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유교수의 생활 2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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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2 내가 쓰고 싶은 글



《천재 유교수의 생활 2》

야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학산문화사

1996.12.25.



어제 글잔치(백일장)에서 심사를 처음 맡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나는 심사위원으로서 글을 읽고 뽑는다. 어르신들이 쓴 글은 짧고 투박했다. 거의 모든 분들이 “선생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만 적으셨다. 어르신들 마음을 담아내지 못 했다. 글을 이제 처음으로 배운 어르신들은 하고픈 말이 많을 텐데, 하나같이 “글을 배워서 좋다”는 말뿐이더라.


심사를 마치고 밥자리로 옮겼다. 함께 심사를 맡은 어떤 분이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신 일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술도 잔뜩 마셔야 좋은 글이 나온다면서, 바르게 살아서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이분 말씀을 한참 듣다가 “그렇게 집밖으로 돌지 않고도 반듯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대꾸했다. 그분 말마따나 글 좀 써 보겠다면서 흥청망청 마시며 어울리면 무엇을 배울까? 그렇게 배워서 쓰는 글이라면 집안은 뒷전이다. 내 대꾸에 그분은 그동안 집안에 마음을 못 썼다면서 끝말을 흐리더라. 그분이 어울렸다는 이름난 어떤 분 아이들은 ‘우리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덧붙인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2》을 읽었다. 유교수가 생일을 맞아 딸 넷이 아버지 옷을 사주기로 했단다. 아버지가 옷을 고르는 사이 딸들은 다른 곳에 눈길을 쏟는데,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옷 한 벌을 살피고, 조용히 옷값을 치른다. 네 딸은 저마다 돈을 모아서 아버지 옷을 사주려 했으나, 막상 네 딸마다 백화점에서 다른 것에 꽂히면서 ‘아버지한테 옷을 사주기로 한 돈’을 다 쓰고 말았다. 유교수는 딸들이 옷을 안 사주었어도 서운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없다. 오히려 네 딸을 보면서 너희가 사고픈 것을 알아서 샀다면 잘 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네 딸은 문득 ‘아빠는 우리랑 안 놀아 줘’ 하고 입술이 삐죽 나오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다 큰 딸들은 ‘우린 아무 곳도 가 본 적 없어. 우리 집안끼리 나들이를 한 적도 없고’ 같은 말을 했다. 유교수 짝꿍도 마음이 거북하다. 유교수가 책값에 쓴다고 하는 바람에 영화도 못 보고 살림돈도 모자라서 가난에 찌든 나날을 보냈다고 떠올린다.


유교수는 책벌레로 살았다. 아이들과 짝꿍이랑 함께할 나날을 놓쳤다. 그래도 네 딸이며 짝꿍은 비록 유교수가 책벌레였고 집일에 마음을 덜 썼다고 여겼어도, 반듯하게 살아가는 매무새에 걱정없이 살아오며 저마다 스스로 꿈꾸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유교수는 책벌레였되,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없고, 노닥거리는(도박) 짓도 안 했다. 네 딸이 품은 꿈을 가로막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북돋았고,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조차 없다. 겉모습을 따진 적이 없고, 언제나 ‘마음’만 살폈다.


유교수는 네 딸하고 짝꿍한테 살가이 굴지는 않았으나 누구한테나 고르게 마주했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길을 어질게 짚어 주며 함께 지냈다. 이런 아버지인 유교수를 느꼈기에 딸들도 손자도 유교수를 기둥으로 든든하게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아하지 않는 다른 일에는 마음을 덜 쓴다. 이런저런 일을 집 바깥에서 겪으면 글이 기름질 수 있다고도 할 테지만, 내가 보금자리에서 등을 돌리면 한집안하고는 돌이킬 수 없이 멀고 만다.


나는 빨리 나아가지 않더라도, 느리게 가더라도, 글을 놓지 않고 싶다. 유교수처럼 책벌레일 수는 없지만, 책을 꾸준히 사랑하면서, 우리 보금자리도 알뜰살뜰 사랑하는 마음을 잇고 싶다. 이러면서 이 삶을 글로 쓰고 싶다.


나는 감투나 이름을 얻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하루를 사랑하고, 우리 세 아이하고 짝꿍하고 어울리는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은 우리 아이요, 우리 짝꿍이며, 내 얼굴이다.


