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EBS야! - EBS 수능 외국어영역 교재의 치명적 오류들
정재영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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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지인이 쓴 책이다. 베네수엘라에 있을때 파일로 최종편집본을 받았다. 읽어보고 괜찮으면 리뷰를 써달라는데. 솔직한 말로 별로 쓸 생각이 없었다. 다른 좋은 책들 리뷰도 이래저래 못쓰고 있는데 '학습서'류의 리뷰까지 써야하나? 이런 마음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심심풀이로 읽어보다가..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은 영어책이 아니다. 교양서이자 논리적 사고를 키워주며 사회비판력까지 쑥쑥 키워주는 '불온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대상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다. 수능이 코앞인 학생들은 책 뒤에 실린 권말부록(지문 오류목록,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어휘목록, 막판 영어 공부법)정도가 막판 마무리에 도움이 될 터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사교육 문제의 핵심은 서열화된 대학과 그 통과의례로서의 수능시험이다. 한 문제로 대학(과,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길)이 갈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시험점수와 등급에 쩔쩔매는 수험생들을 어여삐 여긴 높으신 분들이 EBS와의 연계 강화라는 해결책을 내 주셨지만 지난 몇 년간 그 '연계'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오호라 그래서 내 놓은 야심작은 70%연계와, 고난이도 문제역시 EBS에서 출제하겠다는 강한 의지! 그래서 지난 6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오답률이 높았던 리딩 지문 5개는 모두 EBS출신들이었고 듣기에서도 14개 문항이 EBS교재와 완전히 동일하게 출제되었다. 이 정도면 '확실한 연계'라 할만하다. 

 아니, EBS연계가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묻고싶다. 수능 외국어영역 대비는 '영어 학습'과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위한 것이지 'EBS 지문과 친해지기'가 아니다. 실제 6월 학평의 경우 평소 영어를 잘 하지만 EBS교재로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과, 전자보다는 영어실력이 떨어지지만 EBS교재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간에 희비가 엇갈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교사와 강사들은 중위권 학생들에게 "교재 뒷부분의 우리말 해석과 해설을 열심히 읽고 시험장에 가라"라고 조언하기도 한댄다. 듣기의 경우 'FM 고교영어듣기'에서 다수의 문제를 동일하게 출제해버리고 난이도도 낮아지니 듣기 만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EBS교재만 몇 번 들으면 수능 영어 듣기 준비는 거진 되는 셈이다.  

EBS교재를 금과옥조로 여겨야 하는 현 상황에서 다른 중소 출판사들의 영어교재는 수험생들의 관심 밖이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신봉하는 현 정부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억압해서 결과적으로 '경쟁을 통한 발전'을 막고 있는 것이다. EBS교재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당신. EBS는 무려 60만 수험생들에게 '강매'되는 책이다.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저렴한 책'일지 몰라도 결국 60만 수험생들에게 "삥"을 뜯어서 특정 기업에 몰아주는 것이다.

중소출판기업들의 도산이나 EBS독점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문제는, EBS 70% 연계로 과연 사교육시장이 줄어들었냐 하는 것이고, EBS교재 위주로 공부하는 것이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이 책의 주장은 두 질문 모두 "아니오"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EBS 독해교재들은 교재의 완성도라는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수준이 낮고, 독해 지문이 어렵다는 면에서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올해 출간된) EBS교재의 '우려할 만한 4가지 특징'을 보자 

 

1. 지문이 상대적으로 매우 길다.  

2. 어휘 수준이 상당히 높다. 

3. 전문성이 높은글이 많다. 

4.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지거나 근거없이 일방적 주장을 펼치는 수준 이하의 지문 역시 많다.

 

 상대적으로 긴 지문과 어려운 어휘는 영어공부를 힘들게 하고, 전문성이 높은 글이나 수준 이하의 지문들은 우리말 해설과 해석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든 난감한 상황을 만든다. 이런 지문들이 많은 교재에서 70% '연계'된다면 EBS교재는 '달달 외워야'하는 '교과서'가 되고 수능영어공부는 '학교 내신'처럼 '외워서 푸는 시험'이 되어버린다. 학교 '교과서'는 오랜 제작기간과 이중 삼중의 검토, 검정을 통해 만들어 지지만 EBS교재는 매년 '전면 교체'되어야 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동안 시간에 쫓기며 만들어진다. 공동 저자, 감수 등으로 올려진 이름은 수두룩하지만 과연 제대로 검토되었는지 의문스러운 '실수'들이 너무 많다. 단순한 오/탈자의 문제가 아니라 need to를 want to로 해석한다든지,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하기엔 지나치게 전문적인 지문을 선정한다든지 등등 교재 제작에 있어 '기본적인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책에서 70%를 내겠다고? 

수능, 은 이미 치뤄낸 사람이나 대학에 진학할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겠지만.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모든 에너지를 입시에 쏟는 수험생들이나 학부모들에게는 절실한 문제다. 그리고 '수능'이전에 행해지는 교육들은 '수능'을 잘 치뤄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아직 사고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적절한 논리력과 사고력을 길러주기 위함도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 EBS교재는 이런 지문들로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다. 

   
 

 공정함에 대한 요구는 당신의 대인 관계에 스며들어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수능완성 유형편 p24)  

 급진적 이슬람 테러조직들이 빈곤으로 고통 받는 국가들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절망감을 자극하여 결국 미국의 파멸을 추구하는 폭력 집단에 대해 호의를 보이게 할 수 있는 에이즈 전염병을 인지하고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한다....(중략)...이 끔찍한 질병의 추가적 확산을 막는 것을 도움으로써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아프리카에 안전하게 은신할 곳이 전혀 없음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수능특강 p.18)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 "님, 차라리 그냥 조선일보 사설을 교과서로 삼지 그러세요?" 

