전봇대와 건널목 사이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고, 요 사이에 조그맣게 싹부터 돋아서 자라나는 아기 벚나무라고 하겠다.


예전이라면 잡풀로 여겨서 뽑았을 텐데, 이제는 잡풀이 따로 없는 줄 느껴서 가만히 바라본다. 그냥 풀일 뿐이다. 작은 풀에 깃든 숨결을 새롭게 마주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조그마한 틈에서 싹을 내고 올라올까. 앞으로 전봇대랑 나란히 자랄 수 있을까. 제법 키가 오를 즈음에 안 뽑히고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봇대한테 거치적거린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들이 슥 뽑거나 베어버리지 않을까.


바닥에 얼굴이 닿을 듯 엎드려서 새싹한테 속삭인다. “기운내, 잘 버텨라.”


나무씨앗도 처음 싹이 틀 즈음에는 풀하고 똑같다. 모든 씨앗은 풀씨처럼 떡잎이 나온다. 작은 들풀이 어느새 나무로 바뀌고 숲으로 퍼지는 셈이다. 우뚝우뚝 서는 쉰 살이나 백 살에 이른 나무가 되기까지, 모든 나무는 그야말로 힘껏 버티거나 견뎌내는 나날이지 싶다. 천천히 잎을 내고, 천천히 줄기가 굵고, 천천히 가지가 뻗으면서 먼먼 앞날을 기다린다.


그끄저께에 영양 죽파리로 자작나무를 보러 갔다.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자작나무 한 그루마다 씨앗을 25만쯤 맺는다는 말을 들고 놀랐다. 씨앗은 그처럼 많아도 싹트는 아이는 몇 안 될 테지.


《랩걸》을 보면, 아카시아는 뿌리가 매우 깊게 내린다고 한다. 일터에 있다가 자주 찾아가는 숲에는 아카시아가 곳곳에서 휘청인다. 휘청이다가 쓰러진 나무를 보면, 뿌리가 얕고 짧다. 도시에서는 아카시아조차 뿌리를 제대로 뻗거나 내릴 틈이 없는 셈이리라.


우리가 이곳에서 사람만 살아가려 하지 않고 나무하고 함께 살아가려 한다면, 나무가 마음껏 뿌리를 뻗는 터전을 이루면서, 사람도 마음껏 발을 뻗고 쉬거나 놀며 어울릴 터전으로 바뀌지 않을까. 열매를 더 크고 빠르게 얻거나 더 손쉽게 따려고 함부로 가지를 휘어 놓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먹는 과일도 우리 몸에 제대로 이바지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가지치기가 아닌 가지살림으로 나무를 바라보아야 나무도 살고 사람도 살리라 본다. 나도 해마다 나무 한 그루씩 심고 싶다. 나무가 반길 만한 글을 써서 책으로 담고 싶다.



2023.10.29.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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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는 잣나무 아나스타시아 2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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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0 내 손으로 나를



《소리내는 잣나무》

블라지마르 메그레

한병석 옮김

한글샘

2007.10.20.



몸살을 앓았다. 비나리(제사) 떡을 먹은 뒤 갑자기 머리가 묵직하더니 추웠다. 끙끙 앓으며 스물한 시간을 꼬박 잤다. 다시 깨서 열 몇 시간을 또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이렇게 오래 잘 수 있나 싶었다.


그리 맑지 않은 몸인데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었다. 두어 쪽 읽다가 잠들고, 또 일어나 몇 쪽 읽다가 잠든다. 또 읽으려고 붙잡지만 멍하다.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으면 첫머리에 ‘사람이 아픈 까닭’을 짚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숲하고 등진 탓에 아프게 마련이고, 숲하고 등지면서 마음이 가라앉거나 얼룩지기에 자꾸 아파서 안 낫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마음에 사랑을 심으면, 약이나 병원이 없이도 바로 나을 수 있다고 들려준다.


우리는 늘 마음 때문에 아프다고 한다. ‘난 아파’ 하는 마음을 품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딱히 아픈 데가 없어도 건강검진을 받는다. 건강검진을 받을 적에는 설마 아픈 데가 있을까 싶어 걱정을 한다. 나이가 든대서 아파야 할 까닭이 없지만,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지레 걱정을 하고, 그 나이에는 꼭 어디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며칠을 돌아본다. 나는 왜 몸살이 났을까? 나는 마음에 어떤 걱정과 근심을 심었을까? 난 무엇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마음에 사랑을 제대로 심었던가? 사랑을 심지 않은 채 바쁘게 일하다가 그만 몸이 미끄러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생산한 생각은 무엇이든 어디론가 그냥 사라지지 않아. 밝은 생각은 밝은 공간을 채우고, 밝은 세력 편에 서게 되고 검은 것은 반대편에 서게 돼.”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긴다. 그래, 나는 내가 뱉고 생각한 것들은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했다. 스스로 뱉은 말은 스스로한테 언젠가 고스란히 돌아가겠지. 돌아갈 적에는 어두운 생각이건 밝은 생각이건 착 붙어서 이 생각대로 부채질로 키워 간다는 말을 되새길 테고. 


