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내는 잣나무 아나스타시아 2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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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0 내 손으로 나를



《소리내는 잣나무》

블라지마르 메그레

한병석 옮김

한글샘

2007.10.20.



몸살을 앓았다. 비나리(제사) 떡을 먹은 뒤 갑자기 머리가 묵직하더니 추웠다. 끙끙 앓으며 스물한 시간을 꼬박 잤다. 다시 깨서 열 몇 시간을 또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이렇게 오래 잘 수 있나 싶었다.


그리 맑지 않은 몸인데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었다. 두어 쪽 읽다가 잠들고, 또 일어나 몇 쪽 읽다가 잠든다. 또 읽으려고 붙잡지만 멍하다.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으면 첫머리에 ‘사람이 아픈 까닭’을 짚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숲하고 등진 탓에 아프게 마련이고, 숲하고 등지면서 마음이 가라앉거나 얼룩지기에 자꾸 아파서 안 낫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마음에 사랑을 심으면, 약이나 병원이 없이도 바로 나을 수 있다고 들려준다.


우리는 늘 마음 때문에 아프다고 한다. ‘난 아파’ 하는 마음을 품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딱히 아픈 데가 없어도 건강검진을 받는다. 건강검진을 받을 적에는 설마 아픈 데가 있을까 싶어 걱정을 한다. 나이가 든대서 아파야 할 까닭이 없지만,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지레 걱정을 하고, 그 나이에는 꼭 어디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며칠을 돌아본다. 나는 왜 몸살이 났을까? 나는 마음에 어떤 걱정과 근심을 심었을까? 난 무엇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마음에 사랑을 제대로 심었던가? 사랑을 심지 않은 채 바쁘게 일하다가 그만 몸이 미끄러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생산한 생각은 무엇이든 어디론가 그냥 사라지지 않아. 밝은 생각은 밝은 공간을 채우고, 밝은 세력 편에 서게 되고 검은 것은 반대편에 서게 돼.”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긴다. 그래, 나는 내가 뱉고 생각한 것들은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했다. 스스로 뱉은 말은 스스로한테 언젠가 고스란히 돌아가겠지. 돌아갈 적에는 어두운 생각이건 밝은 생각이건 착 붙어서 이 생각대로 부채질로 키워 간다는 말을 되새길 테고. 


다 나은 다리한테 예전에 아팠던 사진을 보여주면 다시 아픔을 느낀다고 들었다. 참말 그렇다고 느낀다. 나부터 스스로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여기면 으레 안 되는 길로 갔다고 느낀다. ‘응, 잘 되리라 생각해.’ 하고 여기면 어느새 잘 되는 쪽으로 풀리더라.


우리 짝은 곧잘 아무 말이나 확 해버리곤 한다. 이럴 적마다 짝한테 말을 삼가자고 타이른다. 말이 씨앗이 되어 자란다고 얘기했다. 말은 우리가 시킨 대로 한다. 나쁜 말이다 싶거나 안 좋은 말이다 싶은 말은, 처음부터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 노릇이지 싶다. 걱정스럽거나 어두운 마음도, 아예 불러내지 말자고 타이른다.


가게 일이 잘 안 돌아갈 때나 몸이 아플 적에도 짜증이 슬그머니 나오는데, 이때마다 스스로 타이르려고 한다. 왜 굳이 이제까지 없던 짜증을 자꾸 불러내야 할까? 일이 잘 풀리거나 잘 되던 때를 돌아보건, 일이 안 풀리거나 안 되던 때를 더듬으면, 언제나 마음 하나가 다를 뿐이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냥 보거나 아무렇게나 말해서 안 되는구나 싶다.


책을 덮고서 생각한다. 난 무엇을 바랄까? 난 무엇을 이루고 싶을까? 난 여태까지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없는가? 나 스스로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꽤 크거나 많은데 정작 내 보람하고 열매는 바라보지 않으면서 더 멀리 있는 다른 보람이나 열매를 찾아나서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소리내는 잣나무》 219쪽을 보면, 글쓴이하고 아나스타시아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음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지.” “소리도 없이요? 누가 그걸 듣는다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듣는 법이지.” 곧이어 222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새벽의 장관은 감상해야 하는 것이지, 왜 그런지 따지고 캐기 시작하면 황홀한 감동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없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논리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80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나는 내 몸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내 몸을 토닥여 주었을까? 세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들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엄마아빠가 나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손은 의사도 간호사 손도 아니지만, 이 수수한 우리 손으로 서로 달래고 씻어 주었다.


도시에서 가지치기를 받는 나무는 슬퍼 보인다. 줄기나 가지가 뭉텅 잘린 나무는 아파 보인다. 우리는 거리나무한테 따스한 손길이 아니라 차가운 가위질을 해댄다. 이와 달리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아무도 가지치기를 안 하고, 비료나 거름을 안 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지치기로 짜리몽땅하게 괴로운 나무한테서가 아니라, 숲에서 스스럼없이 자라는 나무한테서 푸르고 아름다운 기운을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몸에 내 손을 살며시 대어 본다. 내 몸을 내 손으로 달랠 수 있을까? 내 몸이 아픈 까닭은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사랑을 일으켜서 스스로 달래 보도록 가르치거나 이끄는 셈이지 않을까?


병원에서 여러 가지 치료를 받을 적에 듣던 말을 떠올린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더라도 환자가 스스로 나으려고 마음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이들을 살살 쓰다듬던 손으로 내 몸을 살며시 쓰다듬고 토닥여 본다.


2023.11.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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