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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 당대비평 특별호
슬라보예 지젝.도정일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고 김선일씨의 안타까운 죽음도 어느새 4년이자 지났지만 그때와 상황은 별로 나아진게 없는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한나라당 과반수 의석도 차지했겠다 슬슬 재파병문제가 거론되는걸 보면 말이다. 사건 당시에 쓰여진 칼럼들이라 시의성이 떨어질거라 예상했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슬프고 화가난다. 아마 이번엔 '국익' - 파병으로 얻은게 없다는건 이제 초등학생들도 다 알겠다 - 이란 허구적 논리에 '실용'이란 옷을 덧붙이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뿐.
아부그라이브교도소 - 잔인한 고문 사진이 유포된 후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논할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수십, 혹은 수백명에게 가해진 잔인한 고문에는 몸서리치며 한탄하면서, 수십만명을 굶겨죽이는 경제적 제재에는 왜 침묵하는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것 같은 슬럼으로 어쩔수 없이 기어들어가는 사람들은 왜 외면하는가. 혹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을 죽일수밖에 없는 전쟁은 왜 '어쩔수 없는 악'으로 간주하는가. 가끔식 수면위로 떠오르는 잔학행위에 새삼스레 놀라는 것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인간 문명의 폭력성 - 끊임없이 파괴해야만 지속될 수 있는 현 문명/경제체제 -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김선일씨 사건을 두고 여러가지 화두들이 튀어나온다. 즉각적으로 파병을 철회했던 필리핀과 달리 피랍과 거의 동시에 "파병강행"을 선언했던 대한민국의 무책임함부터, 무사히 살아돌아온 인질들에게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비난을 퍼부었던 일본에 대한 비판, 더욱 잔인한 영상을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서 '공포'를 생산하고 '고통'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미디어, 그리고 김선일씨에 대한 '민족적 정서'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까지. 김선일씨 사건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동시에 너절한 현 문명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그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상기시키고 그를 대신해 싸워야 한다. 생명까지 도구로 사용하는 위태로운 이 시스템에 대해.
테러는 정당화될수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순환구조속에서 새로운 피해자로 선택되는건 늘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죽음은 늘 안타깝다. 핵심과 관계없는 개인들을 죽이는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지만 타인의 목숨을 걸고, 혹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거래할수 밖에 없도록 몰고간 당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테러집단을 응징하겠다며 새 목숨들을 사지로 내모는 자 ㅡ 아직 흘릴 피가 모자랐던 탓일까? 저쪽에서 한바가지 피를 흘리면 이쪽에서 흘린 피가 그만큼 상쇄되는가? '복수'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명석함이 가증스럽다. "약자의 폭력을 규탄하기에 앞서 이 세계를 끝이 안 보이는 폭력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 제국주의의 폭력영구화 기제부터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라는 박노자 교수의 마지막 글은 시원하기까지 하다.
태어난 사람들이 언젠가 죽는다는건 자명한 사실이고,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일은 산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위다. 김선일씨를 비롯해 이라크에서 죽어나간 수 많은 사람들ㅡ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살아남은 우리가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슬픔보다 분노가,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에 실린 칼럼들은 이라크와 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위해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건 슬픈 일이다. 모든것이 바뀌는 세상이지만 거의 모든것이 바뀌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다. 4년이 지난 지금. 떠나간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