그런데 내가 쓰고 싶은 이런 글을 요새 누가 읽느냐는 핀잔을 듣는다. 그렇다. 요새는 다들 바쁘지 않은가. 작고 수수한 삶을 찾아볼 사람은 적을 듯하다.


곰곰이 생각한다. 어르신들이 쓴 글을 살피고 온 뒤로 더욱 내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나는 글을 쓰면서 짝한테서, 우리 아이들한테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가게에 들렀다. 오늘 하루도 땀흘려 일한 짝이 나를 보더니 말없이 꼭 안아 주었다.



2023.11.19.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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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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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1 한 그루 나무



《랩걸》

호프 자런

김희정 옮김

알마

2017.2.16.



지난해 여름에 어느 이웃이 《랩걸》이 좋으니 읽어 보라고 했다. 그분은 하루에 몇 쪽씩 아껴가면서 읽는다고 했다. 참 좋은 책인가 하고 여기다가 다른 이웃한테 《랩걸》을 사서 읽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이 훨씬 낫다고 하더라. 이분 얘기로는, 과학자는 나무를 과학으로 볼 뿐이라서, 나무 마음에 다가서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와 달리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은 나무를 오롯이 나무로 바라보고서 마음으로 다가서려고 하기에 ‘과학자 아닌 사람’이 쓴 책이 나무도 풀꽃도 제대로 풀어내어 들려준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사백 쪽을 웃도는 두꺼운 책에는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고 적혔다. 아무래도 나는 이 말에 낚인 듯하다. 나무도 사랑도 아닌, 나무를 앞세워 ‘여성 과학자’라는 이름을 풀어놓은 줄거리이다. 그래, 글쓴이는 나무를 본 적이 없구나. 실험실에서만 사느라, 나무를 기웃거린 적은 있고, 나무를 뜯은 적은 있어도, 나무가 나무로 살아가는 숲을 품으면서 살아간 적은 없구나.


내가 일하는 가게 모퉁이에 전봇대가 있다. 이 언저리 거님길 틈에 벚나무가 한 뼘 자란다. 전봇대와 건널목 사이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고, 요 사이에 조그맣게 싹부터 돋아서 자라나는 아기 벚나무라고 하겠다.


예전이라면 잡풀로 여겨서 뽑았을 텐데, 이제는 잡풀이 따로 없는 줄 느껴서 가만히 바라본다. 그냥 풀일 뿐이다. 작은 풀에 깃든 숨결을 새롭게 마주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조그마한 틈에서 싹을 내고 올라올까. 앞으로 전봇대랑 나란히 자랄 수 있을까. 제법 키가 오를 즈음에 안 뽑히고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봇대한테 거치적거린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들이 슥 뽑거나 베어버리지 않을까.


바닥에 얼굴이 닿을 듯 엎드려서 새싹한테 속삭인다. “기운내, 잘 버텨라.”


나무씨앗도 처음 싹이 틀 즈음에는 풀하고 똑같다. 모든 씨앗은 풀씨처럼 떡잎이 나온다. 작은 들풀이 어느새 나무로 바뀌고 숲으로 퍼지는 셈이다. 우뚝우뚝 서는 쉰 살이나 백 살에 이른 나무가 되기까지, 모든 나무는 그야말로 힘껏 버티거나 견뎌내는 나날이지 싶다. 천천히 잎을 내고, 천천히 줄기가 굵고, 천천히 가지가 뻗으면서 먼먼 앞날을 기다린다.


그끄저께에 영양 죽파리로 자작나무를 보러 갔다.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자작나무 한 그루마다 씨앗을 25만쯤 맺는다는 말을 들고 놀랐다. 씨앗은 그처럼 많아도 싹트는 아이는 몇 안 될 테지.


《랩걸》을 보면, 아카시아는 뿌리가 매우 깊게 내린다고 한다. 일터에 있다가 자주 찾아가는 숲에는 아카시아가 곳곳에서 휘청인다. 휘청이다가 쓰러진 나무를 보면, 뿌리가 얕고 짧다. 도시에서는 아카시아조차 뿌리를 제대로 뻗거나 내릴 틈이 없는 셈이리라.


