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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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선우 시인이 좋다. 그 툭 터질것 같은, 달큰한 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아픔마저도 황홀하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좋다. 내 둔한 몸감각으로는 그녀의 시적 감수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때가 태반이다만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생명에 대한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떤 주제의 글이라 하더라도.  

순전히, 김선우 시인의 해설 때문에 산 책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빛깔로 채색된 사랑의 기억이 있다. 다른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늘 자신만의 아련한 기억과 겹친다. 기억속에 묻힌 희미한 추억이 타인의 언어에 힘입어 다시 선명하게 채색되기도 하고, 뭉게졌던 윤곽선들이 새롭게 그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시를 빚어낸 것은 시인 자신이 겪은, 또는 시인 주변인들이 겪었던 개별화된 사건들이지만, 언어로 빚어진 순간 우리 모두의 경험과 살며시 포개진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보편적 사건들이, 저마다에게 각기 다른 파장을 빚어내고 색색의 의미로 각인된다. 그 울림속에서 또 하루를 견뎌갈 힘을 얻기도 하고, 죽은 줄 알았던 감정의 맥박이 고동치는 것에 새삼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시인이지만 저마다의 빛깔로 읽어내는 것은 개인이 그려온 삶의 궤적이다. 

흰 바탕에 검은 글자들만 덩그러니 놓인 평범한 시집들은 어쩐지 건조하다. 딱딱한 인쇄체 글자들로는 적절한 시어를 고르느라 몇날 몇일 고심했을 간절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시를 엮은 시집답게 이 책엔 '시적 순간'을 그려낸 삽화들이 시의 여백을 채워준다. 각 시들 뒤에는 김선우, 장석남 시인의 "시보다 더 시같은 해설"이 이어진다. 시집 뒤에 나오는 '시보다 더 난해한'해설이 아니라, 시와 독자의 공간을 채워주는, 시의 외연을 넓혀주는 해설들이다. 간간히 시작 동기, 혹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기도 하고, 작가의 시적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시 구절이 동봉되어 있기도 하다.   

표지 뒤에 이런 설명이 덧붙여졌다. "장석남의 시에는 그리움이 있다...김선우의 시에는 달콤함과 아픔이 공존한다...클로이의 그림에는 찰나가 숨 쉰다...." 확실히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 더욱 여성적이다. 아픔마저 달콤하게 취하게 만드는. 문체에 대한 선호도야 개인의 입맛이다. 나는, 어딘가 '분석적'이고 '관찰자'적인 장석남 시인의 해설보다는, 어느순간 시에 풍덩 빠져 자연스레 감정이입으로 이끄는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 더욱 사랑스럽다.   

 

책 표지에는, 별로 어울릴것 같지 않은 문구가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화제를 모은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긴긴 연애편지같은 사랑 노래를 한권의 책으로 만나다!"   

이런 아름다운 시들과 조선일보를 매치하는 것은 왠지 억울하다. 히틀러가 베토벤을 즐겨 들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것 처럼. 오늘 도착한 고 장영희선생님 영미시 책인 "축복" 표지 뒤에도 버젓이 쓰였다. "조선일보에 1년간 연재된 인기 칼럼 모음". 사설이나 정치/사회 면으로는 우리를 분노케 하기 충분한 조선일보지만, 문화컨텐츠 면에서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보일때가 있다. 책의 주제가 자신들의 입맛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 괜찮은 책 리뷰/소개도 곧잘 올라오곤 하니까.  

나는, 모든 시는,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도발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좌파적이라고 (또는 그래야 한다고)생각한다. 시인의 언어는 게을러서는 안되고, 늘 변화를 쫒으면서도 삶에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깔고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은 늘 모순인지라 그런 아름다운 시어들로 용비어천가를 빚어내기도 하고, '혁명적'인 언어로 '수구적'인 삶을 사는 시인도 있지만 말이다.  이런 '시'들과 조선일보를 매치시키는 것이 영 심술나고 맘에 안들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중요한 것은 시를 읽어내는 우리의 마음인것을. 매 순간 삶에 깨어있는 시인들처럼 우리 스스로가 쉽게 안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길 뿐. 

언제나, 행동보다 말이 쉬울 뿐이다. 시를 빚어낸 시인의 고통과, 시를 읽어내는 우리의 마음 사이의 불협화음처럼. 다행히 이 책엔 간간히 시인들의 에피소드가 실려 쉽게 지나치려는 내 발목을 붙잡곤 했다. 평범해 보이는 단어 속에 배인 슬픔들.  

사랑의 늪에 빠진 벗들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선물할 만한 좋은 책이 한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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