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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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지 한달 정도 지났지만, 그동안 '또 비슷한 얘기겠거니'하고 눈여겨 보지 않던 책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책은ㅡ 읽는 중에도 소름끼치지만, 읽고난 후의 잔여감도 개운치 않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펼치는 것이 약간은 두려웠었다.   

내가 '삼성'이란 기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ㅡ 일은 엄청 시키지만 대신 돈은 많이 벌 수 있다는, 세간에 흔한 통념 수준이었다. 애니콜 휴대폰, 삼성 노트북 등이 타 회사에 비해 품질이 좋다는 것. 간혹 외국 영화에 삼성 휴대폰이 나오면, 열광하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성 휴대폰 기술이 좋긴 좋은가 보네" 하며 내심 반가워하는 것 정도.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온갖 비리들이 알려졌을때에도 "한국 재벌들이 다 그렇지 뭐.."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쉽게 바뀌겠어"하는 체념이 먼저 들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과 뒤이은 삼성 특검은, 그런 체념을 더욱 확신시켜 줄 뿐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비리와 비상식적인 내부사정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만드는 수법이나, 다방면의 고위 인사들을 관리하며ㅡ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삼성왕국'을 만들어 가는 과정들은, 나같은 일반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머나먼 딴 세계의 이야기들이다. 이미 '상상력'의 수준마저 넘어서는 일들에 대해 더이상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5만명이 모인다는 종합운동장에 사람을 가득 모아놓고 1명당 1억원씩 나누어줘도 5조원인데. 김용철 변호사가 추정한 삼성 비자금의 규모는 10조원쯤 된댄다. 1억원이란 돈도 나에겐 현실적인 돈이 아니라 어떤 '이념적'인 금액에 가까운데, 그 금액의 10만배다. 머릿속에선 계산이 되지만 도무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액수다. 인맥 관리비로 몇천만원, 혹은 몇억원씩 쓰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데. 평범한 사람들에게 '억'단위는 집을 장만하거나 노후 자금을 설계할 때 등 긴 인생계획에서나 등장하는 용어다. 물론 사업하는 사람들에겐 억 단위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천문학적인 액수 자체가 아니라, 과연 무엇을 위해 그 돈들이 모이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느냐다.

태어날때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자기 노력으로 많은 돈은 번 사람에게, 돈이 왜 그렇게 많냐, 혹은 왜 그렇게 펑펑 쓰냐고 딴지거는 것은ㅡ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로 통용될만한 어법은 아니다. 이건희 일가나 삼성 임직원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펑펑 쓰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푼돈에 벌벌떠는 '평민'들이 배아프고 부러울 순 있어도, 그건 어떤 '도의적인 차원'에서 '자제할 것'를 요청하거나, 돈의 '쓰임새'가 적정한 지 따질 수 있을 뿐이지 '돈 펑펑쓰는 죄'를 물을수는 없는 일이다. 단, 그 돈들이 진실로 자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증거가 있을 때 말이다. 그런데 그 돈들이 정상적으로 지급되었어야 할 돈을 빼돌려서 만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돈이라면? 그리고ㅡ그들이 만든, 그 소수를 위한 시나리오에 의해 수천만명의 삶의 터전이 좌지우지 된다면?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살린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도 망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은ㅡ 삼성에게 뇌물 받고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거나 비리를 눈감아주는 일부 집단들을 일컫는 말이었나 보다. 삼성이 대한민국 경제에 어느정도 기여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삼성계열사에 고용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런 절묘한 논리가 나올만도 하다. 그렇다면 삼성이 저지른 수많은 비리와 비자금 조성이 그 수많은 '삼성인'들을 더 잘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다방면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공통된 논리는 "삼성은 이건희 일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 자꾸 불법/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삼성의 내부모습은 마치 '이건희 일가'라는 왕족을 지키기 위한 궁정 호위대들의 화려한 무용담 같다. 한번씩 사건이 터질때마다 수뇌부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꿎은 계열사 사장을 구속시키고, 나중에 좋은 자리와 연봉으로 보상해주는 과정들이 주먹세계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책을 읽으면서 엉뚱한 물음들이 자꾸 떠오른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이 책에서 보여주는 삼성 '핵심임원'들은 철저히 이건희일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왜 그들은 '자발적 복종'을 선택했을까? 보상으로 받는 천문학적인 돈 때문이라도 하기에도 왠지 석연치 않다. 아니할 말로 이미 벌만큼 벌었을만한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다른사람 뒤를 수습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걸까. 그저 그런 삶에 익숙해진 탓일까, 혹은ㅡ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ㅡ 그런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다면, 김용철 변호사를 그토록 괴롭게 만들고ㅡ 스스로 '양심고백'을 택하게 했던 것은, 인간의 무엇 이었을까?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은 '내부'의 일원이었지만 늘 겉돌았다고 했다. '내부'사람들에게 있어 '삼성(정확히는 회장님 일가)'이란 가치는ㅡ의심할수도 없고, 의심해서도 안되는 절대 진리였을까?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도 예전엔 그들의 일원이었고ㅡ 잘먹고 잘 살았으며, 자신은 전사도 무엇도 아닌 그저 '양심고백'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를 정의의 수호자니 거대 재벌의 희생양이니 하며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용기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안타깝고, 생각할 수 있으나 생각하길 멈춰버린 사람은ㅡ 개인적으로는 더욱 안타깝고, 사회적으로는 뻔뻔하다. 김용철 변호사는 생각하길 멈추지 않았고ㅡ 그 대가로 실질적인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믿는 '정의'를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했던 집단의 치부를 고발했지만ㅡ 그 댓가는 혹독했다. 오십년의 인간관계가 무너졌고, '反삼성'이라는 연좌죄는 자식들의 앞날까지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진실한 벗을 얻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는 하지만ㅡ 한 개인을 매장해버리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삼성권력'의 무시무시함은 보는 이들을 소름돋게 한다. 출간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출간 이후의 이런저런 우여곡절들. 책 출간후 '저자와의 만남'에서 김 변호사는 "30대 이하는 이 책을 안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실은 때로, 아니 너무도 자주. 인간이 믿고싶어하는 환상을 산산히 깨부순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진실을 아는것 조차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