우리가 이곳에서 사람만 살아가려 하지 않고 나무하고 함께 살아가려 한다면, 나무가 마음껏 뿌리를 뻗는 터전을 이루면서, 사람도 마음껏 발을 뻗고 쉬거나 놀며 어울릴 터전으로 바뀌지 않을까. 열매를 더 크고 빠르게 얻거나 더 손쉽게 따려고 함부로 가지를 휘어 놓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먹는 과일도 우리 몸에 제대로 이바지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가지치기가 아닌 가지살림으로 나무를 바라보아야 나무도 살고 사람도 살리라 본다. 나도 해마다 나무 한 그루씩 심고 싶다. 나무가 반길 만한 글을 써서 책으로 담고 싶다.



2023.10.29.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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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는 잣나무 아나스타시아 2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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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0 내 손으로 나를



《소리내는 잣나무》

블라지마르 메그레

한병석 옮김

한글샘

2007.10.20.



몸살을 앓았다. 비나리(제사) 떡을 먹은 뒤 갑자기 머리가 묵직하더니 추웠다. 끙끙 앓으며 스물한 시간을 꼬박 잤다. 다시 깨서 열 몇 시간을 또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이렇게 오래 잘 수 있나 싶었다.


그리 맑지 않은 몸인데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었다. 두어 쪽 읽다가 잠들고, 또 일어나 몇 쪽 읽다가 잠든다. 또 읽으려고 붙잡지만 멍하다. 《소리내는 잣나무》를 읽으면 첫머리에 ‘사람이 아픈 까닭’을 짚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숲하고 등진 탓에 아프게 마련이고, 숲하고 등지면서 마음이 가라앉거나 얼룩지기에 자꾸 아파서 안 낫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마음에 사랑을 심으면, 약이나 병원이 없이도 바로 나을 수 있다고 들려준다.


우리는 늘 마음 때문에 아프다고 한다. ‘난 아파’ 하는 마음을 품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딱히 아픈 데가 없어도 건강검진을 받는다. 건강검진을 받을 적에는 설마 아픈 데가 있을까 싶어 걱정을 한다. 나이가 든대서 아파야 할 까닭이 없지만,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지레 걱정을 하고, 그 나이에는 꼭 어디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며칠을 돌아본다. 나는 왜 몸살이 났을까? 나는 마음에 어떤 걱정과 근심을 심었을까? 난 무엇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마음에 사랑을 제대로 심었던가? 사랑을 심지 않은 채 바쁘게 일하다가 그만 몸이 미끄러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생산한 생각은 무엇이든 어디론가 그냥 사라지지 않아. 밝은 생각은 밝은 공간을 채우고, 밝은 세력 편에 서게 되고 검은 것은 반대편에 서게 돼.” 같은 대목을 가만히 되새긴다. 그래, 나는 내가 뱉고 생각한 것들은 어디로 가는지 늘 궁금했다. 스스로 뱉은 말은 스스로한테 언젠가 고스란히 돌아가겠지. 돌아갈 적에는 어두운 생각이건 밝은 생각이건 착 붙어서 이 생각대로 부채질로 키워 간다는 말을 되새길 테고. 


다 나은 다리한테 예전에 아팠던 사진을 보여주면 다시 아픔을 느낀다고 들었다. 참말 그렇다고 느낀다. 나부터 스스로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여기면 으레 안 되는 길로 갔다고 느낀다. ‘응, 잘 되리라 생각해.’ 하고 여기면 어느새 잘 되는 쪽으로 풀리더라.


우리 짝은 곧잘 아무 말이나 확 해버리곤 한다. 이럴 적마다 짝한테 말을 삼가자고 타이른다. 말이 씨앗이 되어 자란다고 얘기했다. 말은 우리가 시킨 대로 한다. 나쁜 말이다 싶거나 안 좋은 말이다 싶은 말은, 처음부터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 노릇이지 싶다. 걱정스럽거나 어두운 마음도, 아예 불러내지 말자고 타이른다.


가게 일이 잘 안 돌아갈 때나 몸이 아플 적에도 짜증이 슬그머니 나오는데, 이때마다 스스로 타이르려고 한다. 왜 굳이 이제까지 없던 짜증을 자꾸 불러내야 할까? 일이 잘 풀리거나 잘 되던 때를 돌아보건, 일이 안 풀리거나 안 되던 때를 더듬으면, 언제나 마음 하나가 다를 뿐이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냥 보거나 아무렇게나 말해서 안 되는구나 싶다.