다 나은 다리한테 예전에 아팠던 사진을 보여주면 다시 아픔을 느낀다고 들었다. 참말 그렇다고 느낀다. 나부터 스스로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여기면 으레 안 되는 길로 갔다고 느낀다. ‘응, 잘 되리라 생각해.’ 하고 여기면 어느새 잘 되는 쪽으로 풀리더라.


우리 짝은 곧잘 아무 말이나 확 해버리곤 한다. 이럴 적마다 짝한테 말을 삼가자고 타이른다. 말이 씨앗이 되어 자란다고 얘기했다. 말은 우리가 시킨 대로 한다. 나쁜 말이다 싶거나 안 좋은 말이다 싶은 말은, 처음부터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 노릇이지 싶다. 걱정스럽거나 어두운 마음도, 아예 불러내지 말자고 타이른다.


가게 일이 잘 안 돌아갈 때나 몸이 아플 적에도 짜증이 슬그머니 나오는데, 이때마다 스스로 타이르려고 한다. 왜 굳이 이제까지 없던 짜증을 자꾸 불러내야 할까? 일이 잘 풀리거나 잘 되던 때를 돌아보건, 일이 안 풀리거나 안 되던 때를 더듬으면, 언제나 마음 하나가 다를 뿐이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냥 보거나 아무렇게나 말해서 안 되는구나 싶다.


책을 덮고서 생각한다. 난 무엇을 바랄까? 난 무엇을 이루고 싶을까? 난 여태까지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없는가? 나 스스로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꽤 크거나 많은데 정작 내 보람하고 열매는 바라보지 않으면서 더 멀리 있는 다른 보람이나 열매를 찾아나서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소리내는 잣나무》 219쪽을 보면, 글쓴이하고 아나스타시아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음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지.” “소리도 없이요? 누가 그걸 듣는다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듣는 법이지.” 곧이어 222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새벽의 장관은 감상해야 하는 것이지, 왜 그런지 따지고 캐기 시작하면 황홀한 감동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없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논리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80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나는 내 몸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내 몸을 토닥여 주었을까? 세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들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엄마아빠가 나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손은 의사도 간호사 손도 아니지만, 이 수수한 우리 손으로 서로 달래고 씻어 주었다.


도시에서 가지치기를 받는 나무는 슬퍼 보인다. 줄기나 가지가 뭉텅 잘린 나무는 아파 보인다. 우리는 거리나무한테 따스한 손길이 아니라 차가운 가위질을 해댄다. 이와 달리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아무도 가지치기를 안 하고, 비료나 거름을 안 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지치기로 짜리몽땅하게 괴로운 나무한테서가 아니라, 숲에서 스스럼없이 자라는 나무한테서 푸르고 아름다운 기운을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몸에 내 손을 살며시 대어 본다. 내 몸을 내 손으로 달랠 수 있을까? 내 몸이 아픈 까닭은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사랑을 일으켜서 스스로 달래 보도록 가르치거나 이끄는 셈이지 않을까?


병원에서 여러 가지 치료를 받을 적에 듣던 말을 떠올린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더라도 환자가 스스로 나으려고 마음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이들을 살살 쓰다듬던 손으로 내 몸을 살며시 쓰다듬고 토닥여 본다.


2023.11.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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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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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9 눈으로 마음으로



《예찬》

미셀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북스

2000.10.20.



세 해 앞서 《예찬》을 처음 읽었고, 오늘 이 책을 새로 읽었다. 세 해 앞서 이 책을 읽고서 ‘좋다’고 남겼는데, 오늘 다시 읽고는 ‘+’를 보탠다.


《예찬》은 “눈이 왕이다. 눈이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들려준다. 틀림없이 눈으로 많이 보고, 눈으로 느껴서 알아가는 일이 많다. 책도 거의 눈으로 보면서 읽어낸다고 여길 수 있다.


어린 날을 돌아보면, 배가 고프던 일보다 뛰놀던 일이 떠오른다. 넉넉히 먹으면서 자라지 않았지만, 우리 엄마아빠 품에 있는 동안에는 하루하루 아름답게 누렸다고 느낀다.


네발로 기던 아기는 어느새 일어나서 걸음마를 뗀다. 걸음마를 뗀 아기는 비틀비틀 걷다가 신나게 달리면서 논다. 이윽고 껑충 자랐고, 짝을 만나 어른으로 크면서,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른다. 첫째 둘째 셋째를 낳는 동안에 나한테는 아이들만 보였다. 세 아이와 함께한 나날은 아이들을 거쳐서 말없이 무언가 보여준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나를 보며 어머니를 다시 보았고, 어머니를 다시 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나를 새롭게 본다.