 

스피노자의 사상을 인용한 지문, 에이젠슈타인의 작품에 관한 지문, "영화 기법에 대해 아는 것이 영화 감상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라는 요지의 예시로 히치콕의 작품을 드는 지문, '변연계', '뇌간'등의 전문적인 단어를 주석없이(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쉬운 단어인 '대뇌 피질cerebral cortex'은 친절히 주석을!)포함한 글로 두뇌구조를 알아보자는 지문 등등. 우리말 해석을 봐도 갸웃갸웃한 지문들로 영어공부를 하자는 건 어떤 논리일까?  도저히 수능 수준이라고 볼 수 없는 단어들을 "수능 필수 단어"코너에 버젓이 실려 놓는 분은. 혹시 자신의 어휘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 설마 어려운 글과 어려운 단어로 영어공부를 하면 학생들의 영어실력과 교양이 쑥쑥 동반성장 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아니겠지! 

책 안에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다. <수능특강>의 단어 중 과도하게 어려워 보이는 수능 비기출 어휘 목록으로 서울대 인문대 어문계열, 서울대 의예과, 경희대 한의학과 학생들에게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설문조사를 한 것. 결과는?  정답률 17.5%. 50%를 넘긴 학생은 불과 네 명. 이 학생들은 아마도 수능 외국어 영역 1등급 상위권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런 학생들조차 거의 알지 못하는 단어들로 수능 대비 교재를 만들어 공부를 하랜다. 현 정권이 신봉하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 하에서는 자연 도태되고도 남을 교재다. 그런데 학생들은 어쩔수 없이 구매를 해야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단어를 외운다. 대충 만들어도, 문제가 엉망이어도 60만 수험생의 '필수 교재'니까. 참 편한 책장사다. 

 이 책을 읽고 감동했던 것은, "EBS교재들이 엉망이다"라는 폭로 자체 보다는. 어떤 부분이 왜 부적절한지 성실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것. 범주의 혼동으로 인한 오류, 이랬다 저랬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는 지문들, '유사성과 대조', '반복과 귀납'의 차이를 무시한 연결사 문제 등등. 올해 시험을 봐야하는 학생들은 이 책 까지 볼 시간적/심리적 여력이 없겠지만 내년, 내후년에 수능을 볼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다. 책 뒤에는 '엉터리 교재로 스마트하게 공부하는 법'이란 타이틀로 <수능특강>,<수능완성>의 오류목록 + 절대로 수능에 나올 수 없는 단어 목록 + 비기출 어휘 중 중요한 단어와 그렇지 않은 단어들의 구분 표가 실려있다. 올해 수험생들에게 이 권말부록만 복사해서 나눠줬으면 좋겠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EBS연계가 아이들이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영어를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일단 사교육비는 개인간의 현금거래가 많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접근하기 곤란한 지점들이 있다. 2011년 2월 정부는 2010년 사교육비가 줄었다고 발표했지만,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의 전체 인구수가 줄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총액 감소는 별로 의미가 없다. (EBS교재 구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사교육비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단다.) 사교육비가 줄었다는 정부의 발표가 뻔뻔하다는 자유선진당의 논평이 책에 인용되어 있다.(p.197) 그렇다면 'EBS교재에서 70% 연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문제를 푸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문의 출처 보다는 체감 난이도가 더 중요하다. '교과서 연계율 100%'인 학교 내 시험은 사교육을 유발하지 않을까?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EBS교재 지문들은 지나치게 어렵거나 논리가 뒤죽박죽이거나 여타의 이유로 우리말 해설과 해석을 봐도 혼자 공부하기 어려운 교재다. 독해만 해도 총 지문이 1000개가 넘는데, 학교에서 교과서를 무시하고 EBS교재 강의를 한다고 해도 소화하기 벅찬 분량이다. 학원가에선 "EBS 총정리 단기 특강" 등 EBS교재를 대상으로 한 강의들을 열고 학생들은 EBS교재를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강사를 원한다. 이 정도면 "사교육의 좋은 친구 EBS"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말미에는 '언어 영역' 비문학 문제 형식으로 한국 사회 교육문제에 관한 두개의 지문이 있고, 적절하지 않은 추론을 골라내는 세 문제가 있다. 세 문제의 정답은 모두 현재 '사교육 감소'의 명목으로 정부에서 실시하는 대책들이다.  

"프랑스의 대학 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를 프랑스 국영교육방송 교재와 연계 출제하면 프랑스의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에서 각 과목 만점자가 1% 나올 수 있도록 출제하면 사교육은 줄어든다" 

"학원 수업 시간을 통제하고 입시제도를 바꾸고 영어 공교육에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하면 사교육비 문제가 해결되겠군" 

 

저자랑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마침 EBS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 민주당 의원이 이 책을 들고 EBS측을 공격했는데, 그에 대한 기사는 그 의원의 지역구인 '제주투데이'와 극소수 인터넷 신문에만 올라왔더랜다. 오호 이게 말로만 듣던 '차단'이구나. '서평'에 대한 의무감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던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십 수년간 사교육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 '사교육 감소'의 신성한 의무를 띠고 강림하신 EBS교재에 대해 이런 책을 쓴다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긴 한국사회는 워낙 다이나믹 기상천외한 일들이 난무하는 사회니까.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서평의 90%이상은 책의 내용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평'이라기 보다는 '발제문'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름 '수준있는' 알라딘 서재에 올리는 것은. 조금이라도 이 책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EBS교재가 사실 이렇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런식으로 반복되어야 하는 걸까요?"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바꿔나갔으면 좋겠다. 교육문제는 수험생과 부모, 교육계 종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중의 하나라고 인식하는 당신,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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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7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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