책을 덮고서 생각한다. 난 무엇을 바랄까? 난 무엇을 이루고 싶을까? 난 여태까지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없는가? 나 스스로 이룬 보람이나 열매가 꽤 크거나 많은데 정작 내 보람하고 열매는 바라보지 않으면서 더 멀리 있는 다른 보람이나 열매를 찾아나서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소리내는 잣나무》 219쪽을 보면, 글쓴이하고 아나스타시아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음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지.” “소리도 없이요? 누가 그걸 듣는다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듣는 법이지.” 곧이어 222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새벽의 장관은 감상해야 하는 것이지, 왜 그런지 따지고 캐기 시작하면 황홀한 감동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없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논리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80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나는 내 몸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내 몸을 토닥여 주었을까? 세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들이 아플 적에 내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엄마아빠가 나를 토닥여 주었다. 우리 손은 의사도 간호사 손도 아니지만, 이 수수한 우리 손으로 서로 달래고 씻어 주었다.


도시에서 가지치기를 받는 나무는 슬퍼 보인다. 줄기나 가지가 뭉텅 잘린 나무는 아파 보인다. 우리는 거리나무한테 따스한 손길이 아니라 차가운 가위질을 해댄다. 이와 달리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아무도 가지치기를 안 하고, 비료나 거름을 안 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지치기로 짜리몽땅하게 괴로운 나무한테서가 아니라, 숲에서 스스럼없이 자라는 나무한테서 푸르고 아름다운 기운을 받아들인다.


몸살이 난 몸에 내 손을 살며시 대어 본다. 내 몸을 내 손으로 달랠 수 있을까? 내 몸이 아픈 까닭은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사랑을 일으켜서 스스로 달래 보도록 가르치거나 이끄는 셈이지 않을까?


병원에서 여러 가지 치료를 받을 적에 듣던 말을 떠올린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더라도 환자가 스스로 나으려고 마음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이들을 살살 쓰다듬던 손으로 내 몸을 살며시 쓰다듬고 토닥여 본다.


2023.11.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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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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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9 눈으로 마음으로



《예찬》

미셀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북스

2000.10.20.



세 해 앞서 《예찬》을 처음 읽었고, 오늘 이 책을 새로 읽었다. 세 해 앞서 이 책을 읽고서 ‘좋다’고 남겼는데, 오늘 다시 읽고는 ‘+’를 보탠다.


《예찬》은 “눈이 왕이다. 눈이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들려준다. 틀림없이 눈으로 많이 보고, 눈으로 느껴서 알아가는 일이 많다. 책도 거의 눈으로 보면서 읽어낸다고 여길 수 있다.


어린 날을 돌아보면, 배가 고프던 일보다 뛰놀던 일이 떠오른다. 넉넉히 먹으면서 자라지 않았지만, 우리 엄마아빠 품에 있는 동안에는 하루하루 아름답게 누렸다고 느낀다.


네발로 기던 아기는 어느새 일어나서 걸음마를 뗀다. 걸음마를 뗀 아기는 비틀비틀 걷다가 신나게 달리면서 논다. 이윽고 껑충 자랐고, 짝을 만나 어른으로 크면서,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른다. 첫째 둘째 셋째를 낳는 동안에 나한테는 아이들만 보였다. 세 아이와 함께한 나날은 아이들을 거쳐서 말없이 무언가 보여준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나를 보며 어머니를 다시 보았고, 어머니를 다시 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나를 새롭게 본다.


나는 바다처럼 볼 수 있을까. 마음으로 차곡차곡 스미는 길을 볼 수 있을까.


《예찬》은 때(시간)보다는 곳(공간)을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마음(안)보다는 밖(사회)을 더 바라보았다. 일거리를 찾고 살피고 이어왔다. 


땅, 나무, 짐승, 모두 살아가는 숲을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땅은 땅대로 자국을 남긴다. 나무는 나이테처럼 모든 일을 새긴다. 사람하고 이웃인 짐승은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모두 어우러지는 숲은 숱한 이야기를 베푼다.