나는 바다처럼 볼 수 있을까. 마음으로 차곡차곡 스미는 길을 볼 수 있을까.


《예찬》은 때(시간)보다는 곳(공간)을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마음(안)보다는 밖(사회)을 더 바라보았다. 일거리를 찾고 살피고 이어왔다. 


땅, 나무, 짐승, 모두 살아가는 숲을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땅은 땅대로 자국을 남긴다. 나무는 나이테처럼 모든 일을 새긴다. 사람하고 이웃인 짐승은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모두 어우러지는 숲은 숱한 이야기를 베푼다.


풀과 나무한테는 사람 같은 눈은 없지만, 풀대로 나무대로 둘레를 본다. 잎눈하고 꽃눈은 풀과 나무가 둘레를 보는 눈이지 않을까. 잎하고 꽃으로 온누리를 보다가 씨앗을 남겨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지 싶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는 엄마한테서 젖을 받는다. 사람 곁에서 살아가는 소하고 염소는 어미소와 어미염소가 젖을 나누어 준다. 가만히 보면, 나무도 암꽃하고 수꽃이 있는데, 암꽃이 꽃가루를 받아서 열매를 맺어서 나누어 준다.


소도 말도 풀을 뜯는다. 풀잎을 골고루 누린다. 우리도 예전에는 온갖 풀을 다 다른 나물로 삼아서 고루 누렸다. 달거나 짜거나 시다는 맛 때문이 아닌, 푸르게 우거진 숨결을 그대로 보고 누렸다.


《예찬》을 읽다 보면 “숲도 사람처럼 지옥 같은 삶을 산다”고 적는데, “집단 수용소 같은 고통에서 자라는 풀꽃나무가 내뿜는 숨을 우리가 마시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적는데, 푸른숲에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할까? 아니지 않을까? 왜 풀밭과 나무숲을 갇힌곳(집단 수용소)으로 바라볼까?


작은 들풀은 서로 뿌리를 붙잡고서 돌개바람을 견딘다. 나무뿌리도 풀뿌리를 붙잡고, 풀뿌리도 나무뿌리를 붙잡으면서 회오리바람을 버틴다. 풀이 못 자라고 나무도 없는 모래밭(사막)이야말로 갇힌곳이지 않을까? 풀과 나무를 밀어낸 도시가 바로 갇힌곳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미셀 투르니에 님은 ‘눈’이 ‘마음’보다 대수롭다고 적었지. 겉으로만 보았기에 숲을 나쁘게 느꼈을 수 있다. 눈으로 볼 적에도 더 깊이 보려 했다면, 그리고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품으려 했다면, 숲에 흐르는 포근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한다.


2023.10.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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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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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8 마음을 알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8.20.



얼마 앞서 수필협회에서 여는 배움마당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니체를 이야기했다. 강사는 ‘세 변화에 대하여’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두 꼭지를 읽어 보라고 하더라. 집에 와서 살피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2010년 4월에 장만해 두었더라.


‘세 가지 변화’를 읽어 본다. 마음(정신)이 삶이라는 사막에서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이가 되는가를 짧게 들려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돌아본다.


눈에 보이지 않기로는, 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말은 입으로 하고 귀로 들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 텐데, 곰곰이 생각하면 말도 눈으로 본다. 눈속임이나 거짓말은 말이어도 눈에 보인다. 사랑이나 참말도 눈에 환하게 보인다.


눈으로 보거나 안 보기에 대수롭지는 않다. 눈앞에서 얌전하거나 착한 듯이 굴기에 얌전하거나 착할 수 없다. 우리 눈앞에서 안 얌전하거나 안 착하다면, 우리가 이런 모습을 못 보았더라도 안 얌전하거나 안 착한 몸짓이 없을까.


우리가 쓰고 읽는 글은 어떠한가. 글로 담은 줄거리가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게 보인다고 해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를까? 글로는, 또 말로는, 한껏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게 꾸밀 적에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나? 이렇게 책이 나왔으니 이 책에 적힌 대로 믿어야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헤아리려면, 마음을 키워야 하고, 마음을 키우면 글눈도 자랄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고 느끼면서도, 쉬운 말은 아니라고도 느낀다.


사람들이 ‘니체! 니체!’를 들먹어도 니체를 몰랐다. 니체가 쓴 책을 읽어 보았지만, 더구나 꽤 예전부터 장만해 놓았지만, 나는 니체를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잘 모르리라 본다. 그러면, 나는 나를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니체는 니체라지만, 내가 바라보는 하루와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읽는 삶을 얼마나 나답게 안다고 여길 수 있을까?


