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유교수의 생활 2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52 내가 쓰고 싶은 글



《천재 유교수의 생활 2》

야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학산문화사

1996.12.25.



어제 글잔치(백일장)에서 심사를 처음 맡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나는 심사위원으로서 글을 읽고 뽑는다. 어르신들이 쓴 글은 짧고 투박했다. 거의 모든 분들이 “선생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만 적으셨다. 어르신들 마음을 담아내지 못 했다. 글을 이제 처음으로 배운 어르신들은 하고픈 말이 많을 텐데, 하나같이 “글을 배워서 좋다”는 말뿐이더라.


심사를 마치고 밥자리로 옮겼다. 함께 심사를 맡은 어떤 분이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신 일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이름난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술도 잔뜩 마셔야 좋은 글이 나온다면서, 바르게 살아서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이분 말씀을 한참 듣다가 “그렇게 집밖으로 돌지 않고도 반듯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대꾸했다. 그분 말마따나 글 좀 써 보겠다면서 흥청망청 마시며 어울리면 무엇을 배울까? 그렇게 배워서 쓰는 글이라면 집안은 뒷전이다. 내 대꾸에 그분은 그동안 집안에 마음을 못 썼다면서 끝말을 흐리더라. 그분이 어울렸다는 이름난 어떤 분 아이들은 ‘우리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덧붙인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2》을 읽었다. 유교수가 생일을 맞아 딸 넷이 아버지 옷을 사주기로 했단다. 아버지가 옷을 고르는 사이 딸들은 다른 곳에 눈길을 쏟는데,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옷 한 벌을 살피고, 조용히 옷값을 치른다. 네 딸은 저마다 돈을 모아서 아버지 옷을 사주려 했으나, 막상 네 딸마다 백화점에서 다른 것에 꽂히면서 ‘아버지한테 옷을 사주기로 한 돈’을 다 쓰고 말았다. 유교수는 딸들이 옷을 안 사주었어도 서운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없다. 오히려 네 딸을 보면서 너희가 사고픈 것을 알아서 샀다면 잘 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네 딸은 문득 ‘아빠는 우리랑 안 놀아 줘’ 하고 입술이 삐죽 나오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다 큰 딸들은 ‘우린 아무 곳도 가 본 적 없어. 우리 집안끼리 나들이를 한 적도 없고’ 같은 말을 했다. 유교수 짝꿍도 마음이 거북하다. 유교수가 책값에 쓴다고 하는 바람에 영화도 못 보고 살림돈도 모자라서 가난에 찌든 나날을 보냈다고 떠올린다.


유교수는 책벌레로 살았다. 아이들과 짝꿍이랑 함께할 나날을 놓쳤다. 그래도 네 딸이며 짝꿍은 비록 유교수가 책벌레였고 집일에 마음을 덜 썼다고 여겼어도, 반듯하게 살아가는 매무새에 걱정없이 살아오며 저마다 스스로 꿈꾸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유교수는 책벌레였되,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없고, 노닥거리는(도박) 짓도 안 했다. 네 딸이 품은 꿈을 가로막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북돋았고,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조차 없다. 겉모습을 따진 적이 없고, 언제나 ‘마음’만 살폈다.


유교수는 네 딸하고 짝꿍한테 살가이 굴지는 않았으나 누구한테나 고르게 마주했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길을 어질게 짚어 주며 함께 지냈다. 이런 아버지인 유교수를 느꼈기에 딸들도 손자도 유교수를 기둥으로 든든하게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아하지 않는 다른 일에는 마음을 덜 쓴다. 이런저런 일을 집 바깥에서 겪으면 글이 기름질 수 있다고도 할 테지만, 내가 보금자리에서 등을 돌리면 한집안하고는 돌이킬 수 없이 멀고 만다.


나는 빨리 나아가지 않더라도, 느리게 가더라도, 글을 놓지 않고 싶다. 유교수처럼 책벌레일 수는 없지만, 책을 꾸준히 사랑하면서, 우리 보금자리도 알뜰살뜰 사랑하는 마음을 잇고 싶다. 이러면서 이 삶을 글로 쓰고 싶다.


나는 감투나 이름을 얻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하루를 사랑하고, 우리 세 아이하고 짝꿍하고 어울리는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은 우리 아이요, 우리 짝꿍이며, 내 얼굴이다.


그런데 내가 쓰고 싶은 이런 글을 요새 누가 읽느냐는 핀잔을 듣는다. 그렇다. 요새는 다들 바쁘지 않은가. 작고 수수한 삶을 찾아볼 사람은 적을 듯하다.


곰곰이 생각한다. 어르신들이 쓴 글을 살피고 온 뒤로 더욱 내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나는 글을 쓰면서 짝한테서, 우리 아이들한테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가게에 들렀다. 오늘 하루도 땀흘려 일한 짝이 나를 보더니 말없이 꼭 안아 주었다.



2023.11.19.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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