풀과 나무한테는 사람 같은 눈은 없지만, 풀대로 나무대로 둘레를 본다. 잎눈하고 꽃눈은 풀과 나무가 둘레를 보는 눈이지 않을까. 잎하고 꽃으로 온누리를 보다가 씨앗을 남겨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지 싶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는 엄마한테서 젖을 받는다. 사람 곁에서 살아가는 소하고 염소는 어미소와 어미염소가 젖을 나누어 준다. 가만히 보면, 나무도 암꽃하고 수꽃이 있는데, 암꽃이 꽃가루를 받아서 열매를 맺어서 나누어 준다.


소도 말도 풀을 뜯는다. 풀잎을 골고루 누린다. 우리도 예전에는 온갖 풀을 다 다른 나물로 삼아서 고루 누렸다. 달거나 짜거나 시다는 맛 때문이 아닌, 푸르게 우거진 숨결을 그대로 보고 누렸다.


《예찬》을 읽다 보면 “숲도 사람처럼 지옥 같은 삶을 산다”고 적는데, “집단 수용소 같은 고통에서 자라는 풀꽃나무가 내뿜는 숨을 우리가 마시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적는데, 푸른숲에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할까? 아니지 않을까? 왜 풀밭과 나무숲을 갇힌곳(집단 수용소)으로 바라볼까?


작은 들풀은 서로 뿌리를 붙잡고서 돌개바람을 견딘다. 나무뿌리도 풀뿌리를 붙잡고, 풀뿌리도 나무뿌리를 붙잡으면서 회오리바람을 버틴다. 풀이 못 자라고 나무도 없는 모래밭(사막)이야말로 갇힌곳이지 않을까? 풀과 나무를 밀어낸 도시가 바로 갇힌곳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미셀 투르니에 님은 ‘눈’이 ‘마음’보다 대수롭다고 적었지. 겉으로만 보았기에 숲을 나쁘게 느꼈을 수 있다. 눈으로 볼 적에도 더 깊이 보려 했다면, 그리고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품으려 했다면, 숲에 흐르는 포근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한다.


2023.10.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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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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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8 마음을 알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8.20.



얼마 앞서 수필협회에서 여는 배움마당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니체를 이야기했다. 강사는 ‘세 변화에 대하여’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두 꼭지를 읽어 보라고 하더라. 집에 와서 살피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2010년 4월에 장만해 두었더라.


‘세 가지 변화’를 읽어 본다. 마음(정신)이 삶이라는 사막에서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이가 되는가를 짧게 들려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돌아본다.


눈에 보이지 않기로는, 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말은 입으로 하고 귀로 들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 텐데, 곰곰이 생각하면 말도 눈으로 본다. 눈속임이나 거짓말은 말이어도 눈에 보인다. 사랑이나 참말도 눈에 환하게 보인다.


눈으로 보거나 안 보기에 대수롭지는 않다. 눈앞에서 얌전하거나 착한 듯이 굴기에 얌전하거나 착할 수 없다. 우리 눈앞에서 안 얌전하거나 안 착하다면, 우리가 이런 모습을 못 보았더라도 안 얌전하거나 안 착한 몸짓이 없을까.


우리가 쓰고 읽는 글은 어떠한가. 글로 담은 줄거리가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게 보인다고 해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를까? 글로는, 또 말로는, 한껏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게 꾸밀 적에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나? 이렇게 책이 나왔으니 이 책에 적힌 대로 믿어야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헤아리려면, 마음을 키워야 하고, 마음을 키우면 글눈도 자랄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고 느끼면서도, 쉬운 말은 아니라고도 느낀다.


사람들이 ‘니체! 니체!’를 들먹어도 니체를 몰랐다. 니체가 쓴 책을 읽어 보았지만, 더구나 꽤 예전부터 장만해 놓았지만, 나는 니체를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잘 모르리라 본다. 그러면, 나는 나를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니체는 니체라지만, 내가 바라보는 하루와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읽는 삶을 얼마나 나답게 안다고 여길 수 있을까?


니체는 불같은 사람일까. 마음이 뜨거울까. 사랑을 바라다가 이루지 못 해서 그렇게 바뀌었을까. 니체가 바라는 대로 이루었다면 이 책이 나왔을까.


2023.10.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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