니체는 불같은 사람일까. 마음이 뜨거울까. 사랑을 바라다가 이루지 못 해서 그렇게 바뀌었을까. 니체가 바라는 대로 이루었다면 이 책이 나왔을까.


2023.10.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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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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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7 누가 시인일까



《아동시론》

이오덕

굴렁쇠

2006.11.10.



둘레를 살펴보니 배우는 사람이 많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를, 나처럼 아줌마들은 시를 배우고 글을 배우고 낭송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산을 가고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학교 다니듯이 돈을 내고서 배운다.


퇴직해서 배우는 사람은 일자리 걱정 돈 걱정 없어 부럽다.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아이들 유치원 가듯 배움터를 간다. 참말로 우리는 배우러 태어났을까.


어르신 배움터에 가서 글을 뽑는 일을 돕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맡는다. 이른바 ‘심사위원’이란 자리인데, 이 자리에 가기 앞서 이오덕 님이 쓴 《아동시론》을 다시 펼친다.


시인이란 이름을 붙인 어른들은, 따로 시를 ‘짜려(구축)’고 들지만, 아이들은 ‘삶’에서 이미 얻은 노래를 ‘스스럼없이 적(기술)’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라고 들려준다. 그러니까 어른도 아이처럼 스스럼없이 삶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느끼는 대로 노래하듯 풀어내면 언제나 저절로 시가 나오고 글이 나온다고 들려준다.


우리 아들이 아직 어리던 열 살 무렵에는 참말로 시인 같았다. 문제를 풀이를 하다가 답이 뭐냐고 물으면 답지에 “엄마가 생각하는 것이 답이야.”라든지 “아까 호랑이 죽은 거 봤잖아, 나 죽었다니까.”라든지 “이불이 저 혼자 점프하다가 떨어져서 그래.”라든지 “아이스크림이 죽었으니깐 시체야.”라든지 “오줌싼 게 아니라 땀이야.”라든지 “세수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하는 말마다 웃기기도 하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참으로 놀라곤 했다.


《아동시론》을 천천히 읽는다. 손과 발과 가슴으로 시를 써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도 삐뚤어진 손재주만 익히면서 길들어 왔지 싶다. 어린이가 학교에서 쓰는 동시만 이와 같을까. 어른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시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더구나 숱한 동시는 ‘어른들이 귀염짓을 하는 말씨’로 아이들한테 ‘거짓스런 흉내’를 내도록 시킨다고 쓴소리를 덧붙인다.


아이도 어른도 가슴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말을 즐겁게 쓰면 되겠지. 이 이야기를 안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나부터 아직 잘 모르는 셈일 수 있다.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마음을 고스란히 적을 줄 안다면, 참하면서 빛나는 글이 태어나겠지.


낱말 짜맞추기, 꾸미는 말솜씨, 재미스럽게 붙이고 깎기, 이런 말을 돌아보면 모두 어른 탓인지 모른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책을 쓰는 사람은 다 어른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스민다. 시를 쓰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둘레에서 좋다고 여기는 시를 옮겨적기 일쑤이다. 무슨 줄거리인지도 모르고 새롭다고 여기면서 요리조리 뜯어 읽으며 배운다고 한다. 말놀이가 아닌 말재주에 갇힌다. 삶이 없이 머리로만 엮는 셈이다.


어른들이 쓴 시집을 보면, 끝에 비평이 붙는다. 시를 배우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알아듣지 못하는 글을 온갖 이름난 사람들이 갖은 말을 붙이면서 좋게 좋게 풀이를 한다. 숲하고 먼 우리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나 어른이기에, 시에서도 숲이 사라지고, 억지로 만들어 낸 온갖 것이 시라는 이름으로 도마에 오른다. 글감만 놓고서 이리저리 칼질을 무섭게 한다.


끔찍하구나 싶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적는 시를 보면, 시가 피투성이처럼 보인다.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쓰는 글을 읽은 가슴은 어떻게 바뀔까. 삶이 없으니 사랑이 없는 채 피로 물들이는 시를 읽거나 쓰다가는 마음도 메마르거나 찢어지지 않을까.


요즘 나오는 젊은 사람이 쓴 시집을 마련해서 읽어 보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나, 말장난을 하는구나 싶은 시가 많다. 성욕이나 성애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시도 많다. 사람 얼굴이 다 다르듯, 시를 마주하는 마음도 다 다를 테지만, 시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가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시를 쓰려고 할까.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시에 쓰듯 말을 하려나? 아이들한테도 시에 쓰듯 말을 하려나?

 

남들이 쓰는 시를 따라하지 말자고, 나는 나답게 쓰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자꾸 다른 시집을 기웃기웃한다. 그렇지만 말놀이가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담도록 애쓰고 싶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스스럼없이 쓴다면, 꾸미고 자시고 할 새가 없으리라 본다.


202311.1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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