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늘 기적을 꿈꾸며 산다. 내일 아침 눈 뜨면 세상이 바뀌어 있는 기적,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던 그이가 맘 고쳐먹고 내게 '귀환'하는 기적, 우연히 산 로또가 대박나는 기적...기적의 사전적 정의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또는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기적'을 몰아내고 타자화한다. 내겐 닿을 수 없는 무엇. 남루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할 무엇. 

  얼마 전 출간된 로쟈님의 책에서, 타르코프스키 영화 <희생>에 대한 짤막한 리뷰 부분 - "기적 없는 기적" 이란 소제목의 글을 읽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신께 '기적'이 일어나길 빌고, 다음날 아침 기적에 대한 답례로 자신의 모든것을 바친다. 알렉산더가 확인한 기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기적'이었다. '(3차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지는 것이, 그가 모든것을 걸고 소망했던 '기적'이었던 것이다. 로쟈님은 덧붙인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故 장영희 선생님의 '기적'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선생님은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낸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해서 '살아온 날의 기적'이라 적었다. 곧바로 "다시 그런 기적같은 삶을 살기가 싫다. 기적이 아닌, 정말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없는, 절대 기적일 수 없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라고 너스레를 떠시지만 말이다. 선생님의 병이 감쪽같이 낫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마지막 하루하루 역시 기적이었을거라고 믿는다. 아직 완성형이 아니어서 장선생님을 기억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옮겨질 가능성이 충만한 기적. 

  우리는 늘 평범함/다수/주류를 근거로 끊임없이 타자화를 시도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작년 어느날 <내 생애 단한번>에서 처음 장선생님 글을 접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못쓰지만 여느 '멀쩡한'사람들보다 더 씩씩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에 "아 정말 대단하시구나.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사실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에 대한 끔찍한 타자화의 결과였다. 다리를 못쓰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어떻게 '보통'사람들보다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이런' 사람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데 멀쩡한 난 뭐야?! 

  다시 책장을 넘긴다. 이번엔 '대단하다'라는 느낌보다, 좁은 편견에 갇혀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선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건 '몸의 불편함'이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사람의 '타자화'였음을. 몇 개의 글을 제외하면 이 책에 '다리가 불편한 것'을 알려주는 '증표'는 없다. 오히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시련과 굴곡, 놓치기 쉬운 일상의 아름다움이 가득할뿐. 책에서 느껴지는 선생님은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보다는, 남들처럼 좌절도 하고 푸념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로도 받고 또 어찌어찌 살아갈 힘을 추스리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단지 조금 더 감사해 할 줄 아는. 

  한달에 한번. 샘터에 연재했던 글을 엮어놓은 책이다. 여러편의 글에서 선생님은 미리 써놓지 않고 닥쳐서야 쓰는, 그것도 소재를 찾지 못해 끙끙거리는, 별로 '멋지지 않은' 일상을 풀어놓는다. 대개 어찌어찌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 소재가 되고, 그렇게 한편의 글이 써진다. 자신의 '예쁘지 않은 면'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솔직함이 여기 실린 글들의 매력이다. 한껏 짜증이 나서 동료 교수가 보내준 '좋은 말'들에 하나씩 토를 다는 모습, '젊음'앞에서 주눅들어 '레인보우 마끼'대신 나이든 사람들이 먹는다는 '프라이드 마끼'를 먹고 변명하듯 '나이 듦'에 대해 풀어놓는 모습, 자기는 단지 '의심하기 귀찮아서' 남을 잘 믿는데, 한번은 덜컥 중국한 '부세'를 '굴비'인줄 알고 바가지를 썼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사람좋고 넉넉한 중년 여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나 저마다의 산을 오른다고 했던가. 장영희 선생님은 분명 많은 곡절을 겪었고,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선생님의 삶이 주는 감동은 "자, 잘 봤지? 너희들도 나처럼 역경을 잘 딛고 일어서라고!" 이런 영웅의 훈계가 아니다. 때론 비틀대고 때론 주저않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어찌어찌 견뎌가는거 아니겠냐고. 함께 가는 사람들과 때로는 슬픔, 때로는 기쁨을 나누며 그렇게 같이 견뎌보자는 토닥임이다.  당신이나 나나 때론 싸우고 화내기도 하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러면서 또 돕고 마음 나누며 사는 이 인생이 바로 기적 아니겠냐는. 

  한번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장영희 선생님이 당당할 수 있는것은 여러모로 지원해줄 수 있었던 가족들과 괜찮은 사회적 지위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스스로 결핍되었다느 느끼는 내게는, 타인의 어둠은 보이지 않고 밝은 빛만 보였던게다. 나는 이것이 없는데 저사람은 있네..그런식의 비교는 스스로를 '마음의 불구'로 만든다. 선생님을 당당하게 만든 것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굳은 의지라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힘'이 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보살피는 행위이기도 한 것임을.   

  익숙한 이름에 유달리 故자가 많이 붙는 2009년이다. '삶'이 있으면'죽음'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지만 구체적인 개인의 죽음은 늘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고인의 명복일 빈다, 라는 말은 얼마나 헛헛하고 쓸쓸한지. 죽음 앞에선 늘 말이 없어진다. 선생님의 희망, 선생님의 기적들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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