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 김유정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4
김유정 지음, 유인순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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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언어영역에 나올만큼 '고전'스러운 소설을 읽은지 참 오래도 되었다. 이미 언어영역 공부할 때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던건지. 투박한 사투리와 피폐한 농촌이 그다지 고상하지 못하다 생각해서 인지. 선거 전날 공연히 마음이 설레 잠 못 이루다 새벽 내내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원체 강원도 사투리가 많아 틈틈이 뒤의 용어해설을 들춰보다 나중엔 거의 지레짐작하며 읽었다. 발음을 흉내내다보면 왠지 정겹고 입에 감긴다. 마치 그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양.

총 23편의 단편들이 실렸다. '만부방'이나 '봄봄', '동백꽃'처럼 이미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뻔질나게 봐왔던 단편들도 있고 영 생소한 단편들도 있다. 문제집에서 조각조각 보는 소설이랑 이렇게 한편의 이야기로 보는 소설은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까 (하긴, 제버릇 뭐못준다고 '매팔자' 란 단어에서 반어적 표현임을 묻는 문제를 떠올리기도 했다. ㅋㅋ) 지금도 어렵다 어렵다 말은 많지만 정말 이들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고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작품해설에서 유인순교수는 김유정 소설의 특징으로 "삶의 양가성"을 든다. 살기 위해 제 논의 벼를 훔치는 '만무방'의 응오나 '금'의 덕순, 남편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남의 남자에게 몸을 파는 숱한 아내들. 유난히 몸을 파는 아낙네들 - '들병이'든, 거짓결혼이든 - 이 많이 등장하는 건 제 몸뚱아리 밖엔 팔 것이 없는 그네들이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전형'이었기 때문이리라. 결혼식을 올리고 옷을 훔쳐 걸인이 된 전남편과 도망치는 '산골아낙네'나  뭇 남자들에게 술값으로 세간을 받아 원래 남편과 유유히 떠나는 '솥'의 들병이 계숙이나. 요즘도 사기 결혼이 많지만 소설속 그네들이 원하는 건 호화로운 금은보화가 아니라 단지 '남편과 그럭저럭 먹고 지내는 것'이다. 그네들이 방탕하거나 윤리를 몰라서가 아니라ㅡ 절박한 생존의 수단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방탕함' - 노름, 술, 들병이, 매춘 - 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선악/빈부/열불녀와 효불효 등의 이항대립은 어느새 모호해져 삶의 일부분이 된다. 날것 그대로인 삶을 들여다보면 온갖 모순들이 공존하지만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게다. 양가성의 수용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중학생때였나. 멋모르고 현대단편소설집을 뒤적이다 너무도 피폐한 그들의 삶에 충격을 받아 한장 한장 마음졸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감자'에서 큰 동요없이 왕서방에게 몸을 내어주고 결국엔 돈 몇원의 가치로 죽어버리고 마는 복녀는 여느 '비운의 여주인공' 애절하지도 않고 안타깝지도 않은, 말그대로 '날것 그대로'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 어릴적만해도 순결/정절 운운하는 목소리들이 꽤 있었는데. 그럼 그 시대 아낙들은 뭐지? 한동안 먹먹했었다. 소설은 어쩔수 없이 개인 중심의 사건전개지만 우리는 개인을 몰고가는 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착취당하는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다. 밖에선 힘 한번 못쓰는 남자들이 집에오면 자기 아내를 개패듯 패고, 아내 몸뚱아리로 먹고사는 일이 비일비재한것이 그 시대 남자들이 몰상식해서인가? 양상은 다르지만 우리사회에서도 약자에 대한 착취는 여전하다. 비정규직/청년실업 문제도 그렇고ㅡ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노예를 생산하지 않으면 지탱되지 않는다는 명제가 다시 되풀이 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노예의 처우 개선'이 아니라 '노예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표지의 나란히 선 세 시골소녀들이 정겹다. 고개 돌리면 까무잡잡한 얼굴에 얼굴 가득 웃음을 흘릴것 같은 그네들. 이 단편들이 보여주는 삶들은 결코 유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비루함 그 자체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을 찾고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질긴 생명력만큼은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 삶의 비린내가 확 풍길것 같은 이 현실성이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일게다.  

* 장장 50페이지에 걸쳐 용어해설이 덧붙여있다. (순전히 편리함 때문에) 후주/미주보단 각주를 선호하는 터라 뒤를 들춰보며 읽는것이 영 불편했다. 마치 '작가의 의도를 남김없이 파악하려'용쓰는 듯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중엔 몇개만 찾아보곤 순전히 감으로 알아넘겼다. 중고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으니 자세히 설명하려 애쓴건 좋으나 '톨스토이, 버스걸, 줄창, 시래기'이런 말들까지 풀어놓은것은 지나친듯 싶다. 단어 수를 줄이고 각주로 처리했으면 좀 더 편하게 읽을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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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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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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