애초에 3만부 정도 팔릴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삼성권력의 나라에서 언론에는 노출되지 못했지만 출간 10일만에 3만부가 팔렸다. 좀더 희망을 키웠다. 이 책이 100만부쯤 팔린다면ㅡ 그땐 뭐가 바뀌어도 바뀔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ㅡ 주변사람들에게 이 책 만큼은 '사서'보라고 권하는 것 뿐이다. 책 출간을 둘러싼 우여곡절만 봐도 이런책은 사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이 책이 어떤 변화의 시발점이 될지, 그저 흘러간 야사의 한장면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어쨌든 상당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짐을 남길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ㅡ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면. 그런 불편함은 '의무이자 권리'라고 믿고싶다.

 

워낙 범인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쓴 책이다 보니 곳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은 '평민'과는 다른 특권층이라는 의식이 아주 강하고ㅡ 삼성 내부의 인식도 그렇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통념에 비춰봐도ㅡ 그런 재벌집에서 태어나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특권의식'을 갖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환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가? 바로 천문학적인 돈이다. 그런데, 현 사회에선 자신의 권력이 '돈'에 기반한다는 사실이ㅡ 다시말해 '돈'이 권력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이 ㅡ 마치 절대 권력을 지닌 '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나보다. 곳곳에 등장하는 이건희 회장님의 다양한 사업시도(!)들은 철저한 시장실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일반인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홍라희 여사님의 안목은 애꿏은 사업부장에게 '시장실패'라는 멍에만 안겨주지만, 나름대로는 평민들에게 베푸는 '거장의 친절함'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의 출처가ㅡ 수많은 삼성 노동자들과, 더 넓게는 국민을 위해서 쓰여야 할 돈을 빼돌린 것이라는 사실은, '없는'사람들의 시기/질투거나 중상모략, 혹은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오만불손한' 망언이라고 여겨지는건지. "온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라는 훈계를 내려주시니. 거 참 그들 '특별한 존재'들의 세계에서는, 같은 단어도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건지도.   


명실상부한 후계자이자, 온갖 비리의 핵심에 자리한 이재용씨는 "비자금 다른데도 다 있는데 왜 유독 삼성만 갖고 난리냐"고 푸념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논리로 봐도 이 말에는ㅡ 삼성과 다른 기업을 동급으로 보는 치명적인 오류(!)가 담겨있지 않은가.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인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살린다'는 말을 그대로 적용시킨대도 이미 '삼성'이란 기업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다. 삼성의 온갖 비리들은 단지 '불법'이기 때문에 문제되는 차원을 떠나ㅡ 수만, 수십만의 생계를 책임진 거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ㅡ  권력만 알고 그에 걸맞는 책임과 품위를 모르는 천박한 기업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까? 
 

김 변호사가 양심 고백을 준비하기 전, 사회 원로 한분은 "쓸쓸한 거리에서 황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말했다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은 댓가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린치'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지만, 책이 생각보다 많이 팔리자 그런 걱정은 접었다는, 농담같은 진담이 아무렇지 않게 말해지는 사회다. 양심 고백후 오히려 이건희 일가의 성벽을 더욱 튼튼히 쌓아준 2년이었지만, 좌절이야말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다. 2년여간을 지는 싸움을 하고도 다시 이 책을 내어놓은 김 변호사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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