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는것이 병이다 ㅡ 사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상처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음 마음 편했을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는 종종 개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단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물론 평생 보고싶은것만 보며 눈과 귀를 닫고 살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고통을 회피하는것은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못할 뿐더러 또 다른 ’숨겨진 고통’을 낳을 뿐이다.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ㅡ 온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태어난 자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듯 ㅡ이야말로 상황을 바꿀수 있는 힘이다. 모두가 인간이 저지른 일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하든.

 이 책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증오의 문화”에 대해 거침없이 까발린다. 흑인, 여성, 유대인, 노동조합원, 환경운동가 등 특정 소수집단에 대한 이유 없는 - 가해자들의 논리로는 지극히 정당한 사유로 - 박해/린치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빼곡히 채운다. 처음 몇 장을 보고 있자면 날것 그대로 표출되는 듯한 증오에 와락 현기증이 날 정도다. 우리의 고매한 이성은 타인에 대한 ‘증오’에 반대하는 듯 보이지만 현 사회는 ‘증오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너무도 자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증오의 힘’이 이용당하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소박한 희망이 현실의 부조리를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원주민 학살, 흑인 린치, 강간, 아동노예, 농약살포......이 책의 예들은 도무지 끝이 없다.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고싶은 인간의 순진한 욕망은 끔찍한 잔학행위들은 그저 ’예외’라고 믿고싶겠지만 모두가 현재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평범한’ 일이다. 노예제는 폐지된지 오래라고? ’특정 형태’의 노예제는 분명 폐지된 것이 맞다. 엄청나게 값이 싸진 ’현대 노예’들의 처지가 고전적 노예보다 못하다는것이 유감이지만. 당장의 이익이 급한 우리 똑똑한 인간은 관상용 백합재배를 위해 인간 스스로에게도 치명적인 독약 살포를 주저하지 않는 용맹함까지 지녔더랬다. 흑인/원주민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가히 상상초월이다. 특히 교도소같이 명목상의 권리조차 무시되는 곳이라면.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일 압권은 전쟁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전쟁의 신’께서는 모건 패밀리를 비롯한 전쟁 지원 기업들을 한번도 실망시키신적이 없다. 자비롭기도 하셔라!  역시 현대의 증오는 자본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파괴적이고 모든 것에 적대적이도록 - 심지어 자기가 살아가는 지구까지 더 빨리 못 망가뜨려 안달일 정도로! - 만들었는가? 저자는 타인을 물건처럼 대상화하는 문명의 속성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 ’나와 너’의 저자 마르틴 부버를 자주 인용하면서ㅡ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쫓겨갈 때, 그의 집을 차지한 사람이 마르틴 부버였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적어도 한국 독자라면 마르틴 부버의 자리에 김상봉교수의 ’서로주체성’을 놓고 보아도 좋겠다.) ’생산’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현 문명은 "바깥의 정복과 안의 억압"에 뿌리를 두고 "대다수의 피땀위에 소수만이 안락을 누리는" 절대 지속 불가능한 체제다. 자국 혹은 소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차피 ’부속품’이니까. 악의적 경제압박으로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그저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어진다’.

모두를 미워하는 듯 보이는 이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무기는 -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문화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철저한 절망’이다. 문화/기업이 변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목매달며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기득권자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타성’이 지금도 이 시스템을 견고히 세우고 있다. 강요된 욕망을 소비하며. 때로는 강요된 ’증오’를 표출하며. 노예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 책의 무궁무진한사례들은 인간성의 극단을 보여주지만 저자는 결코 소박한 희망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독설, 조롱이 가득할 뿐. 주르륵 쏟아놓듯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구어체 서술이 특징적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도 많고. 생생한 사례들이 주는 구체성은 좋지만 정제되지 않은 터프함은 단점이다. 20여개나 되는 꼭지도 장황함에 한몫 한다. 마치 ‘증오에 관한 다큐멘터리’ 폭격을 맞은 듯한 느낌.

 타인의 고통에 쉬이 공감하는 섬세한 감수성으론 이 책의 사건들을 감당하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나중엔 어쩔 수 없이 ‘거리두기’란 자기검열이 생길 테니까.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헤집어 들여다 봐야한다. 철저하게 절망하고 얄팍한 희망 따위에 속지 않도록ㅡ 인간에 의해 행해진 잔학행위 앞에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자기위로는 머리를 짚 속에 박은 닭 같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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