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왕의 전설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권미선 옮김 / 평사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이 구사하는 말 - 단어선정에서부터 전체적 스타일까지 - 에는  어쩔수 없이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경험과 그를 자신에게로 통합시키는 저마다의 방법이 타인과 다른 개인을 만들어낸다. 책의 주인공 왈리드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왕자지만 그가 지은 멋들어진 시는 허름한 가난뱅이 함마드가 지은 '진실한'시를 이기지 못한다. 왕자는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양의 일을 시킴으로써 - 어마어마한 양의 역사자료 정리와, 그것을 모두 담은 양탄자 한장을 짜내는 것 - 함마드의 영혼을 파괴하고자 하지만 결국 상처입는건 자기 자신이었다. 함마드가 온 생명력으로 짜낸 양탄자를 찾아가는 왈라드의 험난한 여정 - 죽은 함마드의 세 아들과 차례로 만나게 된다 - 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운명과 개인의 선택에 대해 -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면, 운명은 '선택'할 수 있다고 - 말한다. 왈리드는 자신이 함마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끊임없이 자책하지만 ㅡ 책 끝에는 자신의 생명을 다해 양탄자를 짜내는 것이 사실 함마드의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경험을 거친 후에 비로소 왈리드는 '진실한'시를 써낸다. 

   
 

 양탄자에는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한꺼번에 담겨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양탄자를 보게 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그리고 미래는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양탄자 위에 펼쳐진 미래는 수도 없이 많은, 서로 다른 길이 얽혀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각각의 길이 다른 장소와 연결되어 있어도 인간 개개인은 자기가 어느 길을 가야할지, 뒤로 물러나야 할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 가야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운명의 힘보다 그때그때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결과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주제가 잘 드러난다.(p.245 역자후기 중)

 
   

 

''사랑, 명예, 시'가 가장 중요했던 시대의 이야기'라지만 정작 그 완벽한 '시'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만 있고 (그럴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 '카시다'라는 시 형식에 대한 맛보기로 한편쯤 실어놓았어도 좋았을걸) 책 중간중간 유명한 시구들이 등장한다. 몇달동안 먹지도 않고 시력도 잃은 채 양탄자를 짠다든가 사막의 신 '드진'이 등장하는 등 '전설'이란 제목에 어울릴법한 마법적 요소가 많고 스토리도 뻔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빠른 전개 덕에 질리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기에 인간 삶에 대한 당돌한 몇마디가 깊이 각인되는 것일수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한다" ㅡ 요즘은 '책임방기'가 너무도 흔해 과연 '책임'이라는게 무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양탄자를 찾아 함마드의 아들들에게 돌려주는것으로 함마드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려'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았다. 양탄자는 함마드에게 내려진 벌이었지만, 함마드는 자신의 '꿈'으로 전환시켜 온 생명력을 쏟아 완성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스스로를 짓누르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살다보면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지만 무슨일이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그 일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해석'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반응/행동을, 더 나아가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당돌함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점점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것을 보면 '사회적 감성'도 계발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라면 사회적 책임의식의 부재는 ㅡ 집단적 자기부정, 패배의식과 같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그야말로 사회 전체가 '우울증'이다. 차별과 동일시라는 권력기제 - 대표적으로 '학벌'이라는 고질병은, 어쩌면 그것 말고는 스스로의 가치를 세울 수 없는 뿌리깊은 자기모멸감에 기인한 것인지도.

'책임'에 대해 물고 늘어지다 글이 엇나가버렸다. '사막','양탄자' 등의 이국적 소재들과 낯선 이름들이 재미있다. 회오리돌풍으로 나타나는 사막의 신 '드진'무리는 귀엽기도 하고. '"사랑, 명예, 시"가 가장 중요했던 시대'라는 문구가 어쩐지 그립다. "사랑, 혁명, 시"를 좋아한다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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